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을 통해서 본 경제사회적 갈등과 양극화 해소방안

                                                                                                   장용기 <목포mbc 편성제작부 부국장>

[폴리뉴스=홍정열 기자] 이 글은 지난해 장용기 부국장이 전남 여성단체 회원들에게 목포 신안비치호텔에서 강연한 갈등 해소 관련 주제발표문이다. 장 부국장은 발표문을 통해 경제 사회적 여건이 열악한 전남의 경우 친환경 자연과 섬과 바다 등 지역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공동체 산업육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 갈등이란?      

2. 갈등의 원인(경제적 관점과 사회복지적 관점에서의 갈등-양극화)

3. 임금소득의 변화를 통해서 본 양극화의 진단.

4. 경제성장의 성과는 누가 가져갔는가

5. 뉴노멀 시대의 도래 - 저성장,저금리,저소비 세대갈등 고령화

6. 500년전의 토정 이지함에 주목하는 이유

7. 결론과 시사점

1. 갈등(葛藤)이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칡 갈()과 등나무 등()이라는 글자가 조합된 단어이다. 칡은 오른쪽으로 덩굴을 감으며 올라가고, 반대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덩굴을 감으며 올라가서 두 개체가 얽히면 아주 풀기 어려운 모습이 된다. 칡과 등나무는 서로 질기고 자르기도 굉장히 힘들고 뿌리까지 뽑기도 질긴 나무라고 한다. 따라서 질기고 자르기 힘든 만큼 개인이나 집단 사이 서로간의 의견충돌 및 마찰에 비유하여 나온 말이다.

국어사전적 풀이는 다음과 같다.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일이나 사정(事情)이 서로 복잡(複雜)하게 뒤얽혀 화합(和合)하지 못함의 비유(比喩譬喩) 서로 어긋나는 견해(見解)처지(處地)이해(理解) 따위의 차이(差異)로 생기는 충돌(衝突)

이처럼 갈등은 개인 또는 여러 집단 사이에서 다른 의견이나 정서로 인해서 서로 충돌하여 서로의 이익에 상충하는 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 집단 및 단체간의 갈등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며 경우에 따라 서로 타협을 하면서 해결되기도 하지만 의외로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있어서 사회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갈등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주제 강연에서는 경제사회적 관점과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갈등을 다루기로 한다

2.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경제적 관점과 사회복지적 관점에서의 갈등-양극화>

지난 1990년대 중반 IMF이후 우리 사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양극화라는 말이다, 양극화란 서로 다른 계층이나 집단이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지게 되는 것을 일컫는 뜻이다. 그러다가 더욱 심각해지면 갈등과 대립을 촉발하고 정치 사회문제로까지 커지고 있다.

보통 소득의 양극화로 벌어지는 경제적 양극화에 따라 빈곤과 불평등, 차별이 심해지면 사회적 양극화가 나타나게 된다. 특히 일자리문제 특히 한국의 미래를 책임지고 개척해 갈 청년 일자리가 양극화 해소의 핵심으로 부각되면서 노동의 유연성을 기초로 쉬운 해고를 통한 일자리 창출, 이른바 강성 귀족노조의 임금을 깎아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등등 계층간 세대간 집단간 갈등과 대립까지 불러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나이 든 중장년층이 일자리에서 물러나고 강성 귀족노조의 임금을 깎으면 과연 청년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행복해 질까? 물론 이 사안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시적으로 현상은 타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세금의 재분배 형식을 통해 취약한 계층을 지원해주는 사회복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국가 예산의 30%가 넘는 예산을 쏟아 붓고 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 예상되지만 임금이라는 원초적인 분배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는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원인과 진단이 먼저이다.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은 채 밖으로 드러난 문제만 덮어가고 특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파적 입장에서 원인을 진단하고 땜질식으로 정책을 펴고 주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 비판은 비단 이 정부 여당만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가난구제는 국가도 못한다는 말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대체로 맞는 말이고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빈곤을 구제하는 방식의 지원을 하되 빈곤의 구조적 원인이 되는 임금이든 산업이든 사회구조적인 근본적 틀을 국가가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발표주제인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왕을 포함한 왕실집단과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관료, 지방 사림들의 생각은 권력을 잡기위해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빈곤이나 가난구제 등 일반 백성들의 절박한 삶에 대해서 백성들은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빈곤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극심할 경우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는 등의 시혜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 지배계층의 한 가지 공통점은 전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입장 즉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손해 관점에서만 모든 문제를 생각하고 대립하고 정책에 반영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볼 때 이른바 기득권 지배계층의 사고방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거의 비슷한 특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앞서 지금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양극화를 살펴보겠다.  

