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5대 대선레이스 본격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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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이회창 대세론

신한국당 경선을 승리로 마친 이회창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 1997년 8월 1일 조선일보-MBC-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5.2%, 김대중 29.1%, 김종필 10.7% 지지율 결과가 나왔다. 이회창 대세론이 형성되고 있던 때다. 당시 김대중으로 후보단일화를 해도 이회창이 이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해명한 이회창 아들의 병역의혹은 꺼지지 않고 불씨로 살아남게 된다.

 

조순 "정권교체-3김청산 위해 출마결심", 김대중 1위 탈환

조순은 8월 13일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다. 정권교체와 3김청산을 위해 대선출마에 나서게 되었다고 출마결심을 밝힌다. 한국갤럽의 긴급 여론조사에서 조순은 19.9%의 지지율을 얻어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조순 중에서 4위를 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처음으로 1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인제의 탈당, 대선출마

그런데 대선공식선거운동을 두 달여 앞둔 9월 13일 경선에서 2위를 했던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인제는 경선불복의 이유를 세대교체만이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구조를 청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경선과정 중에 생긴 앙금과 아들의 병역문제로 이회창의 지지율이 하락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선거를 눈앞에 둔 채 적전 분열하고 말았다.

9월 14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29.9%, 이인제 21.7%, 이회창 18.3%로 조사되었다. 이인제의 강세는 10월 27일 여론조사까지 이어져 근 한 달간 지속되었다. 10월 27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34.3%, 이인제 26.8%, 이회창 16.1%로 순위변동 없이 지지율이 유지되었다.

김대중의 위기, 비자금 폭로 정국

10월 7일 김대중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쳤다. 3위에 머물던 이회창은 앞서가고 있는 김대중을 향하여 날카로운 창을 던졌다. 바로 비자금 폭로 사건이었다. 당시 강삼재가 폭로한 비자금설은 대강 이렇다. “김대중 총재가 처조카 이형택을 통해 670억 원을 관리해왔다. 또한 91년 초에 노태우로부터 20억원+α를 받았다.”

 이 후보측의 집요한 공세에 김 후보는 「정책 대결」을 내세우며 정면대응을 피해나갔다. 이회창은 삼성 등 기업별 비자금 제공내역을 공개하는 등 세 차례의 ‘비자금 폭로전’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의 지지도는 오히려 더 떨어졌다. 선거를 앞두고 재벌들을 건드렸으니 무슨 돈으로 선거를 치를 것이냐는 노골적인 비난도 나왔다. 이회창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10월 16일 신한국당은 김대중을 뇌물수수 및 조세포탈, 무고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DJP연합 성사

▲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연합
▲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연합
1년여 간의 협상 끝에 1997년 10월 31일 양당이 공동 합의에 도달하였다. 합의의 골자는 김대중이 대통령선거 후보를 맡되, 집권하면 양당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그 총리는 자민련이 맡으며, 내각제개헌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1999년 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11월 4일 민자당 시절 민정계의 대표였던 박태준이 이 연대에 동참하였고, 11일에는 김대중의 국민회의 창당에 반대해 민주당에 남아 있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국민통합추진회의도 합류하였다. 이로써 야권의 연합은 더욱 큰 힘을 받게 되었다.

김대중 비자금 수사 유보 발표, YS탈당, 이회창-조순 한나라당 창당

1997년 10월 21일 검찰은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대통령선거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이회창의 대선 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빚었다. 이회창은 김영삼을 비난하며 탈당을 요구했고 11월 1일로 예정되어 있던 회동마저 거부했다. 이에 김영삼이 11월 7일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이회창은 이에 맞서 11월 21일 조순의 민주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11월 대회전 이회창, 이인제를 누르고 2위에 올라서다.

▲   이회창
▲   이회창
아들 병역문제로 수세에 있었던 이회창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회창이 구사한 주요 전략으로는 이회창의 일점전략, TK지역의 반YS바람, YS의 이인제 신당지원설 등으로 영남지역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이인제를 공격하여 2위 자리를 탈환하게 된다. 게다가 조순의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탄생시켰다.

이회창은 대역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철저히 YS이미지 지우기에 나섰다. 특히 03마스코트 사건은 유명하다. 경북포항에서 열린 신한국당 행사에서 김영삼을 상징하는 ‘03마스코트’를  두들기는 행사를 가졌다. IMF 외환위기 정국에 YS의 인기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 입문의 후광이었던 YS를 철저하게 짓밟은 이 '퍼포먼스'는 가장 비정한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로 기록됐다.

11월 17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34% 이회창 24.4% 이인제 23.7% 등을 기록했다.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인 11월 24일 이회창은 부산을 제외하고 영남지역을 석권함으로서 김대중과 양강구도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11월 24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33.1% 이회창 28.9% 이인제 20.5%로 선두 김대중을 바짝 추격하였고 이인제를 따돌렸다.

