진보정당의 태동과 수난, 백기완 독자후보논쟁, 진보정당의 연이은 실패, 진보정치의 가능성 ‘국민통합21’ 창당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네 번째 인터뷰 인물은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다.

1980년대 서울·인천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노동현장에 뛰어든 이후 평생을 노동·진보 정치운동에 몸담은 그는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면면히 이어온 대한민국의 노동·진보정치를 ‘대중정치시대’로 이끈 주역이다.

노 대표는 1987년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 멤버였으며, 이듬해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만기 출소하던 92년, 백기완 대통령 선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또,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창립시절에는 기획위원장을 맡았으며,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을 통해 한국 진보정당의 ‘대중시대’를 이끈 주역이자 ‘산 증인’이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이 분당하고, 이후 진보신당 창당을 통해 진보정치의 새로운 과제와 시도를 위해 제2창당 작업을 진행 중인 그는 “우리 정치가 유의미한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당이나 후보지지뿐 아니라 정책지지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와의 인터뷰는 지난 1월29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진보신당 당사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눠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진보정당의 태동과 수난, 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정치의 발전, 민주노동당 창당까지의 과정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개되며 ②편에서는 민주노동당 창당과 정치적 의미 그리고 공천과정의 문제점과 분당에 대해 ③편에서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진보정치의 새로운 과제와 시도 그리고 비전 등을 다룰 계획이다.

인터뷰 게재가 완료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터뷰 전문과 동영상을 제공할 예정이다.

진보정당의 태동과 시련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탄압

대한민국의 진보정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1948년 미군정시기를 지나 군사독재시절, 그리고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진보정치세력의 반독재투쟁은 고난의 역사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의 암울했던 현대사만큼 진보정당의 시련도 컸다. 특히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하던 진보정치세력은 좌파정치를 구현한다는 이유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노회찬 대표는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관련해 “건국이후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민주주의가 보장됐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꽃을 피웠고, 민주주의가 짓밟히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함께 짓밟혀야만 했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주의가 잠깐 숨통을 틔우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숨통을 틔었고, 민주주의가 왜곡되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함께 왜곡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여당인 자유당은 초대대통령에 대한 3선제한 철폐를 주장하며, 1954년 불법적인 4사5입 개헌을 강행한다. 이에 맞섰던 야당세력 가운데 비교적 보수성향으로 분류되는 세력은 민주당으로 결집됐고, 혁신세력은 진보당으로 결집하게 된다.

1956년 창당된 진보당은 ‘반자본-반공산’의 중도파 노선을 표방하며,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이름을 내건다. 이후 평화통일론을 주장,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대항하는 등 혁신정책을 제시한다.

이런 가운데 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맞대결을 펼치게 되고, 이승만 후보가 70%, 조봉암 후보가 30%의 득표율을 얻어 결국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조봉암 후보의 득표율에 충격을 받은 자유당 정권은 이후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시켰다. 향후 장기집권 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과 진보당에 대한 탄압은 진보정당의 궤멸을 가져왔고, 평화통일에 대한 공개적 논의는 물론 혁신정책에 대한 논의자체를 금지시켰다. 노회찬 대표는 당시 시대상황을 “진보정치의 혹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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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시대, 진보정치세력의 명맥유지

조봉암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은 지 8개월 뒤인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진보정당이 다시금 싹을 틔웠다. 그렇게 혁신정당은 다시 살아났다.

지표면 아래 있던 진보세력들은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진보당 활동인사 중심의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사회당’, ‘혁신당’ 등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 동안 수면아래 있던 진보정치세력은 큰 흐름을 만들지 못한 채 이합집산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61년 초 들어서면서 남북 통일운동이라는 진보세력의 중심과제를 통해 이들은 하나로 결집하게 된다. 군소 혁신정당들이 합쳐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기에 이르고, 통일운동의 공동전선으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이 건설된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모든 정당은 해산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정당만이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반면 혁신계열은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있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모두 불법화되고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이 되면서 ‘통일사회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은 간판만 걸어 놓은 채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한편, 노회찬 대표는 통일사회당에 대한 일화와 관련해 79년 ‘YH무역농성사건을 언급하며 “YH여공들이 농성하려 했던 곳은 신민당 당사가 아닌 통일사회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에 가서 농성하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자 했으나, 구체적으로 알아보니깐 통일사회당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긴급히 점거농성 장소를 변경해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라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노 대표는 이어, “서울역 부근 빌딩옥상 옥탑방이 통일사회당 정당 사무실이었다”며 “그런 좁은 사무실이 당시 대한민국의 유일한 진보정당이었고, 현주소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웃지못할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짓밟히면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도 없었고, 그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어떤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암울했던 시기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독재정권은 물러갔고, ‘서울의 봄’을 기대했지만,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로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고,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일종의 장식용 관제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민주사회당)을 창당하게 된다.

