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613 지방선거 압승

613 지방선거는 16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민심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선거로 인식되었다.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부정부패 심판론으로,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의 호화빌라, 병역 비리 등 이회창 후보의 “5대 의혹을 전면에 내세우고 분투를 하였다. 그러나 월드컵 탓인지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방선거는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지만 한나라당이 16개 광역시도 단체장 중 11곳에서 승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광역단체장 선거결과>
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4강 진출로 모든 국민이 축제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고 월드컵 폐막을 앞둔 630일 서해상에서 남북한 해군의 교전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교전사태로 인하여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햇볕정책으로 심각한 사회갈등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햇볕정책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민주당은 햇볕정책으로 남북충돌이 줄었으며 금강산 관광과 교류는 계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맞섰다. 이회창 후보는 대선후보 초청 개별 TV토론회에서 서해교전에 대하여 이는 퍼주기식의 햇볕정책이 그 원인이며 상호주의를 원칙으로 대북정책의 재수립을 강조하였고,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햇볕정책 유지를 주장하였다.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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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의 정치권은 병역공방의 달이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후보의 대선가도에 발목을 잡았던 두 아들의 병역문제가 김대업이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521)에서 이회창 후보의 아들 이정연의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 내용을 폭로 형식으로 공개함으로써 또다시 정치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는 사실 여부에 따라 이회창 후보의 도덕성과 후보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검찰은 한나라당과 김대업 간의 맞고소고발 사건수사를 위해 이정연의 병역 면제 판정을 내린 춘천병원 전 진료부장을 소환 조사하였고, 이와 더불어 김대업도 녹취 테이프 4개를 제출하여 검찰의 정밀 감정이 시작되었다. 양쪽의 팽팽한 대치 상태에서 병역비리 수사 당시 검찰관이 이정연이 돈을 주고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증언을 국회에서 함으로써 병풍이 더욱 확장되었다. 결국 검찰수사에서는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못하였으나, 이는 이회창 후보의 대쪽이미지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정몽준 의원 대선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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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와 한국팀의 4강진출, 그리고 전국민의 거리응원전은 정치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정몽준 의원은 월드컵의 열기를 등에 업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양당 구도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개혁적인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다. 이에 정몽준 의원은 917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정몽준 의원의 출마는 이회창-노무현 양자대결에서 이회창-노무현-정몽준의 삼자대결로 대선구도를 바꾸는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대선구도에 정몽준 후보가 참여한 것은 대체적으로 노무현 후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정몽준 후보 지지율 상승은 노무현 후보 지지율의 하락을 불러왔는데 이는 지지층의 중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민주당의원 집단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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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방선거 패배 이후 민주당 내에서 대두된 책임론과 후보교체론은 일단락되었지만, 88 보궐 선거 패배로 다시 후보교체론이 대두되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정몽준 후보의 대선출마와 동시에 급격하게 추락하여 2위 자리마저 정몽준 후보에게 내주었다. 이에 반노-비노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정몽준 캠프로 합류하게 되었다. 특히 613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고 개혁적 이미지를 갖춘 김민석 전의원의 탈당과 정몽준캠프 합류는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김민석 전의원의 탈당과 정몽준캠프 합류를 기점으로 후보교체론이 노무현 후보 지지자에게 이유없는 노무현 흔들기로 비추어지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의 충성도가 더욱 강해지며 제2의 노풍을 위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사모 회원들도 급격하게 늘었으며 후원금도 김민석 전의원 탈당 이후 4일 동안 5억원을 넘기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등 제2의 노풍의 촉매제가 되었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
 
