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성 강조는 ‘독재 합리화’, 민주주의 길만이 인류사적 보편성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1979년 10월 방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 통역을 하면서 리 전 총리와 인연을 맺었다.
▲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1979년 10월 방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 통역을 하면서 리 전 총리와 인연을 맺었다.

[폴리뉴스 정찬 기자]‘이광요(李光耀)’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리관유 전 총리 장례식이 29일 싱가포르 국가장례식으로 치러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싱가포르를 동남아의 금융과 서비스산업의 중심지로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그는 대내외적으로 성공한 국가 지도자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선 적대적 태도로 일관한 독재자였다. 이 지점에서 우리 국민은 ‘이광요’ 타계소식에 새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리 전 총리와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위해선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이른바 ‘개발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개발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리 전 총리는 ‘아시아적 가치’란 이름의 ‘반민주적인 패러다임’을 사용했고 박 전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 또는 ‘유신(維新)’이라는 미명을 썼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제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만들고 악의적으로 왜곡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원의 1/3을 ‘유정회’란 이름으로 자신이 임명해 개헌 가능선인 2/3 의석을 유지했고 대통령 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만들었다. 리 전 총리는 집단대표선거구제(Group Representation Constituency)라는 기만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집권당이 100% 의석에 가깝게 독점했다. 야당이 약진했던 지난 2011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60.1% 득표율로 총 의석 87석 중 81석(93.1%)를 차지했다.

이들은 ‘경제개발’을 위해선 ‘민주주의’를 희생해야 한다는 ‘공통의 가치’를 신봉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박 전 대통령은 ‘무기한 중임제’의 종신 대통령제를 추구했지만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밀려 끝내 좌절했고 리 전 총리는 ‘경찰국가 체제’를 통해 물샐 틈 없는 인민당 독재체제를 구현, 리관유-리센룽 세습체제를 지금까지 잘 유지해왔다는 것 정도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나 리 전 총리의 경제개발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해야 한다는 리더십은 인류 보편의 가치 실현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잘 살기만 하면 독재도 상관없다’는 주장은 ‘반민주 독재 합리화’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피’로써 민주주의 가치를 일군 나라들보다 중동과 브루나이 등 부유한 왕정국가들을 더 본받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인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보편의 잣대’로 만들어왔다. 경제개발과 성장은 이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물적 기반으로 바라봤다. ‘경제’와 ‘민주주의’는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민주주의’를 보다 보편성을 띠는 절대적 가치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20세기 지도자나 21세기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보편성’을 불편해하면서 들이댄 것이 ‘특수성’이란 ‘잣대’이다. 동아시아에서 ‘박정희’와 ‘리콴유’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박 전 대통령은 분단된 한국적 상황을 특수성으로 내세워 ‘한국적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보편성’에 저항했고 리 전 총리는 ‘가족 중심의 유교적 문화’란 ‘특수성’을 내세워 ‘민주주의’란 인류역사의 ‘보편성’을 거부했다.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또한 비슷한 범주이다. 남북분단이란 ‘특수성’을 강조해 ‘주체사상’과 ‘북한식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교도적 민주주의’도 이른바 ‘특수성’의 산물이다. 지금도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자기 국가의 ‘특수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성’을 내세운 지도자의 공통적 이해기반은 ‘독재’의 유지에 있다.

김대중의 리콴유 비판, “권위적 지도자의 저항에도 아시아 민주주의는 진전”

이들 독재자 중 대부분은 추상같은 역사적 보편성에 따라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박정희’와 ‘리콴유’만은 여전히 논란이다. 그 배경에는 냉전시기에는 미국과 서구진영에 속해 있어 서구의 비판 잣대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고 냉전 이후에는 한국과 싱가포르에서의 민주화의 진전 정도의 문제가 깔려 있다.

여기에 서구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폄하심리도 작용했다. 유교문화의 아시아인들은 서구인 자신이 개척한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이를 실천할 수 없다는 우월의식을 ‘리콴유’ 사례를 통해 꾸준히 적용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개발독재 모델’을 정형화하고 이를 후진국에게 권유하기조차 했다.

민주주의 화신(化身)으로 평생 민주주의를 실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러한 리 전 총리의 ‘반민주적 가치’에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리 전 총리가 1994년 미국 국제정치학술지 <포린 어페어스> 3~4월호에 ‘문화는 숙명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문화적 특수성을 근거로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고 하자 김 전 대통령은 이에 반박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패배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국내에 돌아와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지던 시점이다. 김 전 대통령은 같은 해 <포린 어페어스> 11~12월에 ‘문화란 운명인가’라는 기고논문을 통해 ‘이광요’의 ‘아시아적 가치’ 주장에 “(아시아 민주주의 진전의) 가장 큰 장애요소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과 변명자들의 저항”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김 전 대통령은 ‘이광요’가 통치하는 싱가포르를 “경찰국가의 공포에 의한 강요된 침묵”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또 “이광요 씨와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고 있다”며 인류 보편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은 제대로 된 정상국가로 가기 위해선 ‘인류 보편성’의 길로 가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한국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이 ‘보편성’의 길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룩했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의 ‘박정희의 특수성’에 갇혔다면 세계와 교류하며 발전한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특수성’에 발목 잡힌 국가는 세계를 향한 비전을 제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오로지 과거와 현재만 있을 뿐 미래는 없다.

한 국가가 세계 속에 개방된 국가로 리드해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만의 ‘특수성’을 벗어던지고 ‘보편성’의 가치 속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극단적인 사례로 1980년대 초까지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한 북한이 정치사회적으로 ‘주체의 특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냉전체제 붕괴 이후 30여 년 동안 한 치의 발전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87년 6월 항쟁은 피와 희생이 깃든 ‘대한민국의 축복’이다. 비로소 한국이 ‘특수성’의 굴레를 벗고 세계 보편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한 첫 걸음을 뗐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남북한의 질적 격차는 벌어졌고 경제도 민주주의의 밑바탕 속에서 지식정보산업으로 이행했고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기여하고 있다.

거듭되는 대한민국 역주행, 과거 향수와 함께 ‘보편’의 길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으로서 항해가 순조롭지만은 않다. 지난 26일 대법원은 유신시절의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이지만 그것을 발동한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는 판결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를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겼다.

대법원도 박근혜정부 출범 후 거듭 된 지록위마(指鹿爲馬) 판결에 가세했다. 사법부는 지금까지 유신시절 긴급조치의 위법성을 인정해왔다. 그러다 이제 다시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며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에 면죄부를 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이다.

이 같은 역주행은 비단 대법원 뿐만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유명무실한 인권기관이 된 지 오래다. 어느덧 1970년대와 1980년대 횡행했던 과거의 유물 ‘공안 정국’은 지금 우리 사회에 익숙한 존재가 돼버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요란했던 ‘검찰의 독립’이란 말은 먼 옛 말처럼 들린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 과거의 ‘특수성’으로 회귀하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 보편의 길을 걷는데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 결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하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회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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