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의 상소에 나타난 인문정신

500년 전 토정이 지금을 말한다- 장용기(목포mbc 편성제작부 부국장)

[폴리뉴스=홍정열 기자]

올해 정유년 2017년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태어난 지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이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다간 중종 때부터 인종, 명종, 선조대의 1517년부터 1578년 타계까지 조선시대는 정치 사회적 정변에 이어 자연 재해까지 혹독한 시련이 겹쳤다.

토정이 숨진 14년 뒤 조선은 전 국토와 백성이 유린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심각한 침략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다. 양란에 앞서 조선시대 중앙훈구와 지방 사림들의 잔혹사로 일컬어지는 4대 사화는 이지함이 태어나기 20년 전인 1498년 연산군 대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시작된 무오사화에서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를 둘러싼 갑자사화, 중종 대 조광조의 기묘사화, 명종 대 문정왕후와 소윤세력이 대윤 등 정적을 몰살시킨 을사사화까지 무려 50년에 걸친 훈구와 사림사대부 간의 잔혹한 대립이다.

일부 학자들은 훈구보수와 사림개혁의 격돌로 보면서 결국은 지방사림 개혁세력의 승리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싸움에서 백성의 삶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양반 사대부출신 관료 정치인 그들만의 리그였던 셈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조선의 심장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백성들은 “이게 나라냐”며 왕의 피난길을 막고 궁성에 불을 지르는 등 크게 반발했다. 500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두 번째 대통령 탄핵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촛불 시위와 탄핵을 반대하는 이른바 보수 세력의 태극기 시위가 주말 계속되고 있다. 500년이 흐른 지금도 이게 나라냐는 말이 또다시 튀어나오는 것은 대한민국은 잘 가고 있는가에 대한 역설일 수도 있겠다.

5백 년 전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조선, 그로부터 5백년 뒤 미국과 중국 일본 소련에 낀 대한민국. 이 시대 정치인과 관료들은 대한민국의 방향과 국민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선시대 최고의 컨설턴트였던 토정 이지함 선생이라면 어떤 조언을 줄 것인가 고민해본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예측하는 토정비결의 저자로 인식되면서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역술가라는 인상을 떨쳐낼 수 없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라며 구빈과 북국강병에 목적을 둔 경세사상가이자 전통유학에 기반한 인문사상가였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토정이 인생 말년에 지방정치를 책임지는 1573년 포천현감, 1578년 아산현감에 재임할 당시 선조에게 보낸 두 편의 상소문에 인문정신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 위민과 실용의 인문정신

토정 이지함 선생의 실용적 경세사상의 바탕에는 인문정신이 있다고 본다.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인문정신은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생각을 말한다. 토정 이지함의 인문사상에는 책을 통해서 만이 아니고 자신의 체험과 경험 그리고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서 얻은 살아있는 애민정신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지함 인문정신의 출발점은 역시 유학이다. 이른바 전통유학 원시유학 특히 맹자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위민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사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포천현감 때 올린 상소문에도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맹자의 글을 인용하고 또 어린 아이가 갑자기 우물에 빠지려 하는데 의관을 바로 하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엎어지고 자빠져가면서 구하러 간 선비에게 체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나무랄 수 있느냐는 등 곳곳에서 맹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 지배이념이 엄격한 혈통신분제와 직업신분제를 앞세운 서열과 형식위주의 주자 성리학에 치우치면서 백성들의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순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조선의 지배 이념이 신분이나 직업으로 드러난 것은 본말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배층 기득권 이론에 따르면 본(本)과 말(末)은 하늘이 부여한 본래부터 있어온 전통이기에 절대 바뀌거나 합쳐질 수 없는 대립의 개념이다.

농(農)은 본이고 공업과 상업은(工商)은 말이다. 덕(德)은 본이고 재(財)를 밝히는 것은 말이다. 의(義)는 사대부가 본받아야 할 본(本)이고 이(利)는 사대부가 멀리해야 하는 말(末) 이다. 이 본말사상에 따르면 당시의 양반사대부 관료는 가난하고 청빈해야 만이 주자 성리학 이념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지함의 인문 사상은 대립과 배척을 하지 않는 중도 포용의 특징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6세기 중반의 정치경제 상황이 사화는 사화를 부르고 대립은 대립을 부르는 등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본질과는 동떨어진 갈등과 대립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지배이념인 본을 앞세우되, 말로서 본의 부족함을 채우자며 상대를 인정하는 화합(和合)의 정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안으로 생각된다.

