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추천 총리’, ‘임기단축 개헌’ 등의 정치적 덫 ‘촛불’로 막아내

[폴리뉴스 정찬 기자] 11월 시민혁명의 힘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됐다. 도도한 촛불 민심의 박 대통령 즉각적인 하야(下野) 요구에 밀려 국회는 9일 오후 탄핵 ‘찬성 234표 대 반대 56표’로 박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 질풍노도와 같은 ‘혁명(革命)’의 파도는 하야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거부한 박 대통령을 ‘탄핵의 심판대’에 올리는 1차 목표점을 찍고 이제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의 압박의 강도를 높여 나갈 기세다. 이와 병행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도 압박을 행사해 박 대통령을 헌정 사상 최초로 국민의 힘으로 ‘파면(罷免)’시키는 역사적 선례를 남기려 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난 최순실 태블릿 피시(PC) 보도가 있은 10월24일 저녁을 기점으로 불타 오른 ‘광장 민주주의’는 이후 지금까지 약 한 달 반 동안 ‘하야 정국’의 중심에 섰다. ‘혁명적 민심’이 박 대통령과 전면적으로 맞서는 상황이 연출됐고 정치권은 민심의 요구를 추종하기에 바빴다.

‘촛불 민심’을 맞선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성난 민심을 잠재우려 했고 정치권을 분열시켜 ‘민심’과 ‘국회’를 분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국민들은 6차례의 촛불집회로 정치권을 제압하고 통제했다. 정치권이 박 대통령의 정략으로 인해 민심과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가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길로 가도록 강제했다.

JTBC보도가 나간 직후부터 박 대통령 ‘하야’로 결집한 민심은 결연하고도 단호했다. 10월25일 박 대통령이 1차 담화를 통해 최순실 국정농단을 “순수한 마음”에서 대선 무렵 잠깐 행한 ‘사소한 일’이었다고 변명하자 10월 29일 2만 명이 모인 광화문 1차 촛불집회로 맞섰다. 박 대통령 퇴진을 향한 거대한 ‘시민혁명’의 출발이었다.

박 대통령의 1차 담화를 엄중하게 질책하는 1차 촛불집회에 박 대통령 뿐 아니라 정치권도 당황했다. 머뭇거리던 야권은 점차 박 대통령 퇴진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가면서 ‘박 대통령의 2선 후퇴’, 내각총사퇴, 거국중립내각 구성 등을 요구해 들어갔다. 또한 새누리당 비박계도 민심의 흐름에 맞춰 박 대통령에 대한 공세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朴 2차 담화 좌절시킨 3차 촛불, 총리 추천 덫 걷어찬 100만 4차 촛불

1차 담화가 민심의 역풍을 야기하자 박 대통령은 11월2일 야권인사로 분류되는 김병준 총리 후보자를 지명함과 아울러 4일 2차 담화를 통해 자신이 검찰수사와 특검을 받겠다는 입장을 통해 민심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최순실’ 개인의 비리로 선을 그으며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이 든다”는 식의 감성적 화법으로 ‘민심’을 잠재우려 해 오히려 역풍을 자초했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태도는 성난 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11월5일 열린 광화문 2차 광화문 촛불집회에 20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 대통령의 하야의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박 대통령 2선 퇴진’ 주장에 머물던 야권은 2차 촛불집회를 계기로 ‘박 대통령 퇴진’ 쪽으로 방향키를 틀었다. 이재명, 박원순, 안철수 등 야권의 대선주자들은 2차 촛불 집회 전에 박 대통령 퇴진 요구를 분명히 했다.

2차 촛불집회에 놀란 박 대통령은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해 ‘촛불 민심’이 정치권과 결합하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11월8일 국회를 찾아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국회에서 국무총리 후보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국회에 ‘총리 추천’이란 ‘미끼’를 던진 것이다.

야권은 ‘총리 추천’이란 미끼 앞에 흔들렸다. 야3당 공조도 균열의 기미를 보였다. 국민의당은 ‘황교안 대행체제’는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총리 추천 국면으로 넘어갈 경우 총리 후보자 인선, 인사청문회 등으로 가면서 ‘박 대통령 하야 전선’은 흐트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총리 추천’의 ‘덫’을 걷어찬 것은 11월12일 100만 명이 모인 3차 촛불집회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박 대통령 하야로 결집하자 정치권은 ‘총리 추천’이란 당근을 포기했다. 11월14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박 대통령과의 단독 영수회담 추진을 무산시킨 것도 단호한 민심의 힘에 기반했다.

