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쟁 벌인 동지, 권력 놓고는 치열한 경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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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연합뉴스>
[폴리뉴스 김희원 기자]지난 22일 새벽 언론들이 일제히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서거를 알리는 속보를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결국 이날 오전 0시 23분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YS의 서거로 함께 재조명 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약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올해 88세로 생을 마감한 YS의 정치인생에서 DJ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양김(兩金) 시대'라고 불리우며 한국 현대 정치사의 양대 축을 이루던 YS와 DJ. 

영남과 호남을 각각 대표하며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YS와 DJ가 모두 영면의 길에 들어서면서 '양김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고 현대사의 한 페이지도 새로운 세대의 기록을 위한 페이지로 넘어가게 됐다.

두 사람은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동지'이자 대통령 자리를 놓고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경쟁자이기도 했다.

DJ는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계에 뛰어들었다. YS의 경우는 경남 거제에서 멸치 어선 10척 이상을 보유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1년 당시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내딛었다.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운 YS는 5~10대와 13·14대 총선에서 당선 되면서 헌정 사상 최다선인 9선 의원에 올랐다.

'YS-DJ'의 첫 승부였던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는 YS가 DJ에게 승리했다.‘40대 기수론’을 내세운 1970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YS가 1차 투표에서 DJ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YS가 결선투표에서 역전패 당하면서 DJ에게 패배했다.

그는 경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대선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고 곧 나의 승리다"라며 DJ 지원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95만표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은 군사독재정권의 핍박을 받는 정치적 시련기를 보내야 했고 주요 정치적 국면에서는 '동지'로 협력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YS는 1979년 10월에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하면서 '의원직 제명'을 당하고 가택 연금됐다. 1979년 10·26 사태 발생으로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오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터지고 그해 5월 그는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DJ 역시 1973년 8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돼 수장될 뻔했으며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1984년 양측은 손을 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해 각종 성명서 발표 및 기자회견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민추협은 이후 1985년 1월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고 그해 2월 총선에서 제1 야당으로 부상했다. 이를 토대로 양김은 6월 민주항쟁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지만 1987년 1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후 DJ가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대선에 출마해 YS가 28%, DJ가 27%를 득표해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이후에도 후보단일화 실패로 인해 민주정부 탄생을 실패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YS는 이듬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DJ의 평민당에 제1야당의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이 이끌었던 통일민주당이 3당으로 전락하게 되자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정의당, JP(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치는 ‘3당 합당’을 결행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창당된 것이 현 새누리당의 모태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YS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라며 '3당 합당'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YS에 의해 발탁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3당 야합에 불과하다"라며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고 '꼬마민주당'에 남는 등 반발도 거셌다. 지금도 '민주화 투사'가 '3당 야합'으로 한국 정치의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전 의원은 24일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 "그분이 3당 합당을 한 것이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냐, 아니면 그것 때문에 이른바 한국정치를 지역대립구도로 몰고 간 것이냐, 아마 그런 논란일 것"이라고 말했다.

YS는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1992년 대선에서 33.8%를 획득한 DJ를 누르고 42.0% 득표율로 14대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DJ는 대선에서 패배하자 국회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1995년 7월 DJ는 정계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게 된다. 이후 DJ는 김영삼 정부 말 초래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속에서 치러진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에서 DJP 공조를 통해 40.3% 득표율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DJ의 임기 중 제1 과제는 김영삼 정부에서 초래된 IMF 외환위기 극복이었다.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 이후 갈라선 양김은 2009년 DJ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국민들에게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YS는 DJ가 대통령이 된 뒤 "김대중 대통령은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고 날선 비판을 가했으며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서는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깎아내렸다. DJ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명박 정부를 "독재"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판하자 "이제 그 입을 닫으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YS가 2009년 죽음을 앞둔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들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고 언급하면서 양김이 극적으로 화해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DJ의 비서실장 출신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23일 TBS <열린아침 김만흠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YS가 지난 2009년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던 DJ를 문병왔던 사실을 언급하며 "그때는 이미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중환자실에 계셨기 때문에 누구도 면회를 못하셨다"며 "그래서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이희호 여사님과 차를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주로 말씀을 하시고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듣고 계셨는데 우리는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고 때로는 협력도 하고 경쟁도 했다, 세계에 이런 사례는 없다, 라고 하면서 세계적 사례를 드시더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그렇게 하고 내려 오셨는데 기자 분들이 현관에서 사과를 하셨느냐, 그러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사과를 했다, 하면서 말씀하시는 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접 대화를 나눈 것으로 말씀을 하더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험난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YS와 DJ가 모두 서거해 '양김(兩金) 시대'가 끝이나면서 민주화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전 의원은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민주화의 단계는 넘어섰다는 것은 아직은 성급한 것 같다"며 "왜냐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과거처럼 내 손으로 대통령 직선을 한다든가 내 손으로 대표자를 뽑는 것을 넘어서서 최소한 국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인권이라든가 여러 가지 권리를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그 다음에 중앙권력도 지금처럼 과도하게 중앙에 집중될 것이 아니라 지방분권이나 국토균형개발 같은 철학들이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된다고 요구하고 있으시니까, 아직은 절차적 민주화의 단계가 완성된 게 아니다, 실질적인 민주화로 가야 된다는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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