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의 ‘숙명’ 같은 인연, 원조친박 →탈박 →비박 →배신의 정치인 →탄핵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유학시절의 유승민 의원[사진=유승민 캠프 제공]
▲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유학시절의 유승민 의원[사진=유승민 캠프 제공]

[폴리뉴스 정찬 기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을 언급할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 꼬리표. 박 전 대통령은 유승민 정치의 출발점이자 전환점이었고 현재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유승민 자신이 대구경북(TK)과 보수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이상 박근혜와 묶일 수밖에 없었고 박근혜를 극복해내야만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정치 초년생 시절엔 원조친박의 길을 걸었고 18대 대선 후는 탈박’, 박근혜 정부 출범 후부터는 비박으로 분류됐고 20157월 공무원연금법 파동을 계기로 배신의 정치인으로 낙인찍혔다.

유승민 의원의 정치 입문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발탁이 있었지만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는 데는 박근혜의 도움이 컸고 그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이후부터는 박근혜로부터의 독립투쟁이 핵심이었고 그 과정에 유 의원은 보수진영 내 박근혜 대립물로 자리 잡았고 지금은 갈 곳 잃은’ TK와 보수층에서 박근혜 대체물로 될 수 있을지 여부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그러나 유 의원에 대한 평가 속에는 박근혜반사체라는 지적도 있다. 20157월 박 전 대통령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다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난 때, 그리고 20164월 총선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배제 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당시 유 의원이 보수진영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박근혜의 반사체였기 때문이란 해석이다.

그래서 박근혜의 몰락이 유승민의 정치적 부상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박 전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 당하고 지난 310일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선고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유 의원의 정치적 존재감이 드러나기보다는 약해지는 경향을 보면 이는 아주 틀린 지적은 아니다.

유 의원의 최근 2년 사이의 정치적 부상은 대중을 휘어잡는 자신의 소통능력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대통령 당선 이후 독주하는 박 전 대통령의 실정을 바로잡아보려는 TK와 보수층의 심리가 투사된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보수층이 보기엔 합리적인 유 의원이 박 전 대통령을 견제할 인물로 보고 힘을 실어줬다고 볼 수 있다. 총선에서 박근혜로부터 내침을 당한 유승민을 구한 대구민심의 전형은 여기에 있었다.

이는 유 의원의 대중적 정치기반이 취약하다는 말도 된다. 최근 대선주자로서 대중강연을 활발하게 하면서 자신의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가 국민들에게 정치적으로 각인된 시점도 지난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맡아 박 전 대통령에게 각을 세울 때부터다. 그가 대중정치인으로 주목받은 게 불과 2년 정도라는 얘기다.

이는 지금 유승민이 극복해야만 하는 숙제다. 유 의원은 이번 대선국면에서 박근혜 반사체가 아닌 스스로 대중을 모으는 발광체로서 면모를 보여줄지 여부가 관건이다. 어쩌면 지금이 유승민 정치의 승부처처럼 보인다.

샌님은 아니지만 엘리트 코스를 걸은 젊은 시절

유승민 의원은 자신의 삶을 담은 자서전을 내놓질 않아 그의 삶의 행로, 정치적 가치 형성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언론을 통해 파편적으로 드러난 그의 젊은 시절은 대한민국 엘리트 코스를 순조롭게 밟아 정치에 입문한 것을 알 수 있다.

유승민은 판사출신에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유수호(2015년 작고)와 강옥성 여사 사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의 고향은 경북 영주이지만 그는 대구 삼덕동에서 출생한 대구 토박이다.

그는 대구에서 삼덕초등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이 판사로 일해 일반 가정보다는 유복한 생황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 의원은 당시 배가 고파본 적은 없지만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중이염을 앓아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어머니가 선물로 들어온 영화표를 팔다 암표 단속에 걸려 경찰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하니 부유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유승민은 1958년에 태어났으나 한 살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입시를 치러 대구 경북고로 진학했다. 그의 고교 동기로 친하게 지낸 인물은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 주성영 전 의원, 류성걸 전 의원, 권오을 전 의원 등이 있었다.

판사 아들인 유 의원은 공부만 열심히 하는 샌님일 것으로 상상되지만 실제로는 교우관계의 폭이 넓은 괘남이었다고 한다. 그는 경북고 안에서도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가입한 청록이라는 서클에서 활동했지만 음성 서클인 광풍이나 문학 서클 길동지회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려 다녔다.

