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연진 바른역사 정의연대 대표
▲ 정연진 바른역사 정의연대 대표

일본이 한국과 독도문제로 분쟁을 일으키더니 중국과는 조어도 문제로 중국의 거센 반일시위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반일시위는 날로 격해지면서 시위대가 일본가게를 부수고 불지르면서 “일본과의 전쟁을 원한다!”라고 외치더니, 급기야 중국 어선 1천척이 ‘일본을 정벌하겠다’며 댜오위다오 항을 출항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9월 18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오늘 하루가 주목됩니다.  9월 18일은 1931년 일본이 중국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날로, 중국인들이 한국의 국치일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날입니다. 9월 18일은 정확하게 12년 전인 2000년,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정에 일본군성노예(‘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한 날이기도 입니다. 홀로코스트 소송에 참여했던 미국인 변호인단과 연대한 재미한인 변호사 그룹, 그리고 저와 같은 시민활동가들이 힘을합해 우리 피해자들을 위해 일본국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시작했었습니다.          

이 소송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피해자들과 공동으로 일본을 제소한 국제소송이었고 15명의 원고가 피해자 전체를 대표하는 집단소송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일본정부가 소송 과정에서 일본군 성노예 제도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했고, 미국 재판부 또한 일본군의 성노예 제도는 인류 역사상 일찌기 없었던 잔학한 전쟁범죄 행위임을 인정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연방대법 상고까지 6년간 어렵게 어렵게 지속되었지만, 소송을 원천봉쇄 하려는 일본정부, 어이없게도 소송의 당사국도 아니면서 일본측을 적극 도운 미 국무부의 방어작전, 한국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등으로 제대로 재판을 받지 못하고 미국 연방법정이 심리를 끝내 거부함으로써 결국 미-일 공조의 두터운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 소송보다 1년 일찍 캘리포니아주에 제소된 우리 징용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한 징용피해 소송과 더불어 저는 ‘위안부’ 소송을 알리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각계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본격적인 인권활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문제에 제가 발벗고 나서게 된 이유는 우리가 유대인들이 나찌에 박해받은 홀로코스트는 너무도 잘 알면서도, 막상 한국인이 일제에 의해 징용, 징병, 근로정신대, 성노예 등으로 강제로 동원된 숫자가 600만을 넘어서는 엄청난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역사를 전공한 저 자신도 몰랐다는 자괴감과 분노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2005년 일본이 유엔의 최고의결기관인 안전보장이사회의에 진출하려 할 때 전 지구촌을 상대로 인터넷서명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한국의 21세기 로드맵을 세우는데 매우 중요할만한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당시 인터넷서명운동은 일본의 과거사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남, 북을 포함하는 10개국 시민기구 연합체)의 결정으로 과거사에 반성없는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진출 저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기로 결의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재미한인의 숫자나 정치적 영향력은 중국계 미국인들과 연대할 때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중국계 활동가들과 연대한 인터넷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005년 3.1절을 겨냥하여 2월 28일 중국계 활동가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계 바른역사정의연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동작전으로 전개한 인터넷서명운동은 중국 본토에 바로 대서특필되면서 애시당초 1백만명 서명의 목표치를 보름만에 훌쩍 뛰어 넘더니, 약 한 달 반 만에 전 세계 4천2백만명 서명이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서명운동의 폭발력에 국제여론이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2005년 연초에는 모든 미디어가 당시 고이즈미와 부시 대통령의 끈끈한 미일공조를 볼 때 일본이 무난히 UN안보리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당시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도 UN에 재정기여가 많은 일본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서명운동이 확대되면서 중국에서 서명받는 웹사이트가 300여개로 늘어나고, 핸드폰 문자 서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면서 상하이에서 5.4 운동 이후로 최대 인파가 모인 격한 반일시위가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치 오늘날 중국 반일시위의 복사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UN안보리 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밀어주던 미 행정부에 입장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일본 외상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국제여론이 너무 나빠서 안되겠다. 일본의 안보리 진출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라고 했다고 보도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서명운동이 촉발시킨 여론변화가 철통갔던 미-일공조를 두둔하던 미국의 입장까지 바꾸게 한 것이죠.

정작 중요한 것은 서명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입니다.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 전 지구촌의 인터넷서명운동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저에게 전화를 했다가, “이 인터넷 서명운동은 한국과 중국계가 연대해 공동으로 전개한 것이다’라고 말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일본신문에 보도되었고, 연이어 일본방송, TV 등 매체들이 로스앤젤레스의 바른역사 정의연대 저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인터넷 서명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자세하게 취재해 갔었습니다.

인터넷서명운동의 결과를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또 함께 연대했던 중국계단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전개과정과 결과에 대해 일본 언론 상대로 상세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인들은 바로 다음 날 중국계 리더를 찾아가 또 물었답니다. “그러한 전 세계 인터넷 서명운동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신들 배후 조종 세력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합쳐 큰 국가권력과, 철옹성 같은 미일공조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배후 조정 세력 없이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깨알 같은 힘을 모아 부당함을 바로 잡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 그러한 나라가, 그러한 시민들이 과연 21세기 지구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습니까.

2005년 인터넷서명운동을 통해서 저는 한 마디로 “일본은 21세기의 주역이 될만한 여력과 능력이 없구나. 우리는 일본에 정신적으로 이미 이겼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연진 바른역사 정의연대 대표/ 폴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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