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다큐를 정말 사랑한 이성규 감독 유작 <시바, 인생을 던져>

고 이성규 감독. ©이성규 감독 페이스북
▲ 고 이성규 감독. ©이성규 감독 페이스북
지난 13일 별세한 ‘독립PD 1세대’ 고 이성규(50) 감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2년 전 여름이었다. 이 감독은 당시 안동에서 ‘종가’를 주제로 추석에 방송되는 KBS 2부작 외주다큐를 촬영 중이었다. 제작 현실에 문외한이었던 기자가 독립PD의 현실에 대해 묻자, 이 감독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라며 웃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제작 현실은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2~3명이 구상, 촬영, 편집까지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 강도’는 셌다. 카메라, 스테디캠, 트라이포트, 노트북, 휴대용 크레인 등 각종 장비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이 감독의 SUV 차량이 종횡무진 하는 그의 고단한 일상을 대변했다. 

이 감독은 “독립PD들은 히말라야 가서 발가락이 잘리고 촬영하다 죽은 적도 부지기수다. 나도 촬영하다가 이가 모두 다 나갔다. 다만, 보도가 안 될 뿐”이라고 독립PD의 삶을 요약했다. <오래된 인력거>, <천상고원 무스탕> 등 그를 알려지게 한 작품의 이면에는 독립PD로서 녹록치 않은 풍파를 견뎌온 삶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감독이 견디고 맞섰던 현실의 ‘본질’은 물리적 환경 너머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기자가 방문한 이날 ‘독립PD 1세대’이자 영화 ‘워낭소리’의 이충렬 감독이 뇌종양에 걸렸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 감독의 투병 소식은 독립PD들에게 암담한 소식이었다. 워낭소리 감독의 실패는 워낭소리의 흥행을 보며 꿈을 키웠던 많은 독립PD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불안정 노동’으로부터의 탈주에 제동을 걸었다.

이 불안의 ‘본질’은 ‘을(乙)’을 쥐어짜는 불합리한 착취 구조에 있었다. 지상파에 납품하는 외주제작사와 주로 계약을 맺는 독립PD들은 ‘제작비 쥐어짜기’ 현실 속에 놓여 있었다. 이 감독은 이 착취 구조를 “돈 만원 주면서, ‘치킨-맥주-오징어땅콩까지 다 사와’라는 식”이라고 촌평했다.

초대 독립PD협회장을 맡았던 이 감독은 누구보다도 이 같은 현실에 저항했다. 기자와 만난 당시에도 이충렬 감독의 투병 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 착취 구조에 열변을 토했던 이 감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해 지난 5일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얼마 전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기 위해 방송국 송신탑 위에라도 올라갈까’라고 후배들에게 말했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이 PD는 마지막 순간까지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이 감독이 거침없는 과격한 PD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이 감독은 자신을 “벽에 붙은 파리”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밥 좀 먹으세요’라고 우리한테 얘기하면 저희는 ‘없는 존재입니다. 투명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의 존재감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그래야 촬영 대상자들이 마음을 열고 카메라 앞에서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깨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촬영 대상의 꾸미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작위적인 촬영은 배제됐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허영, 권위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낮은 곳으로 임하라”라고 거듭 자신에게 되뇌인다고 했다. 캘커다 인력거꾼 샬림의 ‘진정성’을 그대로 담기 위해 꼬박 10년간 그들과 함께 보낸 이 감독의 ‘진정성’은 <오래된 인력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의 목표는 한국 다큐가 세계적인 콘텐츠로 자리잡는 것이다. 그것의 주춧돌이 되고 싶다.” 2년 전 그와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 취재수첩에는 그의 꿈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누구보다도 다큐를 사랑했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자신 몫의 ‘1인분’ 이상을 해냈다.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남았다. 이 불합리한 착취 구조를 바꾸고 제대로 된 제작·상영 환경을 만드는 일이 남았다. 

지난 2009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워낭소리’를 공개 관람했다. 하지만 이 ‘깜짝 이벤트’ 이후에 독립영화, 다큐를 위한 대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난 11일 이 감독은 시사회에서 “한국 관객들이 외국 예술영화만 사랑하지 말고 한국의 독립예술영화도 사랑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천하에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도 관객 2~3만이 언제 드는지 걱정한다”며 “저예산 예술독립영화들의 르네상스가 오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

오는 19일 이 감독의 유작 <시바, 인생을 던져>가 개봉한다. 한국 남녀 네 사람의 인도방랑기를 담은 극영화로, 영화 제목의 ‘시바’는 시바신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의 ‘옴나마 시바야’에서 따왔다. ‘시바’는 힌두교의 창조와 파괴의 신을 뜻한다. 대선 1주년인 이날 작년에 대선을 준비했던 세 후보(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이 영화를 보는 상상을 해본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있는 박 대통령, ‘이명박 정권 교체’를 외쳤던 문 의원, 대한민국의 구조 개혁을 약속한 안 의원에게 비정상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독립영화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대해 본다. 다큐를 정말 사랑한 한 감독의 열정이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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