동문의 전언에 따르면 성적에 따라 친구를 사귀는 일반적인 경향에도 유승민은 퇴학 당한 친구와도 가깝게 지내는 독특한 성품을 지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5년 한 친구가 선생에게 부당하게 구타를 당해 경남 합천 해인사로 가출하자 그를 찾으러 자신도 돈 3만원을 들고 가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학창생활에도 그는 1976년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전국 차석의 성적을 거뒀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 2학년 때 경제학과 전공을 선택했고 재학 중 군대에 입대해 육군수도방위사령부에서 복무 후 전역했다.

군 복무 후 학교에 복학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미국 위스콘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87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주전공은 산업조직론, 부전공은 수리경제학과 계량경제학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유승민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수석연구위원으로 12년 간 일했다. KDI에서 연구위원 시절 연구원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과 만나 사수-부사수 관계로 일해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이 바탕이 돼 정치에 입문한 이후 이 의원과는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고 있다.

이처럼 젊은 날의 유승민은 전형적인 엘리트로서의 길을 걸은 것만은 분명하다. 1970년대 말 대학가를 휩쓸던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에는 거리를 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시절에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젊은 시절 삶의 영향으로 정치에 입문한 여타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경제전문가로서 전문가 영입케이스로 발탁된 정치인에 가깝다.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과 함께한 유승민 의원
▲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과 함께한 유승민 의원
다만 부친 유수호 전 의원의 존재가 정치인 유승민이 단순한 전문가에서 머물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유 전 의원은 판사 시절인 1971년 박정희 정권 반대 시위를 주도한 운동권 학생을 석방시킨 게 빌미가 돼 1973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한 법조인이다. 당시 석방된 부산대 정외과 4학년 학생이 훗날 행정자치부 장관이 된 야당 정치인 김정길 전 의원이다.

또 유수호 전 의원은 19714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지역 개표 결과를 조작한 ‘4·27 개표조작 사건에서도 윤동수 울산시장과 울산시 공무원들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현직 부장판사가 대통령 선거의 개표에 부정이 있었다는 것을 온 나라에 알린 사건이 됐다. 유승민의 부친 유 전 의원과 박근혜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간에 깊은 악연이 존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유 전 의원은 1973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 때가 유승민이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가족으로서 그 당시 상황을 똑똑히 목격했을 것이며 자신의 부친과 관련 이 부분에 대한 기억을 정확히 표현한 것을 보면 이것이 유 의원의 향후 정치적 행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만은 분명하다.

유 전 의원은 이후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과 대한변협 부회장를 거쳐 5공 시절인 1985년 민정당 대구 제1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들어가 13, 14대 의원을 역임한 후 15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유 의원 가족들도 법조에 몸을 담고 있다. 형인 유승정 변호사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창원지법 법원장을 거쳐 서울남부지방법원장을 끝으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유승민 의원의 매형 역시 법조인 출신이다. 누나 유진희씨의 부군인 김진기 변호사는 대구고법 법원장으로 일했다.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정계 입문, 박근혜와의 인연

미국 유학 후 KDI에 근무하던 유 의원을 2000년에 정계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였다. 당시 유승민은 이미 자신 내부에 정치적 잠재력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는 연구위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내면 속에서 정치적 욕망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에 대해 언론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선거는 유승민과 비슷한 또래의 친척들이 모두 동원된 집안의 큰 행사이기도 했다. 두 번의 선거를 겪으며 현실정치를 경험한 것은 정치인 아버지를 둔 아들이 겪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게 연구원에서 나온 것 또한 정치권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직접적인 배경은 김대중 정부의 산업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한 게 계기다. 그는 이에 대해 당시 저는 정부의 재벌 빅딜정책은 자승자박의 상황에 이르렀다. 백지화해야 한다’, ‘정부가 경쟁력의 본질에 대해 얕게 이해하고 있고, 독점의 폐해에 무관심하다’, ‘정부 강요에 의한 경영권 변동은 훗날 법정 시비를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했는데 이것 때문에 눈 밖으로 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 연구원을 나온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아버지처럼 법조계 출신 정치인이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통해서였다. 이를 계기로 만 마흔 두살이던 20002월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고 했다.

여의도연구소장 발탁은 당시로선 파격적이다. 이 전 총재가 그를 발탁한 것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 의원도 이회창 캠프에서 정책개발, 메시지 담당, 연설 담당 역을 맡아 일했다.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면서 유 의원도 후견인을 잃었다. 20036월에 여의도연구소장도 관 둔 그는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알게 된 대구 출신인 박근혜와의 인연은 새로운 반전의 계기였다. 특히 2004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박근혜가 당 대표를 맡으면서 17대 총선을 치렀고 유 의원은 비례대표로 입성한다.