5. 선거운동기간(11월 26일~12월 17일)

선거운동 초반기(11월 26일~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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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기 쟁점은 IMF 지원협상 타결(12월 1일), 1차 TV합동토론회(12월 1일), 전방근무 현역 육군중령 이회창 후보 사퇴주장(12월 1일), 이회창, 박찬종 당무복귀 당부(12월 1일), 중앙일보의 이회창 문건 파문 등이 발생하여 선거쟁점으로 부각되었다.

15대 대선은 선거캠페인에서 본격적인 미디어 선거가 시작된 선거이다. 대선 후보 중에서 TV토론의 효과를 톡톡히 본 후보는 김대중과 이인제이다. 김대중은 TV토론을 적절히 활용해 가면서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고 약점을 상쇄해갔다. 김대중은 14일 TV합동토론회에 나와 2백억 원 제공설에 대해 "나도 모르는 새에 당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며 "이인제 후보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그러면서 칼끝을 이회창 후보에게 돌렸다. 경제위기에 대한 이회창 후보의 공동책임론이었다. 김 후보는 선거막판까지 공동책임론을 쟁점화 시켰고 이회창 후보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선거운동 중반기(12월 3일~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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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기 쟁점은 정부, IMF 긴급자금지원 합의서명(12월 3일), 3당 후보, IMF 이행각서 수용(12월 3일), 이인제 후보, 이회창 차남 키재기 요구(12월 4일), 고려증권 부도(12월 5일), 안기부 오익제씨 편지공개(12월 5일), 한나라당 이인제 입영기피 기록공개(12월 6일), 파계승탈이 삽입된 한나라당 법정홍보물 불교계 자극(12월 6일), 제2차 TV합동토론회 실시(12월 7일), 한나라당 조순총재 송월주 총무원장에게 파계승탈 사과(12월 7일), 한나라당 이회창 차남 키(165) 공증확인서 제시(12월 8일), 박찬종 한나라당 고문 국민신당 입당(12월 8일) 등이 발생하였다. IMF, 북풍, 병역의혹 등 경제위기속에서 네거티브 선거가 극도에 달했다.

선거운동 종반기

종반기 쟁점은 4자회담 본회담 제네바에서 개최(12월 9일), 박인상 한국노총 김대중 지지선언(12월 9일), 병무청직원 이회창 장남 고의 감량 주장(12월 10일), 이회창 차남 공식적으로 키(164.5)잼(12월 10일), 김대중 건강진단서 공방(12월 10일), IMF재협상 논의에 국제금융계 한국지원 난색표명(12월 10일), 부재자투표 시작(12월 11일), 이회창, 김대중의 IMF재협상론 철회요구(12월 11일), 박 전대통령의 큰딸 박근혜 한나라당 입당(12월 11일), 사채업자, 한나라당의 사채 5백억 조달 시도 폭로(12월 12일), 김대통령-3당 후보 청와대 회동(12월 12일), 재미교포 목사, 북한인사들의 김대중 대선승리 기원편지 공개(12월 14일), 제3차 TV합동토론회 실시-사회문화편(12월 14일), 국민신당, 중앙일보사장 검찰에 고발(12월 15일), 국민신당, 조선일보 보도와 관련해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시위(12월 17일), 선거운동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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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캠페인을 통해 본 선거전략

김대중, 지역구도와 급진 이미지를 극복하는 전략구사

대선 4수 끝에 승리를 한 김대중의 선거승리전략은 단연 DJP이다. 이른바 서부벨트라 불리기도 하고 영남포위전략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대중은 서부벨트인 서울․인천․경기․충청․호남에서 9,168,827표(51.1%)를 얻어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반면 이회창은 강원․영남에서만 4,572,763표(56.4%)를 얻어 추격에 실패했다.

김대중은 김종필과 선거연합에 성공함으로써 두 가지 득표효과를 가져왔다. 김대중은 호남에 갇히는 바람에 지난 대선에서 실패했다. 또한 과거 독재정권이 덧씌운 ‘과격’, ‘용공’의 이미지가 중도층과 보수층에 거부감으로 있었다. 이를 단번에 극복한 것이 바로 DJP연합이었다.

김종필은 충청권을 대표하는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정치인이기 때문에 김대중의 약점을 모두 커버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충청권 지지획득과 더불어  ‘과격’, ‘용공’의 이미지를 상쇄시켰다.

여기에 산업화의 상징인 박태준 포항제철 명예회장과도 연대에 성공함으로써 김대중의 이미지는 확실하게 중도층과 보수층에 안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으로서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

▲   김대중-이회창 득표현황 
▲   김대중-이회창 득표현황 

이회창의 일점전략

선거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10월 27일 조선일보-MBC-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은 이인제에게 조차 10%이상 밀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회창은 당시 신한국당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영남에서조차 이인제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대선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때 이회창 캠프에서 구사한 전략이 일점전략이다. 우선 흔들리는 핵심지지기반을 다지고 재도약을 위해서 영남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일점전략의 효과는 분명히 드러났다. TK(대구경북)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회창은 2위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이회창의 바람은 TK에서 시작하여 수도권과 부산경남으로 강하게 번져갔다.

