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 입혀주는 ‘핫바지’ 거부 안한 류길재, ‘통일부 핫바지’ 만든 당사자

류길재 장관이 이끈 박근혜 정부 1기 통일부는 ‘핫바지’란 오명만 떠안았다. 북한이 통일부의 무능을 싸잡아 공격하는 용어로 일찌감치 ‘핫바지’란 말을 사용한 지 오래고 정치권이나 정부 내에서도 통일부를 ‘핫바지’라고 공공연하게 칭하는 것이 현 실정이다.

1995년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시 2/3 의석을 점하던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을 붕괴시킨 요인인 ‘충청도 핫바지론’은 ‘충청 민심’을 자극했지만 ‘통일부 핫바지론’은 통일부에게 자괴감만 안기고 있다. ‘충청도 핫바지’는 이후 선거를 통해 아님을 증명했지만 ‘통일부 핫바지’는 공인된 ‘핫바지’ 취급을 받는다.

남북관계와 통일업무를 주관해야 할 통일부가 자기 본연의 업무영역조차 국방안보라인에 밀려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뒷방으로 밀려난 지 오래라는 평가가 나온 상황이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러나는 류길재 장관은 “통일부 장관은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라는 푸념까지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핫바지’란 말을 먼저 꺼낸 이가 류 장관이라 아이러니하다.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 2013년 5월 말 류길재 장관이 한 조찬강연에서 당시 가장 민감한 사안인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사태와 관련해 “우리를 핫바지로 보는 것이냐”고 말한 것이 ‘통일부 핫바지’의 시초이다.

그해 6월 개성공단 폐쇄 사태와 관련해 우여곡절 끝에 남북한은 남북당국회담을 열기로 했다가 이른바 ‘격(格)문제’로 무산될 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회담 무산의 책임을 우리 쪽에 전가하면서 “통일부가 아무 권한도 없는 꼭두각시, ‘핫바지’에 불과하다”고 맞받아 류 장관을 비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통일부 핫바지’는 여기저기서 사용되는 공식용어가 돼버렸다.

류 장관은 통일부가 핫바지가 된 것에 대한 배경을 한 언론과의 대화에서 “(박근혜 정부) 외교 안보라인에서 민간인은 나 혼자”라며 “장관직을 떠나면 (통일부의 구조적인 한계 등) 이런 부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이 청와대 안보실과 외교안보수석실, 국가정보원, 국방부 등에 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변명에 가깝다.

최근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 막은 대북전단 살포 문제에 대해서도 류 장관은 “만약 내가 좀 완화한다고 하면 북한에 휘둘렸다며 반대쪽에서 엄청 난리가 날 것”이라며 “표현의 자유에 따라 막을 수 없다는 정부 방침이 세워진 이상 제가 거기에 뭐라고 더 말을 할 수 있겠냐”는 항변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항변이다.

또 그는 지난 17일 자신의 교체가 확정된 시점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남북관계를 제대로 풀어보자는 뜻을 갖고 시작했으나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유감도 표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보이지 않다가 자신의 퇴임이 확정되고서야 이러한 변명과 항변을 하는 것은 정부부처의 수장으로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통일부의 수장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이나 청와대에게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펼치지도 않아 ‘핫바지’여서는 안 될 통일부를 ‘핫바지’로 만든 책임이 바로 류 장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류 장관 지금까지 청와대나 외교안보라인의 ‘군인’들이 입혀주는 ‘핫바지’를 단 한 번이라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또한 ‘통일부 핫바지’를 만든 당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 장관은 과거 정부에서도 통일부 장관은 ‘핫바지’였다고 강변하는 왜곡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장관은 류 장관의 표현이 맞을 수 있겠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은 아니었다. 참여정부 시절 정동영 장관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9.19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정세균 장관은 노련한 경륜으로 드센 외교안보라인에 밀리지 않았고 NSC 위원장을 맡은 이종석 장관은 외교안보 부문을 주도했다.

지금 통일부와 산하기관들에 조용한 충격을 준 홍용표 청와대 통일비서관의 장관 내정은 류 장관의 ‘무소신’이 자초한 것이란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1급 비서관을 내려 보내 통일부를 직접 관리하겠다고 할 정도의 ‘핫바지’로 만든 책임이 류 장관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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