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인터뷰] 김원봉 외조카 김태영 박사 “독립운동사 흑백논리로 봐선 안 돼”

2021.03.01 14:33:04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 <후손> 밤 9시50분 방송

 

[폴리뉴스 김유경 기자] 삼일절, 전세계 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그날을 기념하고자 <폴리뉴스>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를 만나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투사냐,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냐.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분분해 2019년, 국가유공자를 기리는 서훈을 추서하자던 논의가 지금은 수그러든 상황이다. 기념사업회 일정을 마치고 미국 출국을 앞둔 1월17일, 약산 선생의 외조카 김태영 박사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나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19년 약산은 일제 주요 요인들을 암살하거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의열단을 조직했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해 군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친일세력이 득세하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을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남북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서훈 추서 등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도 못했다.

약산의 후손들 역시 모진 핍박과 ‘빨갱이’란 낙인 속에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외조카 김태영 박사는 20대 때 미국으로 건너가 터를 잡았고, 이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약산의 뜻과 발자취를 알리는 일을 해오고 있다.

 

“서훈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이미 온갖 고생을 다 했고. 약산 장군을 자꾸 들먹이면 누가 손해겠어. 친일파가 부각되겠지.” 

김태영 박사는 ‘서훈 추서’를 두고 국내서 벌어지는 논란에 대해 보수와 진보, 이분법적 틀에서만 접근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유족으로 약산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과 국가적 차원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 약산이 월북하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됩니까?

해방 이후 약산이 비서한테 ‘나 가기 싫다. 북한은 차마 가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라고 편지를 남겼다. 약산은 독립운동을 27년간 하면서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는데, 고향에 돌아와서 집이 습격되고 체포를 당하는 일에 맞닥뜨렸다. 해방정국 때 이승만 정부는 미군의 조종을 받고, 북한도 소련의 조종을 받아 양쪽 다 사실상 괴뢰정부였다. 남한은 거의 친일파가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 고문을 자행했던 경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데다, 여운형 선생의 장례를 치른 후 ‘나도 여기 있다가 죽겠다’ 싶으셨던 거다. 그렇게 백범 김구와 남북협상 때 올라가셨다.

- 북한의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는 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이 다당제여서 약산이 갖고 있는 인민공화당, 김일성이 만든 노동당, 그외 공산당 등이 있었다. 약산은 김일성의 독립투쟁사를 탐탁지 않게 봤고 대립관계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북한으로 많이 들어와 김일성이 불안해하던 시절인데, 약산이 자기보다 독립운동의 훨씬 선배이다 보니 한직이나마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

- 남북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여러 당이 협조가 돼 내각이 형성됐는데 약산은 노동성에, 우리나라로 치면 노동부장관을 했다. 실권이 없는 자리다. 약산은 실제로 전쟁을 원치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결정권도 없었다. 왜냐면 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고 김일성은 스탈린 노선을 따를 뿐이었다. 즉 자기네 둘이 전쟁을 일으킨 것, 그 뒷배경을 보면 미국과 소련이 있었던 것이다.

- 북한에서 약산의 행적에 대해 더 알려진 바가 있을까요?

중국 공안 검찰 쪽 고위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얘기인데, 북한 부총리급 되는 분이 약산 묘소에 대해 '우리가 잘 모시고 있다'고 했다. 월북 이후 김일성하고 오래 반목을 했다. 나중에는 자택 감금도 시키고 시골로 쫓아보내 격리도 시켰다고 한다. 자기 왕조를 공고히하려고 노동당 등 자기네 출신 아니면 다 숙청하려 했다. 중국으로 도망가고 그런 분도 많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 약산의 생은 사회주의에 더 가깝습니까?

지금 시각에서 굳이 따진다면 김구는 보수, 김원봉은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태원이 쓴 책 <약산과 의열단> 인터뷰에 보면 ‘자신을 어떤 존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약산은 ‘나는 직업혁명가’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혁명이라는 건 잘못된 세상을 뒤집어엎겠다는 것이다. 당시 백범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고, 고종을 임시정부에 데리고 와 망명정부를 만들려고 했다. 약산은 조선을 망하게 한 직접적인 장본인을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서로 노선에 괴리가 있었다.