분야별 후보공약 제기 중 충청권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들 수 있다. 노무현 후보가 충청권 표심을 위해 제기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하여 102일 개별 토론회에서 이회창 후보는 40조원의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며 현실성이 없는 안이라며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은 충청권을 첨단 지식, 기술 산업 중심의 미래를 선도하는 기반도시로 육성한다는 과학기술 수도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5조원이면 충분하다며 행정수도 이전을 현실성이 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정몽준 후보는 이에 대하여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하며 대신 대기업 본사의 지방 이전을 제안하였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도 실질적 지방분권이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며 행정수도 이전에는 회의적이라고 반박하였다.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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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의 정치권과 국민은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113일 노무현 후보가 국민경선 방식으로의 후보 단일화를 정몽준 후보에게 제의하였고, 이에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였다. 협상에서 최대의 관건은 후보선택 방식이었으며, 민주당은 국민경선 방식을 국민통합21여론조사 방식을 놓고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에 1110일 노무현 후보가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전격 수용함으로써 협상은 급물결을 탔다. 당시 두 후보가 단일화에 공감하게 된 이유는지지 계층의 중첩으로 인하여 표의 분산이 생긴다는 점, 이회창노무현정몽준의 3자구도에서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과 단일화에 성공했을 경우 단일화 후보가 젊은층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결집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작용되었다. 당시 누가 우세인지 점치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두 후보는 박빙이었다. 결국 1124일 여론조사의 결과 마침내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되며, 정몽준 의원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종래의 구태정치와 다른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한나라당은 박근혜 의원을 복당시키고 단일화를 야합이라고 비난하면서 단일화 효과를 반감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노풍의 정점 이후 급속하게 떨어진 지지율을 단일화라는 승부수를 통하여 다시 최정점으로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법정 선거운동기간 (112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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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초반기
(1127~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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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부터 법정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면서 각 후보들은 초반 선거의 기선을 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본격적인 후보의 공약 제시와 부동층 공략에 총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선거초반 한나라당은 부정정권을 심판해야한다는 부패정권 심판론을, 민주당은 세대교체, 정치교체를 해야한다는 새정치론을 대선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왔다. 선거초반 한나라당은 네거티브 선거 전략을 채택하여 1128일 국정원 도청 의혹을 제기하였다. 한편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확산되면서 SOFA 개정과 부시 미 대통령 사과 요구 등 반미 기류가 정치권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국정원 도청 의혹은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이 9월에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 대한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폭로하는 등 잇따른 국정원 도청 의혹 제기의 연장선에서 1128일 재제기하여 이슈화에 성공했다. 정형근 의원의 국정원 도청 의혹 제기 이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국정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정형근 의원에게는 문건 입수 경위를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검찰이 수사를 하면서 사건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팽팽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121일 민주당 이인제 의원은 이번 불법 도청을 지켜보면서 여론 조작을 일삼는 부패한 패권 추구 세력의 국정농단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동아일보 2002.11.28)며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네거티브 선거전략은 여론의 뒷받침이 없는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말았다. (이현우, 2002,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이슈와 후보자 전략한국정치학회 춘계학술회의 발표논문) 이러한 이회창 후보의 네거티브 전략 속에서 1231TV토론회의 결과 권영길 민노당 후보가 최대 수혜자였으며(지지율 1.4% 상승), 이회창 후보의 경우 국정원 도청 의혹제기와 TV토론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약간 받았다(지지율 2.7% 하락). 노무현 후보의 경우는 TV토론에서 약간의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지만, 일관되게 동등한 대미관계를 주장해 온 것이 반미기류에 편승하게 됨으로써 긍정적 영향을 약간 얻게 되어 지지율 하락이 적었다(지지율 0.3% 하락).
 
선거운동 중반기 (121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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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중반이 지나면서 국내외의 많은 사건이 있었다. 살펴보면, 12102TV합동토론회, 1212일 북한의 핵시설 즉각 재가동발표 및 제네바 합의 파기, 1214일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시위 전국 개최, 12163TV합동토론회 등이 있었다.
 
경제과학 분야를 주제로 한 2TV합동토론회를 통한 후보들의 지지율 변화는 미비하였으며, TV토론 긍정평가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보다 1.8% 앞섰다. 권영길 후보도 가장 TV토론을 잘했다고 평가받으면서 새로운 표심이 유입되는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2TV토론은 전체적으로 노무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에 큰 영향은 주지 못하였다.
 
1212일 북한은 미국 등이 중유 공급을 중단한 데 대한 맞대응 조치로 핵발전소의 동결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핵개발 재개 선언은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회창 후보는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현금지원을 전면 중단해야 된다는 입장인데 반해, 노무현 후보는 이에 반대하면서 포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대북 정책과 맞물려 여론의 향방에 따라 근소한 두 호보의 막판 지지율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었다. 북핵위기는 결국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미군 장갑차에 사망했던 신효순, 심미선양의 사건 이후 관련 미군 2명이 무죄로 선고받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국민들은 분노하고, 1130일 첫 광화문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1214일에는 전국적으로 30여만의 시민들이 SOFA 개정, 부시 미 대통령의 사과, 무죄평결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러한 반미 기류는 노무현 후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선거운동 종반기 (1218) 정몽준 지지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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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이후 1213일부터 노무현 후보 지원에 나섰던 정몽준 대표가 선거 전날 선거운동 마감시간 1시간 30분전(투표시간 개시 7시간 30분전) 명동유세를 핑계로 지지철회를 선언하였다. 철회 이유는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썼다며 정몽준 대표는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며,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정몽준 대표는 그동안 노무현 후보의 대북 정책에 회의를 가져왔는데 오늘 유세에서 그같은 회의가 현실화 됐기 때문에 지지철회를 공식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20021219) 그러나 발표와는 달리 유세 과정에서 차기 대권후보와 관련된 노무현 후보의 발언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였다. 이는 정몽준 대표의 지지층 분산으로 선거 패배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노무현 후보의지지 결집과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 캠페인을 통해 본 선거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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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국민참여경선에 의해 선출확정되면서 각 정당은 대통령후보자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도 제16대 대통령선거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언론매체, 인터넷 등 미디어 중심의 선거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미디어 선거운동은 유권자에게 친숙한 신문, 방송 등을 통해 후보자를 안방에서 비교평가하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인터넷 등 쌍방향 매체에 익숙한 젊은 유권자에게는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유도하여 기존 정치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실제로 후보자 합동방송토론회, 방송광고, 방송연설 등 언론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은 선거운동의 초반부터 유권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등 미디어선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돈 안 드는 선거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TV인터넷 등 온오프라인 미디어가 유권자에게 파고드는 효과와 위력은 과거 선거시 대규모로 청중을 동원하는 선거운동방식을 탈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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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미디어 이용량을 하루 평균으로 볼 때 신문은 평균 40.5, TV167.7, 인터넷은 74.9, 라디오는 59.9분 동안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신문, 인터넷, 라디오 세 매체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이용하고, 여성은 TV를 남성보다 더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나이가 많을수록 TV의 이용량이 많았으며, 반대로 낮을수록 인터넷의 이용량이 현저하게 많아 세대간의 매체 이용에 차별성이 드러냈다. 학력별로도 고학력일수록 신문, 인터넷을 많이 이용했으며, 저학력일수록 TV 이용에 많이 의존하는 특성도 발견되었다. 정치성향별로 볼 때 신문, TV, 라디오의 이용에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터넷의 경우 보수라고 응답한 유권자가 상대적으로 덜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언론재단, 2003, “16대 대선 미디어 영향력 변화와 매체별 발전전략”)
 