朴 버티기에 엄중 경고한 4차 촛불, ‘탄핵’요구로 결집한 5차 촛불

촛불민심의 압박에 야권은 ‘총리 추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 퇴진으로 결집력을 높여갔고 박 대통령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차관 인사들을 단행하며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며 ‘민심’에 맞섰다. 박 대통령은 내 고집이 이기나 국민이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11월19일 쉬어가는 4차 촛불집회에 전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다시 ‘촛불’을 들었다. 박 대통령의 버티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하야 거부 의사를 확인한 ‘촛불 민심’이 4차 촛불집회를 계기로 국회에서의 ‘탄핵’ 주장을 제기한 점도 주목됐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일 검찰의 최순실게이트 중간수사 발표였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으로 적시되면서 민심은 하야를 거부하는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게다가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가 검찰의 수사를 두고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이라고 반발하면서 ‘차라리 탄핵하라’고 오만하게 국민들과 정면으로 맞서자 민심은 더욱 분노했다. 박 대통령 또한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재가 및 인사권 행사를 통해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의 뜻을 무시하기조차 했다.

국민은 11월26일 5차 촛불집회에 3, 4차 촛불집회 참석 인원의 2배 가량 되는 190만 명이 모여 박 대통령의 뜻에 대응했다. 이 5차 집회에서는 박 대통령을 국회에서 탄핵하라는 목소리가 광장을 메웠다. 그 결과 야3당은 12월2일에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겠다고 합의했다. 여기에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도 동참의 뜻을 밝힘에 따라 탄핵시계는 본격 작동됐다.

朴 ‘여야합의 임기단축 꼼수’에 흔들리던 비박계 다잡은 6차 232만 촛불

“차라리 탄핵하라”던 박 대통령 쪽은 이때부터 ‘탄핵’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11월29일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는 야3당과 새누리당 비박계가 결속된 ‘탄핵 대열’을 흩트리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덫’이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진퇴문제를 ‘여야 합의’로 미뤘다. 여기에 ‘임기단축’이란 말로 ‘개헌’이란 함정도 팠다. 먼저 대통령직 퇴임을 두고 국회가 정하는 것 자체는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고 설사 합의한다 해도 대통령이 이를 퇴임 시점에 번복하면 그만이기에 실효성이 없다. 다음으로 정치권이 ‘개헌’을 통한 임기단축을 모색할 경우 ‘탄핵 정국’이 ‘개헌문제’로 이해 뒤죽박죽이 되는 것도 노렸다.

이에 박 대통령의 3차 담화는 탄핵을 피하기 위한 ‘꼼수’로 낙인찍혔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국회 추천 총리’ 제안 때처럼 또 흔들렸다. 새누리당 비박계가 2일 탄핵 표결 대오에서 이탈했고 국민의당도 탄핵 표결을 미루기로 했다.

새누리당은 또 ‘4월 퇴진과 6월 대선’을 당론으로 정해 박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 ‘탄핵’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로서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를 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4월까지 버티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향후 내친 김에 퇴진 거부까지 할 수 있는 여지까지 챙겼다.

그러나 이러한 박 대통령의 ‘정치적 술수’를 좌절시킨 것은 3일 6차 촛불집회였다. 6차 집회는 쉬어가는 주말 집회라 많은 인원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음에도 전국에서 232만 명의 국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 대통령의 3차 담화가 ‘탄핵’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것을 꿰뚫은 ‘촛불 민심’이었다.

이 6차 촛불집회는 박 대통령의 정치적 꼼수를 좌절시키면서 새누리당 비박계를 다시 탄핵 대오로 복귀하도록 했다. 비주류 모임인 새누리당 비상시국회의가 9일 탄핵 표결로 방침을 굳혔고 새누리당도 ‘4월 퇴진, 6월 대선’이란 당론도 접었다. 바로 이 시점부터 탄핵은 되돌릴 수 없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최경환 “역사적 죄인” 등 일부 친박핵심 저항에도 압도적 가결

박 대통령은 6일 긴급하게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와 만나 어떻게든 탄핵시계를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새누리당이 접은 4월 퇴진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뒤늦게 밝혔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결국 박 대통령은 탄핵을 각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일 탄핵 표결까지 5천만 국민들과 정치권, 청와대 모두가 긴장했다. 친박계 최경환 의원은 탄핵이 가결되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고 홍문종 의원은 탄핵 반대세력의 역풍을 맞을 것이라며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탄핵 가결로 가는 역사적 물결을 막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친박계 의원 중 약 30여명이 이탈해 ‘234표 대 56표’의 압도적 결과를 낳았다.

박 대통령은 9일 오후 5시 청와대에서 국무위원 간담회를 열어 “헌재와 특검 수사에 담당하게 대응하겠다”면서 자신의 대통령직 복귀의지를 드러냈고 최재경 민정수석 후임으로 세월호 특위 활동을 방해한 조대환 변호사를 임명에 민심과 맞서겠다는 결기를 보였다. 그럼에도 이날 오후 7시3분에 국회 탄핵 의결서를 전달받으면서 직무정지의 길은 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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