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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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캄보디아에서는 몇 백만명을 죽여도 그만인데, 그까짓 십만이고 이십만이고 탱크로 깔아뭉개지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지기 직전에 경호실장 차지철이 했던 말이다. 그 때 박정희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실제로 십만, 이십만의 학생과 시민이 죽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시민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지난 2015년 11월 16일 새누리당 이원영이라는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시민을 쏴서 죽어도 80~90%는 정당하다고 나온다... 이런 게 선진국의 공권력이 아닌가.”

역시 같은 당의 김용남이라는 국회의원은 살수차 동원이 불가피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청와대 경호원 수칙 상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경내로 진입하면 ‘실탄 발포’가 원칙이다.”

시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경찰이 시민에게 총을 쏴서 죽게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이다.

탱크가 아니라 총이니, 그래도 차지철처럼 일이십만까지 생각한 것은 아닐테니 감사해야 될 일인가.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차지철과 다르지 않다. 정권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자들의 목숨 따위야 대수롭지 않은 것이요, 필요하면 죽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살인적인 물대포를 쏴서 일흔살 농민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 경찰은 아직까지 한마디 사과조차 없이 과잉진압이 아니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이미 수백만명이 치를 떨면서 당시 현장의 영상을 보았건만, 규정 위반은 아니니 어쩌니 하면서 말 장난만 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킬 책임을 갖고 있는 국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반대하면 너희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위협은 이 시대가 유신독재로 완전히 회귀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게다가 권력 주변에서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이니, 반기문 후보- 친박 총리이니 하며 개헌론까지 솔솔 나오고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 종착점이 박근혜 대통령의 수렴청정 아니면 사실상의 장기집권이 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설마하는 생각도 들지만, 근래에 하는 짓들을 보니 여건이 갖추어지면 못할 것도 없다는 판단이 든다. 박 대통령 아버지 시대에 겪어야 했던 악몽들이 다시 떠오른다. 참으로 길고도 기구한 악연이다.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이루어냈던 이 나라 민주주의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일만은 아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도, 전두환의 5공 독재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냈던 이 나라 국민이다. 1인 독재를 꿈꾸었던 권력들은 결국에는 예외없이 비참하게 몰락하지 않았던가. 권력 주변에 ‘차지철들’이 다시 등장하는 작금의 광경은 정상정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권력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고백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권력의 무모한 꿈들이 실현되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달라졌다.

피흘리며 쓰러진 농민에게 계속 가해지는 물대포를 보면서 서울의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다. 그리고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말이 생각났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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