이지함은 두 개의 대립된 국면을 보완해 좀 더 승화하는 차원에서 중도적 의미의 상보론(相補論)을 제안하고 있다. 어쩌면 일차적 당면 목표인 백성들의 구빈이라는 본질에 가까운 실용적 인문사상이 더 필요했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2) 중용과 조화의 인문정신

이 같은 실용적 인문정신은 교류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은 중앙훈구와 지방사림,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지만 지함은 이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 16세기에는 조선을 대표할만한 대학자들이 많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화담 서경덕(1489~1546년), 퇴계 이황(1501~1570년), 남명 조식(1501~1572년), 율곡 이이(1536~1584년)가 모두 이때 활동했다.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의 행적과 기록을 보면, 그가 퇴계 이황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먼저 서경덕은 이지함이 23세 되던 때 학문을 배운 스승이었다. 그는 주자성리학의 세계를 벗어난 유학자로서,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중시하는 이지함의 경세지학(經世之學)에 사상적 밑거름을 놓아주었다.

조식과 이지함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산림처사의 삶을 살면서도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자신의 뜻과 포부를 펼쳤다는 기질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뒷날 사헌부 대사헌 이명관은 이지함의 ‘시장(諡狀:죽은 자의 시호를 청하는 문서)’에서 “토정 이지함의 뜻은 화담 서경덕의 고명한 조예(造詣:학문의 깊은 경지)와 남명 조식의 확고한 입지(立志)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지함이 부국안민을 위한 경세지학을 함께 나눈 이는 단연 율곡 이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이 이이와 교분을 시작한 시기는 35세 이전으로 이이의 나이 21세 때라고 할 수 있다.

이이의 기본 사상은 ‘안민지책(安民之策)’으로 이지함이 주장한 ‘부국안민(富國安民)’과 사상적 맥락을 함께 했다.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조선의 정치와 국방 체제와 경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평생토록 사상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어쩌면 율곡보다 나이가 20살 많은 이지함이 선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고위 정치 관료인 율곡 이이를 통해 국가의 개혁을 꿈꿨을 지도 모를 일이다.

3) 애민과 공정의 인문정신

이지함의 포용의 인문정신은 신분관과 직업관으로도 이어진다. 사농공상의 직업군에도 포함되지도 않은 바닷가 뱃사람을 자기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최고의 인물로 꼽았는가 하면 서얼과 천민 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자가 있으면 제자로 삼거나(서얼 출신 서기) 천인의 명부에서 빼내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전남 좌수영의 노비 김순종)

또 이지함 자신은 양반신분에도 서슴없이 장사 활동에 나섰는가 하면 패랭이와 삼베옷, 짚신의 양반답지 않은 양반 차림 등등은 신분 서열 등 사방팔방 모든 게 꽉 막힌 조선 시대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화두를 던지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본다.

토정 이지함이 포천 현감 때 올린 상소문 삼대부고론에서 두 번째 인재의 창고를 열자는 내용에서 인재의 차별 없는 적재적소 배치의 중요성을 선조에게 아뢰고 있다.

海東靑使之司晨(해동청사지사신) 則曾老鷄之不若(즉증노계지불약)

汗血駒使之捕鼠(한혈구사지포서) 則曾老猫之不若(즉증노묘지불약)

해동청 매에게 새벽을 알리는 일을 시키면 늙은 닭만도 못한다.

한혈구 말에게 쥐 잡는 일을 시킨다면 늙은 고양이만도 못한다.

올해 대통령 탄핵정국이 마무리되면 제19대 대통령 선거로 곧바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는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다. 계층갈등과 세대갈등, 보수와 진보, 지역갈등의 내우에다 남북갈등과 미중일소의 4대 강국의 국제 이해관계까지 첨예하게 맞물리는 외환까지 겹치면서 대한민국의 국격과 외교는 실종됐다는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정치인들이라면 5백 년 전 토정 이지함의 애민과 위민 정신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김용덕, 남만성, ‘토정집’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1985.

김용덕, ‘이지함의 경제사상’ 『한국의 사상』열음사, 1984.

한정주, 토정 이지함-중상주의 통해 부국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2007.

신병주,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이태복,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동녘, 2011.

고석규, 고명진, 한국사 속의 한국사2, 느낌이 있는 책, 2016.

홍정열 hongpen@pol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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