약산은 무장투쟁 노선을 쭉 걸었다. 약산의 독립운동사 중에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때 교장이 장개석, 교관으로 주은래가 있었다. 아나키스트들도 있었고. 중국이란 남의 땅에 사는 동안 국민당 장개석이 군자금을 대줬고 폭탄 제조법도 알려주고 했다. 중국이 일본하고 싸울 때 국공합작을 했던 것처럼 임정에 합치라고도 했다. 당과 노선이 다르더라도 협력할 땐 하고 여러 사상과 투쟁방식들이 혼재돼있던 시기로, 지금의 ‘김정일과 박정희’ 이런 식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사를 보면 안 된다.

- '빨갱이' 낙인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뿌리 깊은,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여태까지 ‘빨갱이 사냥’으로 이어지고 있다.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증오하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그래야 자기 존재가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빨갱이로 몰고가는 건 반민주, 반인류적 사고방식이라 본다.

북한과의 관계도 그렇다. 김정은 정권이 괴기한 정권이기는 해도 악마화시켜봤자 더 나빠지기만 할 뿐, 자꾸 끌어들여서 뭔가를 나아지는 쪽으로 협상을 해야지. 그게 평화 아니겠나, 상식적으로. 프랑스나 독일도 철천지 원수였다가 명분상이나 실질적으로나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 화해도 하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서훈 문제야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겠나.

- 유족들의 삶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핍박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1950년대 좌우 이념 대립으로 혼란이 가중되던 때, 오제도 검사가 보도연맹을 구상했다. 간첩도 많이 만들었고 유신헌법 초안자다. 보도연맹은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을 전향시켜 보호하자는 취지인데, ‘몇 명을 끌어들여서 도장 받아라’ 식의 지역별 할당제가 있었다. 여기에 우리 어머니, 형, 외삼촌 등 친척이 잡혀 들어갔다. 어머니만 빠져나왔고 다른 분들은 총살됐다. 이후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머니 댁에서 어머니와 지냈다. 세탁소와 염색일도 하며 밥 굶지 않을 정도로 그럭저럭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4.19 이후 시스템상으로는 내각책임제였으니까 민주사회가 된 것이다. 좀 살 만한 외삼촌이 자기 동생들 유골이라도 찾으려 뒷산을 뒤져 300구를 합동장례 치렀다. 고향 밀양 선산에 큰 봉분을 만들어서. 그러다 5.16으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후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 외삼촌은 빨갱이라며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넣었다.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검사, 판사한테 감형이라도 시켜달라고 돈도 갖다바치고 그랬다. 생활은 점차 어려워지고 결국 고아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6년 동안을 학대 받고 엄청 고생을 했다.

-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습니까?

사람들이 커나갈 땐 미래가 있어야 하는데 미래를 죽여 놓았다. 연좌제가 있어 대한민국에선 공무원도 할 수 없었다. 취직도 제대로 못했다. 내 위에 형은 공부도 잘했는데 그런 점에서 충격을 많이 받아 술만 마시다 돌아가셨다. 내가 결혼을 할 때에도 빨갱이 집안이니 수군대는 말들이 많았는데, 그날 다 뒤집어엎으려다 참았다. 그러다 4개월 만에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사업을 열심히 해서 꽤 성공을 거뒀고 경영학 박사도 땄고 가족들과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고국에 실망이 크면서도 한편으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책임감도 갖고 있다. 약산이 왜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치려고 했을까. 널리 알리려고 하며 특히 왜곡된 독립운동사가 많아 바로잡는 게 임무이자 도리라고 생각해 기념사업회를 꾸렸다.

- 기념사업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재까지는 각 지부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밀양, 부산, 광주, 강원 등 여러 군데 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는 건 당분간 미뤄두고 있다. 다만 국내 들어와서 별의별 사람을 다 봤다. 이권에 눈이 먼 사람들이 많더만.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회’라고 있던데 정부에서 예산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행사를 진행하다 참여업체에 대금을 못 줬던 일도 있고. 우리는 ‘약산김원봉기념사업회’로 그곳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부로부터 지원 받는 게 없고 장학회든 뭐든 자비로 충당한다. 약산과 관련된 다른 단체들도 취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칫 고인의 명예가 훼손될 수 있어 경계를 해야 한다. 



김유경 602@pol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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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ㆍITㆍ환경ㆍ노동 등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와 환경노동위원회 정책 이슈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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