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원칙을 위해 걸어온 비타협적 외길 인생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div>
▲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천호선 정의당 대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전형민 기자]지난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6주기였다. 6주기를 맞이해 일제히 경남 봉하 마을로 향하는 정치인들과 추모객, 그리고 그들을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마을은 온통 북새통을 앓았다.

서거 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헌정 사상 가작 독특한 이력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고 임기를 마친 후로도 고향인 봉하마을로 귀향해 서민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부림사건’, ‘그냥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노 전 대통령은 19468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우수한 학업성적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부산상고에 입학했다.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1975년 삼전사기(三顚四起)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변호사로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던 그는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대표적 용공조작(容共造作) 사건으로 불리는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게 되면서 학생과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청문회 스타정치 인생의 시작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던 노변(盧辯)’1988,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규제됐다가 1987년 해금된 김영삼·김대중이 중심이 돼 창당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해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된다. 같은 해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논리 정연한 발언과 날카로운 질문으로 증인들을 추궁해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부도덕한 야합’ 3당 합당

그리고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부도덕한 야합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을 정계로 이끈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해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1992년 제14회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과 물결유세단장을 거쳐 1993년 최연소 당 최고위원이 됐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부산에서 출마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한 그는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당선했으나 200016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인 종로를 포기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후보 단일화를 통해 제16대 대선 승리

낙선 후 20008월부터 20014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역임한 뒤 국민경선제를 통해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같은 해 1118일 국민통합 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 거쳐 단일 후보가 됐고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등을 기치로 내걸고 대선에 도전해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2.32%p 차로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탄핵소추안과 초유의 대통령 직무정지

참여정부를 표방하면서 취임한지 불과 1년여 만에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야당의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측근 비리등에 대한 사과요구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제1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해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현직 대통령이 직무정지되는 시련도 겪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그 해 4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석을 확보했으며 514일 헌법재판소까지 탄핵소추안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리자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사진. <사진=폴리뉴스 DB></div>
▲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사진. <사진=폴리뉴스 DB>

귀향 그리고 검찰 조사

20082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는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해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며 평범한 전원생활을 보냈다. 또한 건전한 토론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의 민주주의 2.0’ 인터넷 토론 사이트를 개설해 세상과 소통했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퇴임시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고, 검찰에 의해 친형·부인·아들··측근 등이 비리에 연르됐다는 의혹을 받고 이로 인해 20094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약 한 달뒤인 523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봉하마을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서거했다.

 

원칙에 대한 결벽증, ‘바보노무현

제가 생각하는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 나게 이어진 그런 세상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198889일 국회 첫 대정부질문 발언이다. 그는 이후 불같은 열정으로 ‘5공 청문회 스타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이 평생을 싸워온 정치목적은 권위주의 정치 청산과 지역주의 타파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의 별명은 바보 노무현이었다. 이는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본인이 이미 당선한 적 있는 종로 등 지지층이 많은 지역이 아닌 부산에서 지자체장과 국회의원 등 총 4번이나 출마해 떨어졌기 때문이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께 보여 드리겠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는 끝내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돼야 합니다고 말해 권위주의 청산과 원칙을 굽히지 않는다는 원칙을 보였고 이 원칙으로 인해 임기 중 대통령직 직무정지, 탄핵소추 등 굴곡을 겪기도 했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인터뷰에서 바보라는 자신의 별명에 대해 “(바보라는 별명이) 별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바보 정신으로 정치를 하면 나라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냥 바보하는 게 그게요, 그냥 좋아요라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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