3. 경제- 임금소득의 변화를 통해서 본 양극화의 진단.

먼저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서민들의 소박한 목표는 먹고사는 문제이다. 맹자도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요, 백성의 하늘은 먹는 것이다.’고 말했다. 지금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기본적인 갈등 원인도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중 고등학교 학과목에 사회경제, 경제사회로 묶어진 과목이 있었듯이 이처럼 경제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경제사회적 관점에서 지금 어떤 시대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회적 갈등의 시작은 먹고 사는 문제,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가 한 쪽으로 쏠리는 불평등 불균형 현상이 심각해지는데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회문제 경제문제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먼저 진단하고, 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또 어떻게 바꿀 것인가로 마무리하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난 62년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말은 60년대 이전에는 주로 농업 등 1차 산업 종사자가 많았지만 박정희 군사정부 이후 제조업 시대로 넘어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국 경제 고도성장은 이 계획경제 기간에 집중되고 있다. 제조업 성장 위주의 계획경제는 1993년에 끝났고 94년부터 사실상의 시장경제가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생필품과 임금 등 가격과 물가를 억제하며 정부에서 통제했다. 수요와 공급 그리고 가격을 시장에 맡기고 기업에 맡기는 자유 시장경제는 불과 20년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기간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산업화 사회에서는 4인 가족 구성원이든 독립가족이든 대부분이 임금 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재벌 대기업 임원에서부터 중소기업 종사자, 골목 빵집의 알바 종업원까지 거의 모든 국민들이 월급에 의존해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국경제의 오늘을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사실 사회 경제적 갈등의 출발점이 사실 경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먼저 거론하지만 이 경제 현실을 보는 관점에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청년 일자리가 부족하고 ,중소기업이 어렵고, 서민들이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에는 진보나 보수그룹의 학자와 정당들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의 원인 진단과 해법은 판이하게 다르다

발표자가 경제전문가도 아니고 강의 주제 또한 사회적 갈등과 양극화 해소이기 때문에 양쪽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한국경제 구조의 불평등과 불균형 등 양극화가 시작된 계기는 1997IMF 외환 위기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많은 여성회원들도 당시 금반지와 목걸이 등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셨을 것이다. 88년도에 입사한 저도 10년 뒤에 겪은 일이다, 제가 다니는 회사도 당시 많은 선배들이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 퇴직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지금 생각하면 IMF 외환위기는 사실상 선진국이 신흥국을 경제적으로 침탈한 행위였다. 단지 그 침탈 행위가 칼과 총이 아니라 달러 즉 돈의 치고 빼기 수법 등을 활용한 금융기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90년대 초반 김영삼 정부는 잘나가는 국가 경제력만 믿고 OECD 회원국이 되기 위해 세계화 추세에 맞춰 금융시장을 개방했다. 개방에 앞서 국내 은행이나 대기업들의 방어 능력 등 체질개선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너무 자신하고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1년짜리 국제투기 자본의 단기성 해외차입금을 들여와 우리 기업에는 7-8년 장기로 대출했는데 투기자본회사가 1년 뒤 갑자기 돈을 회수에 나서자 맥없이 주저앉은 사실상의 흑자부도였다. 그밖에도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사채 빚 무서워하지 않은 잘 나가던 회사가 사채업자에게 맞은 뒤통수 한방에 거꾸러지며 부도를 당한 꼴이었다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누적 경제성장률은 74% 늘었으나 임금성장률은 39%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금융 위기가 시작된 2005년부터 지금까지 보면 경제성장률은 25% 성장했지만 임금은 5% 증가하는데 그쳤다. 특히 하위 임금 층 20%는 제자리 수준으로 사실상 한푼도 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임금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임금 불평등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때부터 한국 경제의 대기업 위주 경제 재편등 양극화 문제가 시작된다.

