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전 비서실장, 조국 전 장관(왼쪽부터) 사진=연합뉴스>
▲ <임종석 전 비서실장, 조국 전 장관(왼쪽부터) 사진=연합뉴스>

 

니체의 저작 <비극의 탄생>의 또 다른 제목은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이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비극(悲劇)을 통해 어떻게 염세주의를 극복했던가를 설명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즉 본능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균형있는 삶을 추구하자던 니체의 깊은 사유가 담긴 책이다. 이 훌륭한 책의 제목이 요즘 한국에서 어느 부끄러운 책의 제목으로 도용당하고 말았다.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가 쓴 <비극의 탄생>은 ‘진실을 밝히고자 발 벗고 뛰어다닌 결과물’, ‘20만 자 분량의 증언과 증거들’이라는 상업적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단순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라는 성추행의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부정하는 내용의 것이다. 마침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으로 보궐선거를 치르고 있는 와중에 이런 책을 냄으로써 고인을 선거 한복판으로 소환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국 전 장관은 페이스북 글에 이 책의 일부분을 인용했다. "어떤 이는 그래도 박 시장이 덕업을 많이 쌓아 천국에 갔을 거로 믿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위선이라는 대죄를 지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그가 이도 저도 아닌 '연옥에 갇힌 영혼이 됐다고 생각한다." 조 전 장관은 자신의 말도 덧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극적 운명이 슬프고, 성희롱 피해자의 처지 역시 슬프다." 그래도 피해 여성을 거짓말쟁이로 몰지 않고 양시론을 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압권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페이스북 글이다. 그는 ‘박원순은 정말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나”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박원순을 예찬하고 ‘박원순의 향기’를 말했다. 그런데 임종석은 대전제를 착각하고 있었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비판했던 많은 사람들도 그의 삶 전체를 비판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성추행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추행을 저지른 또 하나의 얼굴은 추한 것이었고, 더욱이 죽음으로 그 일을 종결시키려 했던 무책임함에 관한 것이다. 그 사건만으로 박원순이라는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평가할 수 없듯이, 그동안 훌륭하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어둠의 사건들이 덮여져서도 안 될 일이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말처럼,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다는 게 아니라, ‘몹쓸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밥먹고 술마시며 나누는 얘기라면 모르겠다. 대체 그런 얘기들을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지금, 세상 사람들 들으라며 굳이 해야 될 이유는 무엇인가. 조국이나 임종석 같이 현정권의 핵심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라면 자기 진영 내부에서 발생한 크나 큰 잘못에 대해, 선거가 치러지는 시간만이라도 책임을 통감하며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이다. 그럼에도 억울하고 슬프다며 이렇게 박원순을 소환하여 예찬을 늘어놓고 있으니, 그 공감능력의 부재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자기들끼리의 집단정서에 갇힌 나머지 국민감정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절제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모습이다. 혹여 여당의 서울시장 선거 승리라는 정략적 의도가 개입되어 피해 여성에게 반복적으로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2차 가해가 아닌, 1차 가해가 될 것이다.

오죽하면 더불어민주당의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까지 "피해 여성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상처를 건드리는 이러한 발언은 자제해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을까. 박 후보도 그런 글이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 수준을 넘어 박 후보의 선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참으로 끝없는 평행선이다. 많은 국민들은 성추행이 ‘몹쓸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권 쪽 사람들은 박원순의 삶은 훌륭했다고 말한다. 동문서답이다.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번번이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을 답하는 모습에 국민들이 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국민들이 어느 쪽을 가리키며 묻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불통도 이런 불통이 없지 않은가.

<비극의 탄생>이니 뭐니 하는 책도 그렇고, 임종석과 조국도 그렇고, 잊을만 하면 자꾸 아픈 상처에 소금을 쏟아붓는다. 이러니 끝이 나지 않는다. 이들이 피해 여성을, 그리고 우리를 쇠창살에 가두어 버렸다. 대체 반성들은 하기라도 한 것인가. 자기 진영 내의 잘못들에 대해 이토록 당당한 사람들은 처음 본다. 어디 박원순 전 시장 사건만일까. 잘못이 드러날 때마다 끝까지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며 인정조차 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가 민심이반을 낳고, 오늘과 같은 정권의 위기를 낳았다. 박원순 전 시장을 선거 한복판에 소환하여 피해 여성을 부정하고 고인조차 영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야당이 아니라 정권 쪽 사람들이 아닌가. 느닷없는 박원순 소환과 예찬을 이쯤에서 중단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다. 이번 보궐선거가 어떤 사연으로 생겨난 것인지를 아예 잊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