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개헌은 가능할까?

17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제67주년 제헌절 경축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17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제67주년 제헌절 경축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전형민 기자]헌법을 제정한 것을 축하하는 제67주년 제헌절을 맞은 17일 국회에서는 어김없이 제헌절 행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제정된 후 9차례의 개헌을 겪은 헌법은 단 3차례를 제외하고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 유린당한 상처로 얼룩져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이래 총 9차례에 걸쳐 개정됐다. 첫 개헌은 1952년 7월 4일에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본인의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개헌을 강행했다. 헌병에 의해 끌려나온 국회의원들이 기립 표결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했다. 이 개정으로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했다. 

두 번째 개헌도 그리 멀지 않았다. 2년 뒤인 1954년 9월 장기 집권을 노렸던 이승만은 3선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조항을 배제하는 ‘3선 개헌’을 단행했다. 국회 투표 결과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의원의 3분의 2에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하지만 이승만은 ‘4사5입’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세 번째 개헌은 이승만이 3월 15일 대선에서 3선에 실패하고 4·19혁명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1960년 6월 15일에 있었다. 3차 개헌은 ‘의원내각제 개헌’으로 합헌절차를 거친 모범적인 개정이었다. 그 해 11월, 3차 개헌 이후 5개월 만에 네 번째 개헌이 있었다. 네 번째 개헌은 그 해 3월 15일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며 여론이 들끓어 단행됐다. 혁명 완수를 위한 특별법(소급처벌입법) 제정의 헌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다섯 번째 개헌은 대통령제 개헌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민주정권을 무너뜨린 박정희 소장은 다음해인 1962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장교들이 모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대통령제 개헌안을 의결하고 같은 해 12월 국민투표로 가결시켰다.

세 번째 개헌부터 다섯 번째 개헌까지 불과 3년 만에 이뤄진 것에 비해 여섯 번째 개헌은 다섯 번째로부터 7년 후인 1969년에 이뤄졌다. 임기를 2년여 남겨뒀던 박정희 대통령은 3선을 노리고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 한다”라는 개헌안을 내놓았고 이를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하던 중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여섯 번째 개헌을 통해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을 통해 국회를 해산한 박 대통령은 입법권을 대행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세우고 여기서 그 유명한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대한민국 헌법의 일곱 번째 개헌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1962년 다섯 번째 개헌을 단행했던 박 대통령이 불과 10년 만에 영구적인 대통령직 유지를 위해 대통령을 국민 직선제로 뽑던 것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하는 중임제한도 없이 영구 집권을 허용하는 개헌을 했다. 종신 대통령이 된 것이다.

‘유신헌법’을 개헌하고 7년째 대통령직을 이어오던 박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로 서거했다. 하지만 곧이어 전두환 소장이 12·12 군사반란과 5·17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일으키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불법 기구를 만들어 이 기구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여덟 번째 개헌이 단행됐다. 여덟 번째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 간접선거 였다. 전두환은 1981년 2월 개헌안에 따라 5278명의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했고 이들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홉 번째 개헌은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1987년 6월 항쟁이 그 시발이었다. 당시 정권을 이양 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노태우 대통령은 6월 항쟁의 성과로 6·29 선언을 했다. 6·29선언의 골자는 대통령제 직선제와 민주화조치, 김대중 복권 등이었다. 이 해 10월 국회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가결하고 6·29 선언에 따라 국민들이 열망하던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야 합의에 의한 평화적 개헌이었다.

우리나라의 개헌 역사는 단 한 번, 네 번째 개헌을 제외하곤 전부 최고지도자의 선출방식과 관련이 밀접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만큼 헌법의 가치가 권력자들의 손에서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유린되어왔다. 국회는 최고권력자를 견제하고 개헌의 권능을 발휘해야함에도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자의 시녀가 되어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최근의 아홉 번째 개헌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열 번째 개헌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럼에도 개헌에 대한 논의와 갑론을박만 무성했던 이유는 헌법 개정의 주체인 국회가 여전히 권력자의 시녀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삼권분립 체제에서의 개헌은 여전히 요원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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