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부친 일제징병에 “정신적 내선일체화 꾀하는 것”
<한겨레>는 1일 토요판에서 김무성 대표의 방미 중 ‘과공비례(過恭非禮)’논란을 낳은 친미행보와 관련해 부친의 친일문제 때문에라도 몸을 사려야 하는 김 대표가 “저래도 되나?”라는 의문에 김무성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친일문제가 어떻게 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 <네이버>를 통해 김무성, 김용주, 친일 등의 단어를 쳐놓고 검색을 한 결과 김용주 회장은 친일을 의심받기는커녕 절세의 애국자로 둔갑해 있었다고 말했다.
<한겨례>는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 회장은 일제 때 친일 행적이 분명하고 해방 뒤에는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적산’ 전남방직을 전쟁 중에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 이에 김 대표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라도 눈에 드러나는 친미 행위는 피해야 할 처지인데 반대로 간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네이버>에 검색된 각종 기사와 블로그 글들이 김용주의 친일을 해명하고 애국을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2년 전쯤 같은 검색어로 찾아봤을 때하고는 하늘땅 차이였다. 지난 2년 동안 생산된 기사나 블로그 글들의 제목 중 몇 가지만 열거하면 ▲김무성 “우리 부친은 친일파 아닌 애국자” ▲김무성 친일 논란 정리, 해촌 김용주 선생의 애국활동 ▲김무성 대표 부친, ‘해촌(海村) 김용주’ 선생…공작 속에 묻혀버린 ‘애국자’ ▲김무성 대표 아버지가 친일파가 아닌 13가지 이유! ▲“아버지가 친일파라고…차라리 나를 모욕하라” 김무성 의원이 직접 말하는 ‘나의 개인사와 가족사’ 등등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가 황당했다. 언론사의 김무성 대표 부친의 친일기사에 대한 김 대표 쪽의 반론보도를 ‘사실’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쓴 김의겸 기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경위를 설명했다.
김 기자는 “2년 전쯤 ‘백년전쟁은 계속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김무성 대표를 거론하면서 ‘부친인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비판”했다며 “김 대표는 즉각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는데 내 나름으로는 김 대표의 요구를 선선하게 받아줬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요구를 받아준 데 대해 “나는 칼럼에서 ‘김 의원이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표현했는데, 알고 보니 종북주의자, 좌파, 김정일의 꼭두각시라고는 했어도 빨갱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라고 정정해줬다”고 했다.
이어 “부친의 친일 행적 부분도 반론을 보도해주는 걸로 쉽게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런데 김 대표는 자신의 변호사가 작성한 반론보도를 통해 친일파가 아니고 애국자라고 강변했다. 그리고 이 반론보도 기사가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 씨가 ‘친일파가 아닌 애국자’로 만들고 이글들이 인터넷 공간에 유포됐다는 것이다.
김의겸 기자는 이러한 반론보도가 나간 경위에 대해 “반론보도는 정정보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정보도는 기자가 사실보도의 착오를 인정하고 내용 자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보도는 양쪽의 주장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방어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기자인 나야 사실관계가 틀림이 없고 친일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 아들인 김무성 대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반론할 기회를 주는 게 공정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또 칼럼을 쓸 당시는 김무성 대표의 행위(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 발언 왜곡)에 분개했지만, 돌아가신 부친까지 끌어들인 건 나도 나중에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가 지면에 실렸다”며 “김 대표가 반론보도문의 성격을 자기한테 너무 유리하게만 해석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더 이상 보도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걸로 이해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네이버 검색을 하다가 경악하기 전까지는”이라고 말했다.
김 기자는 이로 인해 자신이 조롱감이 됐다는 것도 밝혔다. 그러면서 “ 어느 기사에서는 이런 치욕적인 글귀를 발견했다. ‘한겨레는 이전에도 김무성 대표와 관련된 기사에서 오보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김무성 의원의 부친이 친일파라는 보도와 김무성이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허무맹랑한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도 정정보도를 낸 적이 있었다’ 내가 허무맹랑한 기자가 되는 건 문제가 아닌데 회사마저 망신을 사고 있는 것”라고 했다.
심지어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을 간단하게 거론하는 <오마이뉴스>의 어느 기사를 보니 중간에 엉뚱하게 내가 작성한 반론보도문이 끼어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원문이 아니라 첨삭이 된 문장이었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쪽에 기사 정정을 요구하며 그 반론보도문을 들이댄 모양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합의해준 반론보도문이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언론의 재갈을 물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그는 “나는 이제 김 대표 선친의 친일 행적을 정면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지난 2년 동안 사정을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알고 나서도 계속해서 침묵한다면 나는 역사 왜곡의 공범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며 “친일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과 친일을 애국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또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말하고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의 친일행적을 짚었다.
김용주 일제징병에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 될 것”
<한겨레>가 제시한 김용주 씨의 친일행적 기사는 ▲1941년 12월7일 대구부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한 김용주 경북도 도회 의원이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가결됐음을 알린 <매일신보> 12월9일치 3면 기사.
▲1941년 12월7일 대구부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한 김용주 경북도 도회 의원이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가결됐음을 알린 <매일신보> 12월9일치 3면 기사 ▲1943년 10월2일 징병제 시행 감사와 미국 및 영국의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를 보도한 <매일신보> 10월3일치 2면 기사 등을 제시했다.
특히 1943년 10월 2일자 기사에서 김용주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3년 10월2일 징병제 시행 감사와 미국 및 영국의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를 보도한 <매일신보> 10월3일치 2면 기사는 징병제 시행을 고마워하며 미국과 영국 격멸을 결의할 목적의 기사다. 이 자리에서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일본명 金田龍周, 경북도회 의원)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敬神崇祖 報恩感謝)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기자는 이 기사에서 나온 김용주의 발언의 상세한 부분을 찾아보니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에서 발견했다.
A4 용지로 3장이 넘는 분량에서 김용주는 징병제 실시에 대해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고 했고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