11월 17일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은 이인제를 따돌리고 2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재도약의 성공요인으로 TK와 수도권에서 불기 시작한 이회창의 바람으로 파악했다.

이인제, ‘박정희 이미지’,  ‘세대교체론’

경선불복이라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이인제의 지지도는 10월에 맹위를 떨친다. 이인제는 여권의 핵심지지기반인 영남과 강원에서 이회창을 확실히 따돌리게 된다.

특히 이인제가 추구한 ‘박정희’이미지는 TK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영남보수진영의 근거지인 TK에서 승기를 잡은 이인제의 바람은 여권의 지지기반인 부산경남과 강원으로 퍼져갔다.

이인제 돌풍의 다른 요인인 세대교체론은 김대중과 이회창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유권자의 마음을 잡는 데 효과를 나타냈다. 이인제는 10월 여론조사에서 전 연령층에서 2위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홍보전략

홍보전략은 유권자의 후보에 대한 이미지 조사를 토대로 강점은 부각하고 약점을 최소화하거나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   각 후보들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 (정상대 ‘한국대통령선거와 커뮤니케이션 中 )
▲   각 후보들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 (정상대 ‘한국대통령선거와 커뮤니케이션 中 )

 

▲   후보들의 선전 포스터
▲   후보들의 선전 포스터
이회창은 자신의 강점인 청렴과 도덕성을 무기로 ‘3김정치’의 대표주자인 김대중과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전략은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전인 8월까지는 성공적이었다. 8월1일 갤럽여론조사에서 이회창(35.2%)은 김대중(29.1%)을 6%이상의 격차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병역문제가 터지고 나서부터 이회창의 장점인 청렴과 도덕성은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지지율은 추락했다.

▲  후보들의 신문광고
▲ 후보들의 신문광고

김대중은 선거 초반 이회창의 아들 병역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승기를 잡은 뒤에는 경험이 많고 똑똑하다는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홍보전략을 구사하였다.
  
김대중의 ‘준비된 대통령’은 IMF라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유권자에게 설득력 있게 어필했다. ‘준비된 대통령’의 이미지는 고령과 여러 차례 낙선이라는 김대중의 약점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꾸게 한다.

▲  파계승을 빗댄 이회창의 홍보물
▲  파계승을 빗댄 이회창의 홍보물
이회창은 소형인쇄물에서 ‘파계승’을 빗대어 3김정치를 비판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오히려 불교계를 자극하고 사람들은 반발하게 되었다.

15대 대선은 무엇보다도 TV광고와 토론 등 본격적인 미디어 선거의 시작이 특징이다. 그리고 미디어 선거의 가장 큰 수혜자는 김대중이다.

이회창은 7월 28일 방송협회와 신문협회가 공동주최하고 방송3사가 생중계한 토론회에서 아들 병역의혹에 대한 질문자들의 추궁에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런 답변은 국민들의 정서와 거리가 멀었다. 잘못을 빌어도 시원찮을 텐데 문제없다고 답한데 대해서 국민들은 이회창에게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TV토론이 병역의혹에 불을 붙인 셈이 된 것이다.

▲  TV 합동토론회
▲ TV 합동토론회

김대중은 TV토론을 통해서 ‘비자금공세’, ‘건강문제’, ‘IMF재협상론’ 등 여권의 대대적 공세를 적극적 해명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김윤재 변호사 : TV토론 시 한 후보가 정견을 발표할 때 다른 후보를 카메라로 잡지 않기로 사전에 합의. 그때 DJ는 코도 풀고 기침도 하고 물도 먹고 다했다.)

▲   김대중의 TV광고
▲   김대중의 TV광고

▲  이회창의 TV광고
▲ 이회창의 TV광고

 <여론조사>

15대 대선은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라 선거 판세가 요동쳤다. 13대 대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론조사는 15대 대선에서 그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후보캠프의 전략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신한국당 경선에서 떨어진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온 여론조사 인기도를 명분으로 경선불복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해 대선출마를 하였다.

한나라당 창당

여론조사에서 조순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당선가능성에서 멀어지자 조순은 전격적으로 이회창과 손을 잡으면서 신한국당과 합당하게 된다.

<당대 선거전략가 이해찬이 말하는 승리전략>

민주개혁세력의 독자적인 역량만으론 승리 어려워...15 대선 승리는 '업어치기
이해찬은 민주개혁세력의 독자적인 역량만 갖고는 우리의 여러 가지 정치사회구조가 못 이기게 돼있다고 분석한다. 그 원인으로 지역주의, 거대언론, 기득권세력의 저항 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선거를 이긴다는 건 진짜 업어치기로 이긴 거라고 한다. 이른바 유도로 말하면 “그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를 업어치기로 이기는 방식”인 거다. 15대 대선 승리의 의미를 ‘업어치기론’을 통해 풀이했다.  (폴리뉴스와 인터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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