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통합’과 ‘정치교체’ 내세우며 보수의 아이콘 자임

반기문 전 총장은 대선후보군 중에서 현재 지지율 2위를 차지하고 있고 보수층 유권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진=YTN캡처]
▲ 반기문 전 총장은 대선후보군 중에서 현재 지지율 2위를 차지하고 있고 보수층 유권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진=YTN캡처]
[폴리뉴스 이명식 논설주간]지난 1월 12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귀국 일성으로 “통일된 나라를 하나로 묶어서 세계일류국가로 만드는 의지라면 제 한 몸 불사를 각오가 돼 있다”고 밝히며 대권도전 의사를 분명히 했다. 참여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고 지난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으로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력을 쌓았던 그가 대권 도전을 위해 ‘정치 신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1944년 생으로 한국 나이로 74세이고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 거주하지도 않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직 도전의사를 밝힌 것은 무엇보다도 외교관으로서의 입지전적인 성공신화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의 살아온 이력을 요약하면 충북 음성에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했고, 중학교 3학년 시절 이후에 <타임>지로 영어공부를 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하여 외무고시를 패스했고, 전두환 정권 이후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외무부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승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6년 10월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되어 2016년 12월 퇴임 시 까지 유엔 사무총장 직을 역임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은 대선후보군 중에서 현재 지지율 2위를 차지하고 있고 보수층 유권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은 앞으로 그가 어떤 길을 걸어 갈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삶의 족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1962년 충주고등학교 재학 당시(사진 가장 좌측) 미국적십자사의 주최로 워싱턴에서 개최된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Operation VISTA in USA)'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참석했다.[사진=대한적십자]
▲ 반기문 사무총장은 1962년 충주고등학교 재학 당시(사진 가장 좌측) 미국적십자사의 주최로 워싱턴에서 개최된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Operation VISTA in USA)'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참석했다.[사진=대한적십자]

1970년 서울대 졸업식때 가족들과 함께
▲ 1970년 서울대 졸업식때 가족들과 함께


성장기 - 공부 잘하는 모범생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944년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차마을에서 부 반명환과 모 신현수의 3남 2년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반 전 총장의 조부는 한의원을 운영했고, 부친 고(故) 반명환 씨는 농고를 나와 통운회사를 경영했다고 한다. 숙부 반필환 씨는 충주 부시장을 지낸 공무원이었다. 반기문 전 총장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은행원 약사, 교사 등 전문직에 종사했는데 그 중 남동생 반기상 씨(전 경남기업 고문)는 조카 반주현(전 클리어스인터내셔날 이사)와 함께 뇌물죄 혐의로 미국 뉴욕 맨하탄 연방법원에 기소된 상태이다. 반기상씨와 반주현씨는 2014년 베트남에 있는 경남기업 소유의 복합빌딩인 ‘랜드마크 72’를 매각하려는 과정에서 중동의 한 관리에게 50만 달러(약 6억원)의 뇌물을 건네려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 일가는 1948년 충주로 이사했고, 반 전 총장은 충주 교현초등학교, 충주 중학교,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중학 3학년 이후 <타임>지로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1년에는 미국 적십자사가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얻었고, 1962년에는 비스타(VISTA: 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접견했으며 이를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탄탄대로를 걸었던 외교관 시절

1963년 충주고 졸업과 동시에 자신이 뜻한 바대로 서울대 외교학과를 입학했고 1970년에는 외무교시 3회에 합격하여 직업 외교관의 커리어를 쌓게 된다. 1971년 충주여고 학생회장 출신인 유순택 씨와 결혼했고, 이듬 해 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고 주뉴델리 영사관의 부영사로 부임했다. 연수원을 수석으로 마쳤는데 첫 임지로 인도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위험지역 특별수당과 생활비를 절약해서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 시절 당시 인도 총영사관으로 있던 노신영 전 총리와 만나 지금까지 맨토로 모시면서 인연을 이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은 외무부에서 순탄하고 성공적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1985년 노신영 국무총리는 당시 미국 연수중이던 반기문을 이사관으로 파격 승진시켜 의전 비서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 해 4월 80년대 비밀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반기문 전 총장이 미국 하버드에서 연수를 받던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과 관련된 민감한 시기에 본국으로 DJ 동정 보고를 올린 사실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 이후 반 전 총장은 외무부의 요직인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을 거쳤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에는 외무부 제1차관보를 거쳐 대통령 비서실 의전수석 비서관과 외교안보 수석으로 재임한 이후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는 외교통상부 차관에 올랐다. 

