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까지 들었다. “더민주당이 호남을 포기하는 대신 중원을 얻는 전략을 선택했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선거 끝나면 사후 분석들이 봇물인 것 까지는 이해한다. 그래도 이 정도 되면 낯 뜨거운 상상력이자, 지나친 입방아다. 9회말 쓰리아웃 경기 종료까지 다 본 뒤 “7회에서 감독이 이렇게 했어야 했다”느니 “그때 그래서 졌다”느니 하는 사후약방문이자, 하루 다 지내보고 저녁이 돼서야 일기예보하는 꼴이다.

호남을 포기한다고 중원이 얻어진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제1야당이 자신의 뿌리이자 지지 기반의 토대인 호남을 왜 미리 포기하겠는가. 어떻게 그것을 ‘전략’으로 택할 수 있겠는가. 억지다.

정권심판과 제1야당의 괴멸은 막아야겠다는 야당 지지자들의 위기심리가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강하게 결집되면서 나타난 선거혁명을 “더민주당의 전략” 운운하는 것은 유권자의 선택에 대한 모독이다. 사후 분석은, 드러난 데이터에서 표심을 읽어 향후 현실정치에 정확히 반영하도록 구조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번 선거결과를 집약하라면, 제1당을 바꿔버릴 정도로 분노한 민심의 집권세력 심판과, 그 결과로 과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대참패를 새누리당에 안겼다는 것과, 지역할거주의 균열의 본격화, 기존 지지정당에 대한 호남의 집단적 반발이다. ‘인물 키워드’로는 안철수, 김종인, 박근혜 대통령, 유승민으로 압축하고자 한다. 새누리당 대참패 원인을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청와대의 국정운영에 대한 경고장이라고 본다.

호남은 이번 선거에서 단지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안철수 사이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이곳의 여론 동향은 호남 출신들뿐만 아니라 비호남 야권 지지자들에게 ‘어떤 야당을 만들어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다.

호남 표심이 이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최근 20년의 대선과 총선 등 전국 단위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일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그 영향의 방향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전에는 호남 표심이 수도권 등 타지의 호남 출향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 동조화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반대였다. 국민의당의 호남 석권이 확실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호남 출향 사람들에게 모종의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이 더민주당 후보에게로 표를 집중시키는 또 다른 전략투표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문재인 전 대표 등의 “될 가능성 높은 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 정권을 심판해 달라”라는 호소도 조금이나마 영향은 미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이 어디 수 십만 명 모아놓고 유세하는 옛날식 선거던가. 미디어와 SNS, 메신저를 통한 소통이 광대역성으로, 그리고 광통신성으로 이뤄지며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은 한참 지난 구문이니 재론하지 말자.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60대 이상은 국정운영에 대한 실망감과 새누리당 공천 파동에서 보인 오만-독선에 대한 염증을, 소극적으로는 기권, 적극적으로는 지지 정당 교체로 표현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호남이 정말로 더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을까, 아니면 회초리 정도인가. 향후 최대 관심사다. 사실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집단 정서에 기반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엊그제 끝난 총선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단지 그 일단을 조심스레 예측할 뿐이다.

더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을 “정권심판은 모르겠고 제1야당 너나 혼내줘야겠다”라는 걸로 치환하는 것은 근거가 약해 보인다. 또, 그동안의 소외에 대한 집단 한풀이로 해석하는 것 역시 본질을 비켜가는 것이다. 호남 전체로 국민의당 후보 지지율은 평균 48%, 더민주당 후보 지지율은 42%다. 8%p 차이다. 이전 민주당 계열 후보들의 평균지지율은 65% 선이었다. 의석 숫자로는 석권이지만, 국민의당이 압도했다고 단정하기도 애매한 수치다. 정권심판보다 야당심판이 강한 게 아니라는 반증으로는, 호남지역에서 새누리당에게 두 석을 주긴 했지만 새누리당 지지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라는 점이다. 결국 호남의 이번 선택은 ‘더민주를 오매불망 지지하는 게 아니다, 잘못하면 언제나 회초리를 든다’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이번에는 회초리가 몽둥이로 커졌다.

또 하나. 국민의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호남자민련화로 인한 고립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승인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과도하다고 본다. 김대중-노무현 두 번의 집권을 통해 연대의 힘을 확인한 마당에 고립을 자초하면서 까지 호남자민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일반행동론’상 추론 근거가 약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혁명급 결과를 남기고 선거는 끝났다. 말로만 표심 표심…할 게 아니라는 교훈과 함께. 정치인이건 관전자이건 함부로 민심 운운하지 말라는 게 이번 총선의 또 하나 경고이다. 1년 반 뒤면 총선보다 더 큰 대선이다. 풀어야 할 숙제는 이미 주어졌다.

이강윤. 언론인 (lkypraha@naver.com)
전) 동아일보 기자. 문화일보 부장.
전) <이강윤의 오늘>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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