20051월에서 박근혜 당대표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그해 10월 비례대표직을 던지고 대구 동구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지역구 의원으로 명함을 갈아탔다. 당시 그와 맞붙은 인사는 참여정부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이강철 특보였다.

유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을 맡아 선봉장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박 후보를 도우면서도 공개비판과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경쟁후보인 이명박의 재산문제, 대운하 공약과 비비케이(BBK)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아쉽게 패하고 만다. 이 때의 인연으로 유승민은 원조친박으로 분류된다.

탈박에서 배신의 정치인’, 그리고 박근혜 탄핵

대권도전 선언을 하고 있는 유승민 의원
▲ 대권도전 선언을 하고 있는 유승민 의원
그는 18대 총선서 친박 학살 공천의 칼날을 피했다. 이후 박근혜와의 관계도 데면데면했지만 멀어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친박 좌장이던 김무성 의원의 경우 2009년에 탈박 대열의 길로 갔지만 유 의원은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다 2011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홍준표에 이어 2위로 최고위원이 돼 친박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선관위 디도스 사건 당시 자신이 남경필, 원희룡 최고위원을 설득해 최고위원 동반사퇴를 이끌어냄으로써 홍준표 대표체제를 무너뜨리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근혜 비대위 체제 출범 이후에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틀어졌다. 유 의원은 2011년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들어선 뒤 박 비대위원장의 행보를 공개 비판하는가 하면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도 반대했다. 유 의원은 또 비대위에서 자신을 공천 탈락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봤다. 실제 자신과 가까운 이혜훈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유 의원은 친박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그러던 그가 20152월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박근혜 대 유승민이란 전운이 감돌았다. 그는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근혜 정부의 경제와 복지정책에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던 차에 그해 6월 국회법 개정안을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함께 통과시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박 전 대통령은 곧바로 유승민을 배신의 정치인으로 지목하며 본격적인 찍어내기에 나섰고 유승민은 그해 7월 원내대표직을 사퇴하면서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다고 박근혜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닌 전제군주라고 공격했다.

유승민 대 박근혜전쟁 2라운드는 20163월 새누리당 공천이었다. 유 의원은 현역의원 컷오프 대상이 돼 그의 공천 여부는 전국적인 관심사로 생중계됐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대구를 여러 차례 방문해 배신자 징치를 대구 유권자에게 요구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유승민은 탈당 후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대구가 낳은 정치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3라운드는 박근혜 탄핵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맞이해 유 의원 당시 새누리당 탄핵 찬성대열에서 사실상 탄핵을 주도했다. 그리고 올 310일 박근혜는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헌법과 공화국 정신을 주창한 유승민 의원의 정치적 승리에 가깝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1년 반 전부터 진행된 유승민 대 박근혜전쟁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보수주도권 경쟁이 관건, 대선 승부가 그 출발점

그러나 유 의원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지도자로서 제대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내건 보수개혁의 가치는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있으나 유 의원이 몸담고 있는 보수층이나 TK에서는 평가를 못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오히려 서울에서 인기가 더 있고 여권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야권지지층의 응원을 받는다. 그만큼 유승민은 진보층이 바라는 보수지도자의 기준에 알맞다는 얘기다.

박 전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 유승민은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나 지금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심이 상대적으로 강한 TK정서와 탄핵에 반대하는 보수층이 배신자 프레임으로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유승민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얘기다. ‘박근혜 이후보수층을 결집해낼 새로운 가치와 덕목을 몸소 국민들에게 보여줘야만 하지만 아직 파괴력 있는 정치적 행위로 이를 극복해내고 있진 못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거부감이 가장 덜한 보수지도자가 아닌 보수층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이들과 호흡하고 이들로부터 지지받는 지도자로 거듭나야 하지만 다소 미흡하다. 

지금도 유 의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지도자라기보다는 참모다. ‘자기 정치를 통해 궤멸적인 상황에 빠진 보수가 나갈 지평을 제시해야 하지만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15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보수의 새 지평을 열겠다고 했다. 이는 몇 가지 정책적 대안제시 등으로 하루아침에 뚝딱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정책 이전에 세력화가 관건이다.

유 의원은 319일 대구를 방문해 한국의 보수는 궤멸될 위기, 완전히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대구 시민들이 보수 혁명을 시작해 달라. 이제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해 달라. 저 유승민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의 정치적 미래는 보수 복원의 과정에 달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그가 보수진영 내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의 승부가 보수의 아이콘으로 가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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