특히, 관제야당 가운에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은 1987년 대선에서 후보자를 배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 대표는 “그렇게 해서 당시 입법회의에 참여시키고, 민정당 후보를 출마시키지 않도록 함으로서 진보정당 후보를 당선하도록 했다”며 “국제사회에 한국도 진보정당이 있다는 시늉을 하는 도구로 악용했다”고 비판했다.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오랜 기간 독재정치 하에서 신음했던 민주주의는 다시 일어섰고, 진보정당도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양김의 분열은 노태우 군사정권이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87년 대선 독자후보와 ‘민중의당’ 창당

87년 6월 항쟁이후 군부독재종식에 대한 분위기가 확산됐고, 자연스레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후보단일화 문제가 논의된다. 민주화운동세력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진보정치세력은 ‘독자후보론’을 펴며 백기완 후보를 추대했다.

노회찬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독자후보를 굳이 내려고 했던 배경에는 그걸 통해서 1988년에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라며 “한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전세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던 것은 사실 아니었다”고 말했다.

진보진영 독자후보로 추대된 백기완 후보는 13대 대선을 이틀 앞둔 87년 12월 14일, 후보직을 전격 사퇴한다.

노회찬 대표는 이에 대해 “일단 백기완 후보의 출마를 통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필요성과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방향에 대해 알릴 수 있는 만큼은 알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며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된다는 목표와 동시에 대선에서 단일화를 통해 독재정권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도 중요했기 때문에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독자후보로 남는 것이 진보정당 건설에 도움이 되느냐,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를 했을 때 진보정당 건설에 정치적 명분을 더 만들어주는 것이냐를 두고 당시에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심각하게 내부에 분란이 있었던 건 아니다”면서 “완전히 일치를 본건 아니지만 다수견해는 사퇴하는 게 맞다고 봤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30개 지구당에 1천여명의 당원이 참가해 ‘민중의당’을 창당하게 되고, 민중의당 이름으로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게 되는 등 비로소 진보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민중의당 창당은 수십 년간 단절됐던 진보정치운동의 재개를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창당 해인 88년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지 못한 채 정당법에 의해 자동 해산됐다.

한편,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통한 민주세력의 승리대신 자신들의 권력욕을 우선시했고, 결국 양김의 분열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불러오게 된다. 결국 백기완 후보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양김이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서 군부독재 종식이라는 정치세력화 운동은 끝내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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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한국진보정당의 새로운 분기점 도래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본격화되면서, 1980년대 말은 한국진보정당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다.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을 통해 조직의 역량이 성장한 노동운동 진영은 1988년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과 인노협(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노동운동세력의 정치적 참여는 조직적이지 못하고 미미했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 대표는 “노동조합운동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방침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고, 노동조합이 정치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 조합원들이 충분히 수용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에서는 독자후보, 후보단일화, 비판적 지지로 나뉘어져 있었던 문제가 있었고, 노동조합의 허리와 아래 부분은 정치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그런 방침을 갖다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1987년 6월 항쟁 전후 당시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노회찬 대표는 “1985년 이른바 유화국면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으로 진보정당 얘기가 나왔다.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근본적인 변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그런 진보정당의 필요성들이 얘기되고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개했다.

그는, “당시에 존재하던 야당인 민주당은 진보정당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노선 면에서 부족한 게 많았다”고 언급한 뒤 “진보정당 활동의 상당한 제약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얘기됐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이어, 진보정당 건설이 구체적 실천 계획으로 고민하게 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이어 7월~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또 그 이후에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을 기점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시작되었고, 민주화가 역전되기 힘든 그런 상황으로 전개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진보진영의 염원은 자연스레 1987년 12월 대선에서 독자후보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87년 12월 대선 당시 독자후보론을 비롯해 당시 진보정치에 참여했던 세력은 크게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제헌의회(CA)그룹, 노동·문화계 진영 등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노동운동세력과 좌파운동세력이 가장 적극적으로 진보정치에 참여했으며, 특히 인민노련과 제헌의회그룹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인천과 부평지역의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노회찬 대표는 1987년 인민노련을 창립하고, 이듬해 인민노련 사건으로 92년까지 수감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이 밖에도 오세철 교수(이후 민중정치연합 대표)와 청년진보단체, 최열 총장(이후 환경연합 대표) 등이 진보정치에 참여했으며, 농민운동의 경우 전농충북도연맹과 대구경북지역의 농민회 조직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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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련과 민중당의 결성 그리고 분화... 합법정당화 vs 독자정당화

1987년 대선과 88년 총선을 통해 분열된 진보정치세력들은 이후 다시 결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시로는 최대 규모의 진보정치세력의 운동연합체인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다.

1989년 결성된 전민련은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8개 부문단체와 전국 12개 지역단체, 2백여 개별단체가 총망라된 전민련은 명망가 위주의 재야운동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운동의 토대위에서 민족민주운동을 전개하는데 토대를 마련한다.

전민련은 이후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발판을 마련할 것인가, 보수야당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합법적 정당화를 이룰 것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섰고, 결국 독자적 정치세력인 민중민주정당 건설에 앞장서자는 결의안을 상정한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에서 이 같은 결의안이 부결된다.