                                                           노무현 후보의 정치광고

노무현

이회창
새로운 정치인
낡은 정치인
젊은 정치인
노쇠한 정치인
국민화합의 대표자
국민분열의 대표자

 

노무현 후보는 자신에 대해서는 참신한 후보로,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는 낡은 후보로 취급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는 자신이 새롭고 젊은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화합을 이루어내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고, 반면 이회창 후보는 기성 정치인으로서 낡고 노쇠하며, 지역주의를 조장하여 국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노무현 후보의 기본적인 광고전략은 유권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포지티브 광고를 선택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네거티브로 접근하는 이회창 후보에 상대하지 않겠다고 내세우면서, 노무현 후보를 희망의 미래를 만드는 사람’, 이회창 후보를 낡은 정치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다소 늦은 홍보 전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는 과격한 노무현의 이미지에서 서민적이고 친근한 대통령이라는 전략으로 광고전략을 하였으며, 주 타겟은 부산과 경남지역의 30대와 40대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홍보전략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상대적으로 노년층과 영남지역에서 열세를 보였다.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는 방송토론을 통한 거침없는 직설화법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으며, 이회창 후보와 마찬가지로 방송광고와 신문광고에서 차별적인 홍보를 하였다. 방송광고의 노무현 후보는 눈물을 주제로 한 감성적 광고홍보와 신문광고를 통해 한나라당의 부정부패척결을 내세운 전술에 대응하는 광고를 진행하였다. 전반적인 노무현 후보의 홍보전략은 서민층에 다가가는 친근한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 전략을 중심으로 홍보하였다.
 
                                                      이회창 후보의 정치광고

이회창

노무현
깨끗한 정권의 창출자
부패정권의 계승자
안정적인 후보
불안한 후보
능력있는 후보
무능력한 후보

 

이회창 후보는 자신에 대해서 능력있는 후보로, 노무현 후보에 대해서는 무능력한 후보로 취급하였다. 이회창 후보는 자신이 깨끗한 정권을 창출할 수 있고, 안정을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있는 후보라고 표현하고 있고, 반면 노무현 후보는 부패한 정권을 계승하려하고, 안정을 이루어낼 수 없는 무능력자로 표현하였다. , 기본적인 광고 전략은 안정적인 구세력에 대한 호소와 부패정권 교체라는 설정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급진세력또는 ‘DJ 계승자로 비유하면서 부패정권 교체를 외치는 네거티브한 광고를 선택하였다.
 
이회창 후보의 주요 홍보대상은 20대와 30대의 수도권 거주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30대 가장에 대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내집 마련, 자녀교육,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등을 기초로 이회창 후보는 10대 개혁과제를 내용으로 하는 홍보 전략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귀족적 이미지는 광고 전략을 진행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주었으며 미디어를 통한 귀족과 서민의 대결이라는 수식어를 탈피하기 위해 서민과 친근한 모습을 강조한 부드러운 이미지 마케팅을 하였다. 이회창 후보의 홍보 마케팅은 신문광고와 미디어광고에서 차별성을 두었으며, 신문광고를 통해서 이성적 판단이 뚜렷한 이회창 후보를 방송광고에서 부드러운 이미지의 이회창 후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홍보 타깃에 대한 분석 (이선지, 2004,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