하지만 외교통상부 차관에 오른 후에는 위기가 찾아왔다. 2001년 한국과 러시아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협정을 준수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문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당시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추진 중이던 미사일방어(MD)체제에 반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한미관계가 악화될 상황에 처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차관 직에서 물러난 반 전 총장은 2001년 당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을 맡았을 때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차관보다 의전서열이 낮은 직위로 관례에 맞지 않은 인사였지만 자신은 한승수 장관과의 오랜 인연이 가져다 준 행운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후 유엔 본부대사를 역임한 이후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외교보좌관을 맡은 다음 2004년 외교통상부 장관에 올랐다. 

2006년 1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UN사무총장[사진=청와대사진DB]
▲ 2006년 1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UN사무총장[사진=청와대사진DB]
반 전 총장은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관료사회에서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교수 출신으로 노무현 후보의 외교고문으로 역할했던 윤영관 교수가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고 자신은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거쳤던 외교정책보좌관 직책을 맡았던 것인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후일 인터뷰를<반기문과의 대화 톰 플레이트 저> 통해 밝힌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있었고 또 외교부 관리들이 노대통령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었는데 그 책임을 지고 윤영관 장관이 사임을 했고 그 자리가 그에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자신이 만약 첫 번째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다면 그때 물러나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유엔 사무총장으로 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도 밝히고 있다. 반 전 총장이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이 되자 부시 행정부의 핵심 관리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할 정도로 그는 외교부 내에서도 대표적인 친미인사로 알려져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은 장관 재직 시절, 외교 역량에서는 상당한 평가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자신의 회고록인 <칼날 위의 평화>에서 ‘2004년 1월 반기문 장관 이후 부터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NSC 사무처와 외교부는 밀월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찰떡궁합으로 협력하며 숱한 외교 안보 현안들을 함께 풀어나갔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반기문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추천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반기문 장관은 재임하면서 미국 고위 당국자와 만난 일에 대해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를 누락하여 공개적인 질책을 받기도 하는 등 지나치게 친미적인 색채를 보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특히 용산기지 반환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선언한 이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의식하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한미 FTA 협상 등에서 미국에 양보를 시사하는 등 외교정책의 수정마저 감수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된다.  

