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6년, 아직도 한국 정치의 중심에는 노무현이 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진 생전 개혁 과제는 2015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은 1990년 1월 3당합당에 반대하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
▲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진 생전 개혁 과제는 2015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은 1990년 1월 3당합당에 반대하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

[폴리뉴스 안병용 기자] 정치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그리고 ‘실험’의 연속이다. 실험은 논쟁의 한 가운데, 갈등의 중심에 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민주주의 발전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화두를 던졌고, 금권정치에 분노를 표했다. 그는 지역주의에 맞섰고, 권위주의를 깨려했다. 2015년 현재 그의 실험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노 전 대통령이 서거 한 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실험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노 전 대통령은 생전 그의 민주주의 소신을 밝힐 때마다 ‘절반’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는 “보통사람들이 힘쓰는 세상,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기 펴는 세상이 민주주의라면 절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역사에는 중립이 없다. 우리 좋은 역사 만드는 데 동업하자. 절반까지 온 민주주의 역사를 완성하자”며 화두를 제시했다.

그의 ‘절반 민주주의론’에 비추어본다면 그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14년 겨울,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며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 70만 원을 남기고 세상과 이별을 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은 대한민국 서민 가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평균의 3배나 높다.

▲ 권위주의 해체

노 전 대통령은 ‘비주류’였다. 그는 ‘성역’과 금기‘를 타파하기 위해 애썼다.

검찰 개혁을 위해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판사 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임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정원 쇄신을 위해 개편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말 국정원의 국내 사찰업무를 중지시키고 도청을 금지했다. 국내 정치정보에 투입됐던 많은 요원들은 대테러와 산업보안 분야에 배치됐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소통’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석·보좌관 회의에 비서관이나 담당 행정관이 배석돼 자유로운 의견이 개진됐다. 청와대 내 온라인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을 통해 비서관은 물론 행정관까지 노 전 대통령과 정책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퇴임 직후에는 더욱 전례 없는 일을 벌였다. 고향인 봉하마을에 돌아가 주민들과 함께 청소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어울려 생활했다.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매 주 수백 명의 시민들이 ‘서민 대통령’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권위주의 타파와 함께 권위 자체도 함께 추락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임기 내내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내놓아 ‘가볍다’는 인상을 심어줬고, “권위주의 타파가 아닌 (대통령의)품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에 시달려야만 했다.

▲ 금권정치 타파

2003년 2월 노 전 대통령의 취임식. 그는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요망한다”면서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지난 수십 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의 특권적 유착구조를 해체하고 투명‧공정한 사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실제 참여정부는 정치개혁법을 통과시켜 돈 안 드는 선거를 제도화하기도 했다.

2008년 1월 퇴임을 앞두고는 가장 바라는 사회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없는 사회”라며 정리하기도 했다. ‘도덕성’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 최대 무기였다.

그러나 무기의 날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친노 인사를 비롯해 형 건평씨,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정치자금법이나 뇌물수수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과 가족마저 검찰에 소환되는 처지를 맞았다.

투쟁대상에 도리어 발목 잡힌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국사회에서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정치, 금권정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말해준다.

▲ 지역주의와의 싸움

‘바보 노무현’. 지역주의와 싸운 그의 정치 인생은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부산에서 당선됐지만 이후 3당 통합을 거부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나선다. 1992년 이후 연거푸 부산 지역에서 국회의원 및 시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1998년에는 서울 종로 보선에 당선돼 그대로 눌러앉아도 되는 것을 마다하고 16대 총선에 부산에서 다시 나와 또 고배를 들었다. ‘바보 노무현’의 수식어가 본격적으로 붙던 시기다.

2002년 대선 때에는 영남 출신으로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이후에도 고집스럽게 지역주의 타파에 매달렸다. 지역 간 균형발전을 목표로 기업도시,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 행정수도 건설, 산업클러스터 정책 등을 추진했다.

집권 여당의 분당과 연정제안도 정치 선진화를 기약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3년 4월 국정연설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해달라. 이런 제안이 내년 총선에서 현실화되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2005년 7월에는 “지역주의 극복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며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한나라당이 거부하자 “대연정을 않더라도 선거제도만 고친다면 권력을 내줄 수 있다”고도 했다.

2016년 4월13일 20대 총선이 채 1년이 남지 않은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이 고민했던 지역주의 극복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정치에서 지역주의는 온전히 남아있다.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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