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모르는 비주류, ‘저격 정치’로 경쟁력↑…입담과 막말의 사이

자유한국당 대선주자인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MBC에서 열린 MBC 100분 토론 녹화에서 토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div>
▲ 자유한국당 대선주자인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MBC에서 열린 MBC 100분 토론 녹화에서 토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안병용 기자] 비주류. 정치인 홍준표뿐만 아니라 인간 홍준표의 삶 자체가 비주류라는 것이 본인의 얘기다. 그가 지난 2009년 펴낸 자서전 이름이 ‘변방’이다. 변방의 다른 이름이 ‘비주류’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의 비주류 고백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홍 지사는 명문대 법대생으로 출발해 이른바 ‘모래시계’ 검사로 시대를 풍미한 법조인이었으며, 4선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도지사로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년시절과 청년 시절, 검사와 정치인 시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변방에서 보냈다는 것이 그의 자평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장인 홍 지사의 아버지는 시골과 도시를 오가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풍류와 낭만을 즐겼다고 한다. 홍 지사의 말에 따르면 소위 ‘한량’이었다. 홍 지사는 “아버지는 한량으로 평생을 보낸 소위 무능력한 가장이었고, 어머니는 서부경남 일대를 돌면서 머리카락 수집상을 했다”고 회상했다.

홍 지사의 형제는 모두 다섯 명이다. 그는 이남 삼녀 중 차남이다. 먹고 살기 바쁜 홍 지사의 집안 분위기에서 공부는 사치였다. 그러나 홍 지사만은 예외였다. 집안의 대표자 격으로 공부를 했다. 가족들도 적극 밀어줬다. 홍 지사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도 도시로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소위 성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은 홍 지사가 편히 공부하도록 가만두지 못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5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경남 창녕의 남지 국민학교에 첫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 신천‧신암 국민학교, 창녕 국민학교, 합천 학남 국민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다. 같은 학교에서 6년 동안 붙박이로 공부를 하는 다른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전학을 일 년에 한 번꼴로 다니면서도 일 등은 늘 도맡아 했다. 그러나 공부도 먹어가면서 해야 될 터. 배고픔을 면할 길 없던 홍 지사는 점심시간이면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했다.

영남 중학교를 거쳐 영남 고등학교에 진학한 홍 지사는 진로를 군인으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을 공부시키기 위한 가족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도 된다는 것,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안정적인 직장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어린 시절부터 거침없던 성격과 잘 맞는다는 것도 군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됐다. 그러나 장물 취득이라는 범죄 혐의에 연루된 아버지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홍 지사가 육군사관학교 1차 시험에 합격한 1971년 10월경이었다. 홍 지사의 아버지는 혐의를 극구 부인했고, 홍 지사 역시 언제나 곧고 당당한 아버지를 믿었으나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던 아버지는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홍 지사는 결국 결심했다. “육사를 포기하고 법대에 가서 반드시 검사가 되겠다.” 모래시계 검사의 시작이다. 홍 지사 아버지의 혐의는 후에 결국 누명으로 밝혀졌다.

초임검사 시절 홍준표 지사.
▲ 초임검사 시절 홍준표 지사.

홍 지사는 1977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검사로 임관하면서 청주‧부산‧서울남부‧광주‧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재직했다.

홍 지사는 열혈 검사였다. 폭력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수많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 각종 음해에 시달렸으며, 국제 PJ파 수사 당시에는 석궁으로 소리 소문 없이 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를 매일 밤 받았다고 한다.

홍 지사는 강성 검사였다. 서울지검 검사 시절이던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강단 있게 수사해 제6공화국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씨 등 권력 실세들을 구속‧기소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이 사건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작품 소재가 돼 ‘모래시계 검사’라는 애칭을 얻었다.

홍 지사의 원래 이름은 판표(判杓)였으나 1984년 당시 청주지법 판사였던 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이 권유해 준표로 개명했다. ‘준표’는 ‘세인의 표상’이라는 뜻이다.

홍 지사는 1995년 신한국당 김영삼 총재로부터 정치 입문을 권유받아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그해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송파구갑)에 당선됐지만,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2001년 서울 동대문구을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권에 복귀했으며, 같은 선거구에서 17‧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홍 지사는 정치권에서 ‘변방’이었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독고다이’로 정치했다. 야당 시절 ‘대여(對與) 저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잇따라 출마해 특유의 재치로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당내에서는 줄곧 ‘비주류’였다.

2011년 한나라당 당대표로 당선된 홍 지사.
▲ 2011년 한나라당 당대표로 당선된 홍 지사.

2011년 7월4일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됐지만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이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디도스 사건’ 등으로 사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5개월 만에 대표에서 물러났다.

홍 지사는 억척스런 자수성가형에 검사 출신인 만큼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성격으로 평가된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불안정한 이미지와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거침없는 입담 등은 대선주자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과연 거침없는 입담인가, 막말인가. ‘한국의 트럼프’ 홍 지사의 인생에서 논란이 돼 온 주요 발언들을 정리한다.

