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는 하락하고 경기는 부진…꺼지지 않는 ‘디플레’ 우려

앙골라에서 원유 생산에 성공한 파즈플로 FPSO (사진 = 대우조선해양 제공)
▲ 앙골라에서 원유 생산에 성공한 파즈플로 FPSO (사진 = 대우조선해양 제공)
최근 국제 유가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전세계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세계 경제에 몰아칠 디플레이션(deflation) 공포 때문이다. 70~80년대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오일쇼크(Oil-shock)'의 반대 방향이다. 당시에는 유가폭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가 전세계를 엄습했지만, 지금은 유가하락이 가져올 디플레이션 효과에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이미 국제유가 하락으로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와 베네수엘라가 심각한 경제 불안 속에 디폴트(default ; 대외지급불능) 위기에 내몰리고 있고, 생산비가 높은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업체들은 파산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 같은 유가 하락이 장기화되면 산유국들은 물론 원유 수입국인 신흥 경제국들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지적이다. 세계시장에서 수입수요가 줄어 신흥국들의 공산품 수요가 크게 감소하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폴리피플 2월호>에서는 이 같은 국제 원유가격 하락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해 긴급 진단해 본다.

 

국제유가가 심연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6월 13일 배럴당 106.91달러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6개월만에 50달러대로 주저 앉더니 해가 바뀌자 그것도 모자라 바닥을 뚫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1월 26일(현지시간) 현재 전 거래일보다 44센트(1.0%) 하락한 배럴당 45.15달러를 기록했다. 같은 날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도 3월 인도분 북해산 브렌트유가 49센트(1.0%) 내린 배럴당 48.30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일부에서는 배럴당 30달러선까지 떨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20달러대로 폭락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국제유가의 하락은 세계경제는 물론 국내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차원에서 유가 하락은 가격 경쟁력이 없는 석유∙가스업체들을 서서히 파산시키고 산유국인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물론 중동의 산유국들까지 심각한 재정난에 빠뜨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가하락이 세계경제 부흥에 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세계은행은 최근 유가 하락이 세계경제의 중요한 두 축인 유로존과 일본의 경제 회복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들 지역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경제의 60~70%의 비중을 차지하는 소비가 크게 위축돼 있지만 유가하락이 이를 반전시키기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공급 측면의 유가 하락이 수요 측면의 디플레 압력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란 설명이다.

산업생산 ‘불황’ 징후에 저유가로 물가하락 겹쳐

원유 수입국인 신흥경제국가들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시각이 엇갈린다. 한 쪽에서는 유가하락에 따른 전세계 수입수요의 감소로 경제성장율이 정체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 걱정하는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유가하락으로 생산비가 절감돼 한국과 같은 신흥경제국의 경기회복에 도움을 줄 것이란 시각이다.

국내에서는 정부의 낙관적 입장과는 달리 내수 상승 모멘텀이 둔화되는 가운데 지속적인 국제유가 하락으로 저물가가 고착화 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저유가가 물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강하게 작용하면서 일부에서는 올해 물가상승률이 0%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추가적인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산업생산은 전월보다 0.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전달인 10월의 0.3%보다도 증가세가 둔화됐으며, 지난해 같은 달보다는 오히려 0.5% 감소했다. 개선 흐름이 미약한데다 개선의 강도도 약해진 것이다.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3개월 만에 증가세로 돌아서고 설비투자는 두자릿수 증가했지만 서비스업(-0.3%), 건설기성(-1.7%), 건설수주(-26.1%) 등은 감소했다. 특히 경기동행지수는 99.8로 기준치인 100을 밑돌아 현 경기상황이 불황 국면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114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이는 수출이 늘어서가 아니라 국제유가 하락과 내수 부진에 따른 이른바 ‘불황형 흑자’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유가가 최근 배럴당 5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서 물가 하락 압력이 커지자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미 지난 12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0.8%로 0%대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도 일본의 경우처럼 불황형 흑자를 기록하다 디플레이션 등 장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내수 부진에 따른 저물가 추세가 저유가 기조와 맞물리면서 실제로 글로벌 주요 투자은행은 물론 국내 금융사들은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 내놓은 소비자물가 상승률 2.4%를 훨씬 밑도는 전망치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삼성증권은 소비자물가 전망치를 0.9%까지 낮췄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이 조만간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저유가가 긍정적 효과를 나타낼 때까지 저물가의 고착화를 방어하기 위해 한은이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집행할 수 있다는 분석인 것이다.

이승훈 삼성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연초 경제전망 업데이트 보고서에서 "인플레이션 타겟팅을 채택하고 있는 한은이 1분기 중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노무라증권도 지난달 2일 한은이 기준금리를 오는 4월까지 1.50%로 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국제금융센터도 해외 IB들의 전망을 인용, 올해 초 한은의 금리 인하를 점쳤다.