첫 번째는 경제성장의 성과가 임금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임금소득의 불평등구조이다.

보통 국민들의 삶의 기준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소득, 즉 임금 문제를 보면 고도 성장기의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아래서는 중소기업도 비중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80년대 초반까지 90%에서 97% 였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75%에서 80% 수준을 유지했으나 90년대 중반 외환위기 이후부터 임금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중소기업의 임금은 50%에서 60% 수준에 그치고 있다.

두 번째는 기업간 불균형에서 빚어지는 갑과 을의 문제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대 대기업의 비율은 64 구조였다. 지금은 82의 심각한 불균형구조를 보이고 있다. 즉 대기업 2개회사에 의존하는 비슷한 중소기업 8개 회사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며 과도한 출혈경쟁으로 중소기업의 이윤 확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80% 근로자는 대기업의 2,3차 하청으로 이어지면서 대기업 임금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에 그치는 임금 격차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세 번째는 고용의 격차문제이다.

비정규직은 90년대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기업간 불균형 확대 속에서 불평등은 당연한 현상이다.OECD 평균고용기간은 평균 10년인데 우리는 평균 23년이다. 청년 세대로 불려지는 29세 까지 신규 채용은 3명중 2명이 비정규직이다. 또 정규직 전환비율도 지극히 낮다. 2007년 기간제 노동자보호법이 통과되면서 2년 이후에는 대부분 해고되는 나라이다.

4. 경제성장의 성과는 누가 가져갔는가

이 현상의 중심에는 불균형적 기업구조가 있다.(100:29:4:60의 비밀)

재벌그룹 100대 기업 대 국내 전체 300만 중소 기업가운데 법인세와 사업소득세를 국세청에 내는 52만개 기업을 비교해보면 100대 기업의 매출액은 전체 매출액의 29%를 차지하고 고용은 4%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 100대 기업은 전체기업 이익금의 60%를 가져가고 있다.

전체 근로자의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이익금 비율은 35% 정도이다. 이처럼 소수 재벌그룹 기업의 시장장악력이 심한 나라이다. 경제성장의 성과를 기업 특히 소수의 재벌 대기업이 가져감으로써 국민과 중소기업은 그 성과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게 한국 경제구조의 현실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원인진단과 해법은 너무도 다르다. 진보진영에서는 시장경쟁을 도입한 신자유경제주의 때문이라며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며 정부가 개입하는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온다. 보수진영에서는 경쟁으로 결정되는 자유시장 경제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이며 불평등 불공정의 원인은 해고의 유연성이 부족하고 고액 임금을 받는 이른바 강성 귀족노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규제완화와 노동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 주장이 맞을까요?   

5,뉴노멀 시대의 도래 저성장, 저금리, 저소비 세대갈등 고령화

또다른 그룹의 견해도 있다. 비교적 중도 입장에서 갈등을 보는 경제사회학자 그룹인데 이들은 한국의 세대계층을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와 X-세대, Y-세대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은 각 세대가 가진 경제 사회적 특성과 함께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세대간 갈등을 예고하며 정부와 기업이 사회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2013년부터 전세계 경제가 저성장 저금리 저소비의 늪에 빠진 본격적인 뉴노멀 시대로 접어들었다며 자본주의 4.0 시대와 마켓 3.0의 시대가 함께 도래 했다고 말한다.