유엔 사무총장 출마와 당선, 업적과 실패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으로 재직했던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노무현 정부가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2006년 2월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 출마를 공식선언 하던 시점에는 노무현 정부가 내세울 외교적 업적은 9.19 공동성명 이외에 별 다른 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무현 정부에서 반기문 장관을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2006년 10월, 범정부적 차원의 지원을 얻어 대한민국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된 이후 2011년 재선된 이후 지난 2016년 12월 퇴임에 이르기까지 10년간의 유엔 사무총장 재임 기간 어떤 평가를 얻었을까? 외신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친미적인 사무총장”, “투명인간(invisible man)"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 인류의 평화와 약자의 인권 보호, 가난한 나라의 개발, 기후변화 대처, 양성평등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10년이라 자평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동안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던 분야는 지구 온난화 이슈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반기문 총장은 취임 직후부터 기후 변화 문제에 집중했고 이를 자신의 간판 이슈로 삼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015년 6월에 유엔 파리기후변화회의를 개최하고 세계 1,2위 오염물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국가들이 서명한 파리기후변화협정을 채택한 것은 길이 남을 성과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국제사회로부터 평가를 받은 사례는 2011년 초 코트디부아르 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분쟁을 성공적으로 조정한 일일 것이다. 2010년 11월에 치러진 코트디부아르 대선에서 선거관리위원회는 야당 후보인 알라산 와타라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현직 대통령이었던 로랑 그바그보 측이 헌법위원회를 장악하여 무효화하고 그바그보의 당선을 발표하면서 두 명의 대통령이 탄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와타라 측을 지지하고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유엔 평화유지군(UNOCI)을 파견하여 그바그보가 은신해 있던 대통령 궁을 공격하여 유엔군 공격 당일인 4월 11일 그바그보를 체포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유엔군을 파견한 것은 ‘정부군의 공격으로 민간인이 학살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반기문 사무총장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2011년 6월에 사무총장 재선이 확정되었던 것은 그 직전에 단행된 코트디부아르 사태 해결이 국제 사회에 긍정적인 평가를 얻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을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재임 시기에 발생했던 수많은 일들 중에 반 전 총장 스스로가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들이 적잖게 있다. 스리랑카 내전(2008년 1월 스리랑카 정부 휴전 협정 일방 파기 ∼2009년 5월 내전 종식 선언) 중에 유엔이 개입해서 양측을 중재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현지에 파견되어 있던 직원들마저 철수시켰다. 유엔 직원의 철수는 ‘주둔에 의한 보호’라는 유엔의 최소한의 존재 이유를 저버린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엔 직원들이 철수한 이후 정부군이 행한 타밀족 반군과 민간인 학살은 <스리랑카의 킬링필드>로 일컬어질 만큼 잔혹한 참상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스리랑카 현지를 찾았던 반기문 총장은 스스로 내전 대응에 실패했음을 인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경을 넘어선 범위의 전염병을 방제하는 것은 유엔의 목적 중 하나이다. 그런데 반기문 총장 재임 기간인 2010년 아이티에서는 유엔이 파견한 평화유지군이 전염병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0년 최초로 콜레라가 발생한 이후 2016년에 이르기까지 인구 1,000만 명 정도 되는 아이티에서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9,500명에 달하고 감염자는 80만 명에 이르렀다. 아이티는 수십 년 동안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어 유엔에서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2010년 1월 아이티에 대지진이 덮치자 파병 규모는 더욱 늘어났다. 

그렇게 증원된 병력 중에 네팔군 부대가 포함이 되었는데 이 부대가 주둔지 인근 아르티보니트 강에 버린 하수가 콜레라 감염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엔이 네팔군을 현지에 파견하기 이전에 해당 군인들에 대해 사전 역학조사를 철저하게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참극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유엔군 부대가 발병의 원인이 아니라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지만 프랑스의 <AFP> 통신이 입수한 역학 보고서에 의하면 네팔군 캠프가 콜레라 진원지가 맞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은 역병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역병의 확산 이후에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2016년 12월 퇴임을 앞두고 아이티 국민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는데 사태 발생 이후 만 6년 2개월이 경과한 이후였다. 반 전 총장이 퇴임을 앞두고 사과를 한 것은 자신의 대선 출마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반 전 총장이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콜레라 피해보상에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는데 이는 수백억 달러에 달할 보상액의 30%가량을 책임져야할 미국의 입장 때문이라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이밖에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사태도 반기문 전 총장 스스로 2016. 12.16 가졌던 퇴임 직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총체적 실패‘라고 자인할 정도로 아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 중에 러시아와 중국 등은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를 지원하고 미국은 반군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유엔은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외교관 시절부터 반반(潘半) 또는 기름장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반반이란 별명은 양측을 다 고려하고 어느 쪽과도 척을 지지 않는 외교관 기질의 반영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기회주의적인 품성이라는 악평도 있다. 화법도 반반화법을 구사한다고 하는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식의 어법이라고 한다. 기름장어라는 별명은 언론과의 접촉에서 요리 저리 잘 빠져나가고 책잡힐 발언을 하지 않고 핵심을 피해간다고 외국기자들이 붙인 별명이라고 하는데 스스로 그런 평가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의 언론대처법인 셈이다. 이런 화법이나 요령으로 외교관 생활을 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험난한 과정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고 집행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좌고우면 하는 반반식의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귀국하면서 한 몸을 불사르겠다는 표현을 거듭했는데 얼마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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