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선을 통해 각 당의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촉박한 경선과정이었지만 여러 후보분들의 생각과 비전을, 다는 아니더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달 남았지요? 이제부터라고들 합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일국의 대표 머슴을 뽑는 선거인데 어찌 남은 한 달만 중요하겠습니까. 그간 여러 후보들께서 걸어온 길, 보인 행동, 해온 말 등이 종합적으로 채점되는 것이겠지요. 

사적인 얘기로 편지를 시작해서 면구합니다만, 어젯밤 제 집 얘기 한 토막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올해 고2가 된 막내딸이 내일 수학여행을 간답니다. 제주도로 간다는군요. 뭘 타고 가냐 물었더니, 세월호참사 이후 제주도 수학여행은 배를 타지 않는답니다. 올 봄도 그 해처럼 꽃이 지천입니다. 세월은 참 속절도 없지요. 

단원고 여학생 주머니에서 나온 젖은 지폐

얼마 안되는 용돈을 쥐어주면서 저는 애비로서의 무능함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불현듯, 3년 전 안산 단원고 어느 여학생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만 원짜리 몇 장, 써볼 틈도 없이 물에 젖은 그 몇 장을 쥐고 오열하던 제 또래 아빠가 생각났습니다. 후보분들께서도 그 가슴 저미는 사연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아이에게 더 쥐어주지 못하는 저를 초라하게 생각했던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그만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고교시절 추억의 꽃인 수학여행을 앞두고 들떠있는 아이를 보는 게 즐거워야하는데, 마냥 그렇게만은 안되더군요. “잘 다녀오거라, 날씨가 좋아야할텐데…”라고 말하면서도 가슴 한켠 슬펐습니다. 

다음 말씀을 드리고자 둔탁한 필이지만 용기를 냅니다.  
슬픈 엄마아빠들을 슬프지 않게, 아니 최소한 덜 슬프게 해주십시오. 진도 팽목항 실종자명단 게시판 앞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엄마아빠들을, 폐지 리어카를 끌고 위태위태 언덕길 오르는 어르신들을, 똑같이 일하고도 절반 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꿈도 희망도 박탈당한 채 기울어진 출발선에 서있는 청소년들을 더는 이대로 두지 마십시오. 

촛불이 횃불되어 여러분들을 소환할 수도 

그들을 잊고 방치한다면 반 년째 타오르고 있는 촛불이 횃불되어 여러분들을 소환할 것입니다. 촛불 이전과 이후의 시민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무겁게 새겨주십시오. “광장은 광장이고 여의도는 여의도”라던 몇몇 정치인의 몰역사성도 당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겸손하게 반성하시면 좋겠습니다. 

거창하고 거룩한 정책들은 공약집에 다 있으니 한 말씀만 드리지요.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아픔과 분노와 절망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 정신을 한 마디로 응축한 것이자,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맛있는 밥 한 끼, 우리 가족의 단란한 저녁시간을 누군가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럴 필요가 없어지는 사회, 그게 ‘같이 잘 사는 사회’ 아니겠습니까. 그런 공동체를 우리와 여러분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기득권과 특권 추방이 통합의 첫 걸음

진정한 통합이란, 국민들이 적어도 절대빈곤으로부터 해방되고, 각자의 처지와 지위가 고르게 높아짐으로써 사회적 분노와 긴장이 최소화될 때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자면 재벌을 위시한 소수의 독점과 특권은 규제되는 게 마땅합니다. 기득권과 특권 추방이 통합의 첫 걸음이라고 보는데, 후보분들께서는 어떤 견해신지 궁금합니다. 

정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후보는 우상이나 환호의 대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흔히들 머슴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단어가 들리면 “아, 또 선거가 코 앞이군”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딱 그 때만 쓰는 단어니까요. 후보로 나선이나 유권자들이나 간에 그 단어가 더 이상 민망하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소속 당에 따라 생각이나 정책이 다릅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개개인의 천부적 권리가 훼손돼서는 안된다’는 것은, 소속 당과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절대명제입니다.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당연한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을 매일 공부하거나 의식하면서 사는 것 아니잖습니까.  

그게 정치라구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몇 년 주기로 정치권력을 놓고 격돌합니다. 전쟁에 가까운 사생결단입니다. 갈갈이 찢깁니다. 패자를 지지한 국민들은 소외되고 배제돼왔습니다. 정치현장에서 20~30년 산전수전 겪으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그간 우리 선거는 ‘국민분열 촉매제’였습니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그게 정치라구요? 그게 선거라구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정치가 잘못돼왔기에 분열촉매제였던 겁니다. 

후보분들 모두 국민통합과 행복, 국익을 주창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내건 목표는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섬기겠다는 우리 주인들은 여러분들의 그 방법론과 됨됨이를 놓고 선택합니다. 해마다 겨울에 열리던 대선이 왜 이 화창한 5월에 열리게 됐는지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조기 대선의 ‘역사성’과 ‘비극성’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요. ‘만18세 투표권’조차 이루지 못한 채 대선을 치르게 된 점,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여기에 반대한 당의 후보께서는 청년들에게 반드시 해명해야 하실 겁니다. 

주인이 새로 태어났으니 머슴도 새로 태어나야  

후보들께서 속한 정파의 생명연장을 위해 아등바등 치르는 선거가 아니라, 국리민복을 위해 정정당당히 겨루는 첫 번째 선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것이 이번 ‘촛불대선’의 역사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어느 후보께서 예전의 삿된 방식으로 ‘전쟁’에 나선다면, 주인들은 엄하게 채점하고 퇴장시킬 것입니다. 오로지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데에만 몰두하는 ‘전쟁’이 아니라, 채점위원인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내공과 장기를 후회 없이 발휘하는 ‘경쟁’을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환되고 퇴장될 것이라는 점을 명토박아 말씀드립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난 여섯 달 동안 여러분의 주인들은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새로 태어나십시오. 이건 머슴 후보에 대한 주인의 당연한 요구이자, 머슴 자격요건입니다. 

적폐는 우리 업보입니다. 그 업보를 풀 사람 역시 우립니다. 적폐청산을 통한 진정한 새출발이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과 정파는 달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보편적 가치추구권’에는 다들 이견이 없으신 것 아닙니까. 일단 그것만이라도 확고하게 세우는 전기를 만들자는 게,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우리 주인들의 최소 공통분모입니다.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적폐청산을 통한 새출발이 시대정신

재임 몇 년 만에 이 나라를 갑자기 융성하게 만들라는 것, 절대 아닙니다. 상식이 상식 그 자체로 인정받고 두 말 없이 통하는 사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우리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과정에, 부정과 불법과 특권이 개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라는 겁니다. 후보분들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에 의해 갑자기 융성되는 시대는 애저녁에 지났다는 건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십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공동체 질서와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생동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공정하고 공평한 환경을 만들자는 겁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이 역할을 못해서 이 나라가 어느 지경까지 추락했는지를 똑똑히 목격하고 치르는 선거입니다. 다시는 “이게 나라냐”와 “국민이 주인이다”는 구호를 처절히 외치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헌신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역사적 선거의 후보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실 수 있도록, 수미일관 선전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아직 조석으로는 쌀쌀합니다. 남은 기간 건강 각별히 돌보시지요. 이런 편지 기회가 흔치 않아, 쓰다보니 길어진 점 죄송합니다. 바쁘실텐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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