마켓 3.0시대는 기업의 윤리가 중시되는 소비가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자본주의 4.0시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정부 역할과 시장감시 기능이 강조되고 기업도 이윤과 사회적 이익을 조율해야하는 시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뉴노멀은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고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초고령화사회도 2006년 일본, 2009년 독일에 이어 한국은 2026년에 진입할 예정이어서 저출산과 함께 심각한 소비시장 위축으로 이어질 것을 경고하며 세대 간 갈등 관리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뉴노멀시대 전문가들은 갈등해소 방안으로 3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 베이비부머 세대(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태어난 고속도로세대)X,Y 세대(80년대부터 90년대 태어난 자갈길 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고 2) 젊은층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산업의 창출, 해외시장 개척 등 뉴노멀을 탈피하는 다양한 방법의 강구 3)소비시장의 뉴노멀시대를 맞아 기업도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기업, 사회와 함께하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그럼 강의 주제인 조선 시대로 들어가 본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위협하는 핵심과 본질은 무엇이고 어떤 논의가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6. 500년 전의 토정 이지함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역사가 발전하고 있다는 관점의 이슈는 백성들의 삶의 질의 향상에 두고 있다. 당시 백성으로 지친되는 양인 이른바 보통사람들의 일차적인 목표 또한 생존 즉 경제적인 빈곤 탈출이었다.   

조선전기 토정 이지함 선생이 당시 백성의 경제적 빈곤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에서 공업과 상업을 말업이라고 천시하고 본업을 강조하는 농업만으로는 빈곤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토정 선생이 생존했던 중종에서 인종, 명종, 선조 대의 1517년부터 1578년 당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자.

동서고금의 어느 왕조나 정부를 막론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 이른바 세금을 어떻게 걷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대개 새 왕조나 새 정부는 앞선 왕조나 정부를 무너뜨리는 명분으로 이른바 개혁을 앞세우며 백성들에게 토지분배와 공평한 세금과 군대, 노동을 부과했다

고려 말 이성계 등 무인과 신흥사대부들이 군부혁명에 나선 경제적 요인으로 당시 권문세족들의 과도한 토지 수탈과 가혹한 세금 수탈이 원인이 됐다.1392년 조선 건국에서 신흥지배세력이 양민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세금징수를 통한 왕실 재정의 확충이 전제되었고 재정 확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토지 배분과 적정한 세금 수취체계였다.

1) 조선의 토지제도

과전법(,현직관리에게 수조권 지급,세습 불가)->직전법(일부 세습토지가 늘어나 토지 부족으로 현직관리에게만 수조권 지급/수신전, 휼양전 폐지)->직전법 폐지(16세기 중엽 명종대 수조권 폐지, 녹봉만 지급)

2) 세금(租庸調) 제도와 문란

():전세 -토지에서 수확량의 1/10 징수->양반층 토지소유확대

(소작농/병작반수제 수확량 1/2징수)

():- 군역과 요역,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정남에게 부과 -> 16세기 방군수포(군역 안가는 대신 삼베 등을 냄) 성행 .. 친족,이웃에게 부과

(調);공납- 토산물(특산물)을 현물로 징수 -> 16세기 방납의 폐단 성행 -> 율곡 이이등 수미법(공물을 쌀로 거두는 제도) 주장

3)조선의 신분(身分)제도- 현대의 신분은 자격, 소속이지만 조선의 신분은 태생, 혈통이었다

양천제 : 건국 당시 법제적으로 양인(사대부.상민)과 천인(비자유민)으로 구분 - 양인에 대한 공평한 군역과 세금 부과로 국가 재정 유지

양반 신분제사회 : 15세기 말엽부터 양인을 양반과 중인, 이 두 가지 범주에 들지 않는 나머지 양인 등 셋으로 구별 - 16세기 초 중반에 양반, 중인, 양인, 천인 네 개의 신분 정착-최상층인 양반이 권력과 부를 장악.