중앙위원회의 부결은 진보정치세력의 분화를 가져오게 되고, 당시 중앙위원회 결정에 불복한 전민련 지도부 일부는 전민련을 이탈해 새로운 독자정당건설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결국 1990년 민중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90년 11월 창당된 민중당은 이우재 상임대표를 비롯해 장기표 정책위의장, 이재오 사무총장 등 지도부 대부분이 전민련에서 이탈한 명망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민중당 또한 1992년 대선과 총선에 참여했지만 원내진출 실패로 정당법에 의해 자진 해산하게 되고, 이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정태윤 등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의 간판을 걸고는 더 이상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김문수, 정태윤 등은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신한국당 전신)에 입당하게 되고, 이재오 등은 이후 1996년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에 참여하게 된다.

전민련 소속의 이부영 등 일부 지도부는 합법정당 건설을 위해 기존정당과의 제휴를 주장하며 전민련에서 탈퇴하고,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정권의 탄압으로 전민련의 조직 역량은 약화된다. 이후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전민련은 해체된다.

전국연합에는 이창복, 천영세, 최규영, 양재덕, 유기홍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백기완선거대책본부 참여세력도 동참한다. 아울러 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한총련의 전신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이 참여했으며, 전국 27개 재야민주화 운동단체가 함께 했다.

신한국당에 참여한 인물 이외의 사람들은 진보정당운동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했다. 이에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민중당 해산 이후 곧바로 진보정당을 재건하자는 즉각적 재건론과 시간을 갖고 준비를 더 하자는 의견이 상충하게 된다.

진보정당의 연이은 실패... 노동운동세력의 지지 미비 및 내부갈등

노회찬 대표는 “일부 상층명망가들은 더 이상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힘들다면서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이우재 이런 분들이 다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민중당 해산 이후 즉각적인 진보정당 재건론과 시간을 갖고 준비를 더 하자는 견해로 의견이 나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민중의당부터 민중당까지 실패한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실패에 이르게 된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시 진보정당을 건설하는데 급급해 한다면,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더욱 나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며 “시간을 충분히 갖고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입장 이었다”고 밝혔다.

노 대표는 당시 진보정당의 실패원인을 △노동운동세력의 공식적 지지를 바탕에 두지 못한 점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내부 갈등 및 대립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꼬집었다.

그는, “노동조합간부 등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 전노협 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발한 점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민중당이 창당 순간부터 해산될 때까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진보정당에 동의하지 않은 또 다른 민중운동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지형이 조성되어야 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이걸 공개적으로 글까지 써서 발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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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총선, ‘개혁당’ 출범... 기성야당과 결합 통해 새로운 실험시도

진보정당의 연이은 실패와 세력분화는 96년 총선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특히 진보세력은 없이 개혁당으로 결합하여 그해 총선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된다.

그동안 진보정당의 계속된 실패로 96년 총선 당시에는 진보정당의 깃발도 올리지 못한 채 진보정치세력들은 통합민주당을 통해 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들은 기성야당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당을 함께하기에는 철학과 노선의 차이가 분명해 이들이 함께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회찬 대표는 이에 대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하나의 선거연합 차원에서 96년 총선에 임했던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당을 함께하고 철학과 노선을 함께하는 그런 당으로 나아가기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혼재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당이) 정책중심 정당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면, 당시의 통합민주당은 그럼 점에서 한계가 많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한계 극복... ‘국민승리21’ 창당

진보정치세력은 이듬해인 1997년 대선에서 민중당 해산으로 흩어졌던 세를 다시 결집해 ‘국민승리21’을 결성한다.

97년 1월 ‘말지’에 민주민중세력의 총결집을 통해 그해 대선을 치르자며 진보정당 건설을 제안했던 노회찬 대표는 “1997년에 대통령선거 때에는 앞서 밝힌 두 가지 문제가 풀렸다고 생각했다”며 ‘국민승리21’의 창당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전민련의 후신인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대화 속에서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대한 동의가 일정하게 확인됐고,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공식결의를 통해 독자적 정당건설에 대한 참여와 지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해 국민승리21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승리21 만드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전국연합의 참여를 끌어내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직접 참여함으로서 과거의 진보정당이 넘지 못했던 한계를 넘는 진전이 있었기에 국민승리21을 만들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민승리21은 그동안의 진보정당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방대한 조직구성과 진보정치구현에 대한 단결된 의지가 있었으며, 특히 민주노동,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의 세 조직이 중심이 되어 폭넓게 구성돼 있었다.

97년 6월 민주노동 대의원대회에서 공식적 참여를 결의하고, 전국연합의 대부분 인사들이 참여했다. 대표적 인물로 이창복 의장을 포함해 천영세, 최규영, 양재덕, 유기홍 전 의원 등이 참여했으며, 노회찬 대표가 이끈 진보정치연합과 오세철·김세균 교수,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 등이 대선초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추대, 15대 대선을 치르게 된다.

당시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은 1.9%의 지지율을 받았다. 지지율 2% 이하일 경우 당이 해산된다는 정당법에 따라 국민승리21은 해산되었다.

진보정치세력들은 대선이 끝난 1998년 원탁회의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후 99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진보정당의 대중시대를 이끈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되는 것이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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