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불법사찰-대선개입-간첩조작...‘정부발표=진실’ 패러다임 흔들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15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15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부가 경기도 파주 등지에서 발견된 3대의 무인항공기가 ‘북한제’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이를 확정할 명확한 물증 제시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국방부 중앙합동조사단이 지난 11일 ‘북한제’로 발표하면서 무인기들에 있는 촬영사진 분석이나 부품 추적 등을 통해 ‘북한제’라는 구체적인 물증 확보에 실패하고 무인기 도색이 지난 2012년 김일성 생일 사열식과 2013년 김정은의 군부대 현장 방문 때 나온 무인기와 유사하다는 등의 정황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 논란의 배경이 됐다.

이러한 정부의 부실한 결론은 국민들의 의구심을 야기했고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팟캐스트에 출연해 정부발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일보> 등 언론에 보도된 정보를 토대로 무인기들이 ‘북한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정부를 견제하는 국민의 대표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 의원의 ‘합리적 의심’에 대해 정부나 새누리당이 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증을 해 사실규명에 박차를 가하기보다는 이를 두고 ‘북한을 옹호하는 것’이란 이른바 ‘종북 공세’의 빌미로 사용하면서 논란이 증폭된 것이다. 무인기에 대한 사실규명 문제를 ‘이념적 진영 대립의 장’으로 만들면서 ‘누구 편이냐’는 막장 싸움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무인기 사건으로 영공방어망에 ‘허점’을 드러낸 데다 오락가락한 행보로 여론의 비판과 박근혜 대통령의 질책까지 받던 정부와 집권여당은 정 의원의 ‘합리적 의심’이 있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반겼다. 자신이 처한 곤궁한 상황 탈출에 정 의원의 ‘합리적 의심’은 반갑기가 그지없는 듯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청래 의원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하는 건 다 조작”이냐면서 “너의 조국(북한)으로 가라”는 막말을 사용했고 위기에 몰렸던 국방부는 지난 14일 “누가 봐도 북한 소행임이 거의 확실한데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대한민국을 중상 비방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정 의원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와 집권여당의 행동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최상의 신뢰척도인 ‘국가와 정부의 발표’에 대한 ‘신뢰 추락’을 야기하는 쪽으로 간 것이다. 한 국가공동체가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선 ‘정부의 발표’가 갖는 신뢰의 무게가 가장 중요한데 이 기준을 정부와 집권여당 스스로가 허물어뜨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사건-사안에 대한 객관적 실체의 정확성을 가리는 최종적 권위는 결국 ‘정부’에 있다. 국민들이 이러한 검찰이나 법원 등 국가기관과 정부 발표를 믿고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현대국가의 근본시스템이다. 그래서 정부가 집권세력의 정치적 당파 이익에 복무해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은폐할 경우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MB-박근혜정부 검찰 등에 대한 정치수단화, ‘합리적 의심’ 키우는 자양분 돼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사회의 틀을 유지케 하는 근본인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도’는 갈수록 하락하면서 최근에 들어서는 그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 추세를 가면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정부가 직접 정보를 조작하고 왜곡해 발표하는 ‘독재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정부의 신뢰도가 하락할 경우 나타나는 지표가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의 확산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다. 지난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합리적 의심’은 중요한 정치사회적 사건과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터져 나왔다. ‘4대강 사업’ 논란,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이명박 대통령 관여여부, 선관위의 디도스 공격사건의 실체 문제 등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정부 발표’보다는 ‘합리적 의심’에다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지금 정부와 집권세력은 비판적인 세력에게 “왜 정부발표를 믿지 못하느냐”고 조급하게 윽박지르는 형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정부 발표=진실’이란 패러다임은 1987년 이후 독재를 청산하면서 조금 조금씩 쌓아올린 것이다. 일본 유학생이면 언제든 간첩으로 만들고, 정부의 거짓된 필체 감정을 통해 한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것이 횡행하던 시절 국민은 ‘정부 발표’를 안 믿었다. 지금은 이른바 ‘유언비어’에 더 솔깃했던 시절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5년과 박근혜정부 1년 동안 ‘정부 발표=진실’이란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며 약화시켜 왔다. 그러면서도 ‘정부 발표’를 안 믿는 세력을 ‘종북’으로 몰고 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실체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종북’으로 기정사실화했다.

‘무인기’ 또한 북한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면 ‘종북’으로 만드는 기형적인 사회로 몰아넣고 있다. 야당은 애매한 중도정치에 매달리면서 집권세력의 이러한 정치적 행동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못하면서 가속화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18대 대선개입 사건을 문제 삼으면 ‘대선불복’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면서 실체를 규명하자고 하면 검찰수사, 법원의 판단이 나와야 한다고 뒷전으로 내뺀다. 지난 대선 당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박근혜 후보 캠프로 흘러들어갔다는 사건은 검찰이 무혐의 처리했다. 그러나 ‘검찰 즉 정부 발표’에도 대화록이 박 캠프로 흘러갔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윗선’은 없다는 검찰 발표를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공문서 위조에 대한 중국정부의 항의가 없었다면 지금 밝혀진 사실들도 없었던 것이 되고 국정원과 검찰이 밝힌 ‘위조된 진실’로 은폐됐을 것을 생각하면 참담하기조차 하다.

무인기 ‘합리적 의심’과 관련해 정부와 집권세력은 ‘정부 발표=진실’이라며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을 모독하지 말라고 정청래 의원을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가 ‘위안부’와 ‘난징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발표만 믿으라고 하는 말에 다름없다.

‘정부 발표’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은 ‘정부’ 자신이다. 안 믿는다고 국민들에게 ‘역정’을 낼 사안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은 정부 자신이 자신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데 있다.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각종 ‘정부 발표’를 활용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 실체규명이란 검찰, 감사원 등 정부의 공공적 업무수행 영역은 진영정치의 수단이 아님에도 정치수단화한 결과이다. 이것이 ‘합리적 의심’이 갖는 영향력을 계속 키워나가게 하는 자양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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