이처럼 시장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한은이 금리 인하를 단행할 가능성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15일 기준금리를 동결한 데 이어 신년사에서도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면서 금리인하 외에 다른 정책수단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총재는 "낮은 물가상승률이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 하락 등 공급 요인에 기인하는 상황에서 통화정책을 물가목표 달성만을 위해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부 "유가 하락, 중장기적으로는 긍정적"

이에 대해 정부와 국책연구기관은 유가 하락이 중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7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유가 하락이 큰 호재라는 점은 분명하다"면서 “이번 유가하락은 공급요인 때문이어서 수요 측면에 따른 디플레이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5개 국책연구원도 '유가하락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했다.

보고서는 유가가 연간 배럴당 60달러대 초반에 머무르고 세계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지속하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0.1%포인트 오르고 물가상승률은 0.1%포인트 떨어진다고 예측했다. 경상수지는 52억5천만달러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유가하락이 선진국 및 신흥국 전반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한국 경제의 수출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선진국의 경우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의 성장세가 확대되고 신흥국 역시 생산비 절감, 구매력 상승으로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는 주장이다. 다만 원유 수출 비중이 높은 일부 산유국의 경기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한국은 유가 하락에 따른 생산비 감소가 수출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수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올해 물가상승률을 1.9%로 전망했지만, 이후 유가급락 등 물가하락 요인이 강하게 발생한면 실제로는 1%대 중반에 머물 수 있다"면서도 "좋은 물가와 나쁜 물가가 있는데, 유가 하락은 좋은 물가하락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휘발유 가격 인하 놓고 정부-업계 ‘티격 태격’

하지만 이 같은 정부측 기대가 선순환의 흐름을 타고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지 장담할 수는 없다.

우선 국내 석유업계가 정부의 기름값 인하 압력에 반발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는 지난달 9일 오전 석유·LPG 유통업계 간담회를 열어 업계가 석유제품 가격 인하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같은 지역 내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가격이 ℓ당 800원 이상의 격차가 벌어지는 만큼 일선 주유소들이 가격을 더 내릴 소지가 있다는 논리다.

정부가 휘발유 판매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국제유가 하락을 기회로 삼아 실질적인 소비자의 구매력 증가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서민경제에 온기가 돌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달 7일 "국제유가 하락으로 석유·화학제품 원가가 하락했으므로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면서 "유가 인하가 제품가격에 반영돼 소비자의 구매력 증가, 실질소득 증가로 이어져야 내수가 활성화되고 경제 선순환 구조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휘발유 가격뿐 아니라 버스요금 등 공공요금의 인상 폭 제한을 유도하는 등 국제유가 하락이 실제 국민 생활에 반영돼 체감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하지만, 석유·LPG 업계는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할 제품가격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 압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업계가 국제유가 하락을 반영해 자율적으로 휘발유 가격을 내리고 있는데 정부가 업계 대표들을 소집해 가격 인하를 압박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보여주기식 행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김문식 한국주유소협회 회장은 "세금 때문에 주유소가 유통마진을 줄여서 휘발유 가격을 인하할 여력이 크지 않다"면서 "휘발유 판매가격이 ℓ당 1천300원 이하로 떨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업계는 무엇보다 ℓ당 890원가량의 세금을 인하하지 않는 한 국제유가가 떨어져도 휘발유 가격의 판매가격 하락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휘발유 판매가격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월 49%에서 12월 말엔 56%까지 치솟았다. 휘발유 1ℓ에는 교통세(529원), 교육세(교통세의 15%), 주행세(교통세의 26%), 부가세(세후 가격의 10%)가 붙는다.

유가하락으로 경상흑자 지나치면 환율 절상압력 커질 수도

유가 하락이 국내 경기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더라도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유가하락으로 제품 가격이 인하돼 수출증가로 경상수지 흑자가 과도하게 커지는 것은 환율관리상의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를 작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관심을 모았다.

최 부총리는 이날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경상수지 흑자가 너무 많이 나면 환율 절상(원·달러 환율 하락) 압력이 생기기 때문에 올해 흑자 폭을 작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관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최 부총리는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해 언급하면서 "적정 수준으로 물가가 관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정부는 올해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0%로 잡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수단을 마련해 정부의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인 3.8%가 달성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가 하락이 단기적으로는 국내 경제에 호재로 작용하지만 글로벌 성장 둔화가 본격화될 경우 긍정적 영향이 축소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포스리)는 지난달 23일 '유가 급락, 그 원인과 파급 영향은'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저유가가 경기부양의 선순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다.

포스리는 오히려 유가 급락이 건설, 조선 등 철강관련 산업의 수주 감소로 이어져 철강 수요 및 가격 회복에 부정적이라고 우려했다.

포스리에 따르면 건설 분야의 경우 저유가에 따른 글로벌 오일 메이저의 설비투자 축소와 재정이 취약한 산유국의 프로젝트 지연 및 취소 등으로 관련 수주가 축소될 전망이다. 특히 재정이 어려운 베네수엘라, 러시아, 이라크 등 산유국 등의 프로젝트는 발주가 취소되거나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포스리는 조선 분야의 경우 해양플랜트와 LNG, LPG선 등의 발주 연기 및 감소, 이로 인한 조선용 후판 수요 하락이 우려된다고도 밝혔다. 철강산업 중 대미 의존도가 높은 강관업종은 타이트 오일 및 셰일가스 사업 부진 시 수요 감소와 가격 하락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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