▲2003년 5월, 노무현 정부 시절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 “야당은 경제 잘 되게 하는데 신경 쓸 필요 없다. 경제가 나빠야 여당 표가 떨어지고 야당이 잘 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과연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 2008년 대선 당시. BBK 김경준 기획 입국설 조작 논란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편지와 각서를 갖고 있다”고 해 놓고 “오래전 일이라 편지 입수경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기자들이 ‘이명박 대통령이 2000년에 김경준을 만났다고 주장했는데, 그럼 만난 지 한 두 달 만에 회사를 설립한 것이냐’ 묻자 “식사했어요?”라며 ‘식사준표’라는 별명을 얻기도.

▲2008년 10월 14일, 국회 국정감사 점검회의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사저 뒷산) 웰빙숲 조성은 쌀 직불금 파동에 버금가는 혈세 낭비의 대표적 사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집 앞에는 주차할 데도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아방궁을 지어서 사는 사람은 없다”

홍 지사는 2011년 5월23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아방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집(사저) 주변 환경정비 비용으로 1000억 원에 가까운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되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라면서 “그 보고가 잘못되었다면 사과하겠다”고 했다. 이후 홍 지사의 사과는 없었다.

▲2011년 8월24일,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홍준표 새누리당 대표, 당시 ‘25.7%’의 투표율을 보인 투표 종료 직후 “투표율과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 안에 대한 여론조사치를 종합해 보면 이 주민투표는 사실상 오 시장이 승리했다고 본다.”

진중권 교수는 당시 홍 대표에게 “‘사실상 승리’했다고 자위하는 중. 홍준표 대표께 휴지 좀 갖다 드리세요. 이거야말로 정치적 공연음란죄”라면서 “그런 논리라면...진중권도 ‘싱크로율로 보면 사실상 장동건’”이라며 아전인수식 해석을 비난했다.

▲2011년 11월, 대학생들과의 타운미팅

홍준표 새누리당 대표, “나는 이대(이화여대) 계집애들 싫어한다.” 당 쇄신을 요구하는 비주류를 겨냥해서는 “내가 겨우 3개월 전에 주류가 됐다. 그런데 꼴같잖은 게 대들고 X도 아닌게 대들고.. 이까지 차올라 패버리고 싶다.”

▲2016년 7월12일, 경남 도의회 입구

홍준표 경남도지사, 경남 도의회 입구에서 사퇴를 요구하던 여영국 정의당 도의원 향해 “2년 더 단식해보라. 쓰레기가 단식한다.” 여 의원이 사과를 요구하자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2008년 2월16일, 성완종 리스트 무죄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

홍준표 경남도지사, “‘친박’(친박근혜) 세력의 음모” 주장. ‘양박’이라는 신조어 만들어내기도. “2015년에 돈 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 저한테 돈을 줬다고 (친박이) 덮어씌웠다. 일부 ‘양박’들하고 청와대 민정(수석)이 주도적으로 제 사건을 만들었다. ‘양박’은 양아치 같은 친박이라는 뜻.” 

▲2017년 2월28일, 경북 대구 서문시장 대선 출마선언식

홍준표 경남도지사,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연루돼 대법원 판결을 남겨 둔 홍 지사 “0.1%도 가능성이 없지만, 유죄가 되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자살하는 것도 검토하겠다.”

야당의 “막말과 억지 정치의 재개”, “패륜적 욕설” 강력 반발에 “팩트를 얘기한 것.”

지난 1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고 있는 홍 지사.<사진=연합뉴스></div>
▲ 지난 1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고 있는 홍 지사.<사진=연합뉴스>

저격수 홍준표, 성완종이 저격? 

홍 지사는 ‘저격수’로 잘 알려져 있다. 상대를 향한 저격성 발언이 화제에 오르면서 얻은 별칭이다.

홍 지사는 ‘DJ(김대중 전 대통령) 저격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애초 김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욕심내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한 자유한국당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DJ는 1995년 지방선거를 휩쓸고 정계 복귀한 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구상하면서 홍 지사를 강력하게 욕심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당시 홍 지사는 DJ를 따르기로 약속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직접’ 전화 한 통에 발길을 돌렸다. ‘DJ 저격수’의 시작이다.

홍 지사의 대표적 DJ 저격은 비자금 공세다. 1999년 3월 대정부질문에서 홍 지사는 “김(대중) 대통령은 일정한 수입 없이 40년 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수백억 원이 소요된다는 대통령 선거에 네 번이나 출마했다”며 검찰 수사를 통해 대통령의 비자금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지사는 팩트를 갖고 공격한다는 ‘저격 철학’도 갖고 있다. 그는 지난 2011년 당대표 시절, 한 여당 의원이 저축은행 불법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자 “스나이퍼(저격수)는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이다. 잘못 쏘면 자기가 죽는다”고 했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홍 지사가 대표직에 오르기 전인 2011년 6월, 불법자금이 흘러갔다고 죽음으로 고백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된 홍 지사는 1심에서 실형을 받은 뒤,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 판결은 아직 남아 있다.

홍 지사는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간다”고 말했다. 대권을 노리고 있는 홍 지사의 어깨 너머에는 여전히 성완종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다. 홍 지사는 대법원의 판단에 대해 “0.1%의 유죄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변방’에서 ‘중심’을 노리는 ‘저격수’ 홍 지사가 저격당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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