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열단원,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부산경찰서 투탄, 의열단원 박재혁 의거 100주년이 되다

1920년 9월 14일 화요일. 어제부터 내렸던 가랑비는 오전까지 내리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그쳤다. 2시 30분경 부산부 금평정 부산경찰서 앞에 조선옷을 입은 한 훤칠한 청년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경찰서 왼쪽에는 일본인 거류민단 사무소가 있었고, 계단 위쪽에는 부산 이사청이 있었다. 이 지역은 일제의 부산지역 지배와 침탈의 심장부였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중국인 복장을 한 청년이 중국 고서적을 팔기 위하여 경찰서로 들어간다.
중국말을 하며 책을 파는 척하다가,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안전핀을 뽑아 던지자, 우레와 같은 폭음이 들리고 경찰서가 파괴되고 수명의 경찰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죽었다. 주변에는 의열단의 선언을 적은 전단이 날리고 있었다.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박재혁의사 동상
▲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박재혁의사 동상

 

하지만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면 영화와 다르다. 조선옷을 입은 청년은 거침없이 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장과 면담이 있다고 하자, 경비는 그 당당함에 제지를 하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6개월이 넘었지만 부산지역에는 뚜렷한 독립투쟁이 없었다.

경찰서는 2층 건물이었다. 1층 서장실에는 하시모토 경찰서장과 계원들과 집무 중이었다. 경찰서장과 안면이 있는 사내는 헝겊으로 쌓인 폭탄에 불을 붙이고자 했지만 잘 붙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이리라. 당황하는 사이 폭탄 심지에 불이 붙자 황급히 마룻바닥에 던졌다. 거리는 불과 1m 정도였다. 설상가상 폭탄은 서장 의자 다리에 맞아 오히려 청년 쪽으로 굴러온 듯하였다.

그 순간 폭탄은 굉음을 내면서 터졌고 흰 연기가 서장실에 가득 찼다. 1층 유리창이 전파되었다. 폭탄 파편은 사방에 날려 흩어졌다. 청사의 천장 창문과 벽면 판자 등 여러 군데가 훼손되고 파괴되었다.

서장이 앉았던 안락의자의 다리도 분쇄되었다. 천장을 관통하여 2층 사법실 마루판을 관통하여 근무 중인 와다 사법 주임의 의자와 책상 등을 파괴하였다.

경찰서 마룻바닥은 피로 물들어 현장의 처참함을 보여주었다.

폭탄을 맞은 경찰서장은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폭탄을 던진 청년은 오른쪽 무릎뼈를 크게 다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청년은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이었다.

의열단의 의열 기록을 상세히 기록했던 류자명은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를 의열단의 본격적인 의열투쟁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박재혁은 의열단원 최초로 의열투쟁의 거사를 하였고 성공하였다. 비록 경찰서장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3・1운동 이후 침체에 있었던 독립운동의 불을 다시 지폈다. 죽음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열투쟁이 가열하게 일어나는 출발점이었다.

일제 침략의 교두보이자 대륙의 관문으로 제2의 오사카로 불렸던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본 신문은 동경 한복판에 투탄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민족 융화는 근본적으로 실패라고 비난하였다. 그만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은 일제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일제의 손에 죽기보다 스스로 적의 감옥에서 순국의 길을 택했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이었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부산경찰서 투탄이 일어난 지 2020년 올해가 거사 100주년이다. 그리고 내년이면 순국 100주년이 된다. 박재혁은 의열단 최초로 의거를 성공시킨 독립투사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부산독립유공자 1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가터는 부산 동구 범일・좌천동 가구거리의 주차장으로 변했고, 그의 동상은 부산어린이대공원 한적한 곳에 세워져 있다.


오로지 행동으로 보여준 의열단원 박재혁과 친구들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투탄 의거 호외(부산일보,1920.09.14.). 친구인 오재영(오택)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투탄 의거 호외(부산일보,1920.09.14.). 친구인 오재영(오택)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재혁은 1921년 5월 11일 옥중 단식을 하여 순국하였다. 생일이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그는 외동아들인 그는 홀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남에게 교훈 될 멋진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어떠한 기록을 그 자신이 직접 남긴 것이 없다. 집안 내력도 지극히 평범하여 내세울 것이 없다. 어쩌면 위인으로 쓸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의열단원 박재혁(1895.05.17.~1921.05.11.)이다.

그의 삶은 빈곤하고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사실을 알려줄 객관적 증거는 때론 기록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나 유가족의 자료가 없다. 유일한 혈육인 동생은 너무 어려 기억이 없고, 모친 역시 아들의 역사적 행동에 어떤 이야기를 후손에게 남기지 않았다. 남겨진 것은 사진 몇 장과 호적등본이 전부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기록이 없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지만, 학적부에는 인적 사항 이외에 대부분 비어있다.

학교에 다녔지만 추측할 자료조차 없다. 가장 친한 친구인 최천택과 오택의 기록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하지만 서로 엇갈린 진술도 있다.

그나마 일제 경찰과 당시의 신문 자료가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려줄 유일한 자료이다. 의열단원 박재혁은 오로지 행동으로 그 삶을 증명한 독립투사이다.

많은 독립 유공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일대기를 온전히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자료가 부족하기보다 없기 때문이다. 독립 유공자도 일제의 재판 기록과 신문 보도 등으로 그의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가지 않고 체포도 되지 않은 사회운동가 혹은 독립운동가는 유공자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과도한 애국주의적 입장에서 과대하게 평가하여 영웅화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독립투사로 성장하는 데에는 혼자되는 것이 아니다. 박재혁에게는 친구들이 항상 있었다.
박재혁, 최천택, 오재영(오택), 김영주, 김인태, 왕치덕, 김병태, 백용수 등은 그저 그런 평범한 친구들이 아니었다.

죽마고우였던 부산 범일동・좌천동의 정공단 골목길 친구들은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을 하거나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물론 그 친구들도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한 인간의 삶은 무수한 인간관계의 연결 고리에 얽혀있는 인트라망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박재혁 역시 그의 친구들이 있었기에 독립투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죽마고우 다수가 독립투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박재혁과 그 친구들은 그 길을 걸어갔다.

 

 

작가 이병길은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시인이자 역사 문화 질문자로 살고 있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 작가 이병길은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시인이자 역사 문화 질문자로 살고 있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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