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유감’ 표명을 ‘사과’로 수용, ‘천안함 침몰’ 해법 선례 만들어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과 황병서 북한 군 총정치국장이 25일 판문점에서 가진 남북고위급접촉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룬 후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청와대]
▲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과 황병서 북한 군 총정치국장이 25일 판문점에서 가진 남북고위급접촉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룬 후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청와대]
[폴리뉴스 정찬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인 8월 25일 남북한 고위급 접촉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지난 8월 22일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해 나흘에 걸쳐 43시간이라는 마라톤협상에서 남과 북이 서로 양보하면서 남북관계를 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로써 8월4일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의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이어진 남한의 대북확성기 방송재개, 여기에 20일 북한의 포격 도발과 우리 쪽의 대응사격, 그리고 21일 북한의 준 전시상태 선포와 22일 오후 5시까지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이 없을 경우 북한의 추가도발 예고와 한미연합군의 북의 도발시 강력한 군사적 응징 맞불 예고 등으로 높아졌던 군사적 긴장상황도 25일을 기점으로 해소국면에 들어갔다. 목함지뢰 폭발 사건 이후 21일만이다.

남과 북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지난 22일 오전, 우리 쪽에선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요표 통일부장관, 북쪽에서는 권력 2인자인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노동당 대남비서가 참석하는 ‘2+2 남북고위급접촉’를 같은 날 오후에 판문점에서 열기로 합의하면서 남북한 긴장상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회의 개시 나흘 만에 임기 절반을 맞는 박 대통령에게 ‘협상 타결’이라는 반가운 선물을 던졌다. 남북한은 ▲남북 당국자 회담 빠른 시일 내 개최 ▲지뢰폭발로 부상 당한 남측 군인들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 ▲군사분계선 일대 모든 확성기 방송 8월 25일 12시부로 중단 ▲북한의 준 전시상태를 해제 ▲추석 이산가족 상봉 추진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 활성화 추진 등 6개 사항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선물은 박 대통령이 그동안 누차 강조해온 도발과 보상의 대북관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기본원칙’을 양보한 대가였다. 북한의 ‘유감’ 표명을 우리 정부가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으로 해석하며 수용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의 성과를 거뒀다.

박 대통령은 이날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에 대해 “이번 합의는 정부가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면서 다른 한편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결과”라며 “북한이 자신들의 도발 행위에 유감을 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것이 앞으로 남북 간의 신뢰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평가했다.

김관진 안보실장도 25일 새벽 고위급접촉 결과 브리핑에서 북한의 ‘유감’ 표명을 “회담에서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해석과 같이 지뢰 폭발 부상자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을 자신의 도발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과 정부가 북한의 ‘유감’ 표명을 이처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여권의 축인 보수층의 반발을 우려한 때문이다. 보수층의 지지에 의해 국정동력을 얻는 박 대통령으로선 자신이 천명한 대북협상의 ‘원칙’을 져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곤혹스럽기 때문이다.

정세현 “이번 합의는 박대통령의 결단의 결과, 아량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원칙’만 고수하면 남은 임기 동안도 아무런 성과를 도출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 하에 북한의 ‘유감’ 표명을 수용하고 남북관계의 전환점을 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신이 대선공약을 내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첫 단추를 지금이라도 맞춰야겠다는 결단으로 평가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이날 오전 CBS라디오에 출연해 이번 남북한 합의 성사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의 결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평가한 것도 여기에 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의 유감 표명을 수용하고) 확성기 방송 중단을 보장해 준 우리 측의 아량 있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국제사회에서도 그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래 우리 정부에서는 이번만큼은 사과의 주체를 분명히 한 시인사과 재발방지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감표명 정도로 합의를 한 것은 우리 정부가 아량을 발휘한 결과”라며 “과거 사례와 같다. 사고를 누가 일으켰다는 하지 않고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데 대해서 유감을 표시한다는 식으로 했었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이러한 결단을 한 배경에 대해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될 능력이나 책임은 북한한테 없다. 우리가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그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국민들이 이해를 하고 국제사회에서도 그걸 평가해 줘야 한다. 김정은이 굴복을 했다느니 김정은이 아량을 베풀었다느니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8·25협상 타결, ‘천안함 침몰’ 해법 마련해...5.24조치 해제로 진전될 수도

또 박 대통령이 이번 8·25합의를 “앞으로 남북 간의 신뢰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계기”라고 평가한 대목은 남북관계 진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천안함 폭침 문제’와 5·24대북제제 조치문제에 해결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섯 번째 남북합의사항인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 활성화 추진’은 이러한 남북한의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세현 전 장관은 이에 대해 “(북한의 유감 표명을 도발에 대한 사과로 적극 수용한 것은) 우리 정부가 한 발짝 물러나서 해결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천안함 문제도 이렇게 풀릴 수가 있다”며 “이제 5.24조치도 해제할 수 있는 선례가 구성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추후 남북간 회담에서) 5.24조치 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 될 것”이라며 “이번에 북한이 했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고도 유감 표명 선에서 그냥 넘어가지 않았나? 천안함 사건도 그런 식으로 풀 수 있는 선례가 지금 생긴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선례가 생겼기 때문에 천안함 사건도 유감표명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넘어간다면 5.24 조치를 풀 수 있는 계기”라고 설명했다.

이는 이번 북한의 지뢰로 인해 부상을 입은 군인들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수준을 ‘도발에 대한 사과’로 해석하는 방식이 ‘천안함 폭침 문제’ 해결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방식을 적용한다면 천안함 폭침 도발사건도 비슷한 해법에 따라 처리될 수 있다. 이는 곧 5.24조치 해제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번 남북한 고위급 접촉의 실질적 주인공은 박 대통령이다. 8·25합의는 박 대통령 스스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부상자의 ‘유감’ 표명을 ‘도발에 대한 사과’로 인정한 것도 박 대통령이다. 김관진 안보실장이 이러한 해석을 할 정도의 권한은 없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결정도 박 대통령이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박근혜정부의 특성상 이러한 결정은 박 대통령 본인이 아닌 한 내리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원칙’을 져버렸다는 보수층의 비판을 감수하기 위한 액션도 감행했다. 협상 타결 전날인 2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강경하고 ‘원칙적 입장’을 천명해 보수층의 마음을 다잡은 것도 이러한 협상결과 도출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박 대통령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5.24조치 해제의 길로 접어들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이번 합의는 박 대통령의 결단이 결정적인 요인이 됐지만 향후 과정에서도 박 대통령이 이러한 대승적 결단을 반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남북관계는 ‘천안함 침몰’ 책임문제 뿐 아니라 대북전단 살포문제, 남북 최고지도자에 대한 ‘비방문제’ 등 곳곳에 ‘지뢰밭’이 깔려있다. 지난 2013년 남북당국회담이 ‘격’문제 때문에 무산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장애물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향후 남북관계는 조만간 닥칠 여러 난관 속에서 박 대통령이 이번 회담에서 보여준 ‘대승(大乘)’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그러나 이는 박 대통령 지지층인 보수층의 정서와는 상반된 선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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