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졸업 후 하나회 결성, 쿠데타로 권력 장악
5‧18 민주화운동 시민 시위대, 무력으로 진압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도 ‘4‧13 호헌조치’
5‧18 단체 “반성과 사죄는커녕 변명과 책임 회피”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김유경 기자]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 집권 후 민간인 학살을 벌였던 전두환씨가 90세 나이로 23일 사망했다. 사과한 적은 없었다. 

1996년 1심에서 내란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을 수 없어 이하 호칭은 ‘전두환’으로 한다.

전두환은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께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달 26일 12·12 군사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하나회’ 조직, 쿠데타로 정권 찬탈…5‧18 유혈진압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공고를 졸업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11기로 인연을 맺었다.

4공화국 때 1964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으로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이후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했고, 이로 인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 상임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1980년 9월 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 달 뒤,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 선출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공포,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됐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시한 채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후 6월 민주항쟁이 대규모로 번졌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임기 내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시행하며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에 주력했다. 스크린·스포츠·섹스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인 우민화정책이었다.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을 내세워 삼청교육대를 설치해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구금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의 반공법을 흡수 통합한 국가보안법은 사상 통제와 민주화운동 억압의 핵심 도구로 사용됐고 1980년 이후 7년 동안 국보법 위반 혐의로 1535명이 기소됐다.

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의 ‘5공 세력 청산’ 정책에 따라 백담사로 들어갔다.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때 12·12 군사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문제로 1995년 구속기소됐다.

1996년 8월 26일 1심 재판에서 반란·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상관살해미수죄·뇌물죄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판결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정으로 1997년 12월 22일 사면 복권됐다. 투옥기간은 2년이었다.

마지막까지 책임 인정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아들을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사과 의사를 밝힌 것과는 달리 전 전 대통령은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추징금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 거센 비난을 받았다. 고인이 남긴 유언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5·18기념재단과 5월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등 3개 단체는 23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개최된 긴급 기자회견에서 "전씨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5·18을 유혈진압한 뒤 1980년부터 88년 초까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며 "계속되는 거짓말과 왜곡으로 국민과 사법부를 속인 전씨는 반성과 사죄는커녕 회고록에서 5월 영령들을 왜곡하고 폄훼하면서 역겨운 삶을 살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들 단체는 "전씨는 5·18과 무관하다며 구차한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해왔다"면서 "(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재판이) 대한민국 헌정사를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씨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이 되기를 기대해왔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을 형사고발한 바 있는 故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전씨는 총칼로 광주시민을 짓밟고 정권을 찬탈한데 대해 진정한 뉘우침과 사죄를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며 "3년이 넘도록 계속된 법정 다툼의 결심 판결을 앞두고 떠나 허망하다"고 발언했다.

한편 앞서 전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했던 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으며, 오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은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 사진은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1980년 ‘5월의 봄’은 유신체제를 계속 이어가려는 신군부 세력과 민주 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격돌이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펼침막을 들고 시위 중인 대학생들. 
▲ 1980년 ‘5월의 봄’은 유신체제를 계속 이어가려는 신군부 세력과 민주 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격돌이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펼침막을 들고 시위 중인 대학생들.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동구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동구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 중이다 <사진=5.18 기념재단>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정화를 이유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다. 강제로 끌려온 교육생들이 목봉 체조를 하고 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전두환 정권은 사회 정화를 이유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다. 강제로 끌려온 교육생들이 목봉 체조를 하고 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은 1980년 9월 1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됐다. <사진=대통령기록관>
▲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은 1980년 9월 1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됐다. <사진=대통령기록관>

 

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여사를 옆에 두고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대통령 기록관>
▲ 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여사를 옆에 두고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대통령 기록관>

 

1996년 8월 5일 서울지검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을 보도한 기사.
▲ 1996년 8월 5일 서울지검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을 보도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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