4) 신분질서의 변화

 양반 : [군역 요역 등 각종 국역 면제] 과거·음서·천거를 통한 관직 진출,

중인 : 기술관과 서리, 향리등 전문기술과 행정실무 담당, 직역 세습,

서얼은 중인신분 대우(문과 응시금지)

양인(상민) : 농업, 수공업, 상업등 생산활동 종사, [조세와 국역 등의 의무]

천민 : 대부분 노비(신분세습, 공노비와 사노비)

조선 건국 100년에서 150여년이 흐른 연산군 때부터 중종 명종 선조 대에 이르면서는 양반들은 군역(군대)의 의무와 국가 노동에 동원되는 요역과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의무를 지지 않았고 이들 의무는 세 번째 신분인 양인(상민/보통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국가재정은 양인들의 가혹한 세금으로 채워졌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았던 16세기 초반 무렵 훈구세력과 사림 세력간, 또 왕의 외척 세력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각종 사화로 이어졌고 1550년대 명종 때에는 극심한 가뭄 등 자연재해까지 잇따라 농민들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당시 지배층은 구빈의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농민들에게 토지세와 요역 군역 공납 등 오로지 세금을 걷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현감과 수령(시장, 군수)들은 할당된 세금을 채우고 사리사욕을 위해 심지어 닭과 개, 나무, 돌 등에도 요역과 군역 등을 부과하고 혹 도망자가 생기면 일가친척과 이웃주민에 까지 세금과 군역 공납 등을 대신 물리는 일족대역, 이른바 연좌제성격의 수탈구조를 띠게 된다.

농민들이 농지를 떠나면 세금과 군역을 피할 것이라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야말로 '양봉'(양인들이 봉)이고 양인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자천하지대봉’(농민들이 봉)의 시대였던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사회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사농공상의 직업서열로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고 더욱이 바다에서 물고기잡고 소금 굽는 수산업은 아예 천업으로 직업군에도 넣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토정 이지함이 등장하게 된다. 선조 때인 1573, 과거를 보지 않고 당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선비를 등용하는 유일이라는 제도로 천거를 받아 말단 수령인 경기도 포천 현감으로 나이 57살에 첫 관직에 부임한다. 이때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이 담긴 상소문을 올린다.

여기에서 강연의 주제어인 본말상보(本末相補:본업과 말업, 처음과 끝 등 양극단에서 서로 모자란 것을 보충하자)론이 나온다.   

토정 이지함(1517~1578)하면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토정비결 저자이고 패랭이와 삼베옷에 짚신을 신은 양반답지 않은 기인행각을 떠올린다. 현실과 동떨어진 삶으로 비춰진 때문에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다.

토정선생이 조선전기 유교 성리학적 정치사회 지배 이념에 직접 간접적으로 도전하고 백성의 가난구제에 초점을 두고 시대를 뛰어넘는 구체적인 구빈과 부국의 대안을 제시했던 실용주의적 현실개혁론자였다 라고 하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말기까지 해금정책과 함께 섬과 바다를 천시해왔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나라였다. 심지어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 해금정책을 해제하고 일부 개방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조선은 명나라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사대의 대의명분아래 해금정책을 줄곧 유지해 왔다.

물론 조선 지배층의 해금정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돼야할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사대라는 명분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피지배층인 백성을 농업과 농토에 묶어둠으로써 손쉬운 세금징수와 인력의 이탈을 방지하고 사회 신분의 고정성과 폐쇄성 등을 통해 신분과 서열 등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장점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유교 성리학 사상이 당시 말업이라고 천시했던 상업과 광업, 수산업 등은 개방성을 상징한다. 물자와 정보, 생각들이 활발하게 교류되는 섬과 포구, 바다 등은 나라간의 정책들이 비교되는 개방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왕조국가들은 개국 초에는 상대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국경무역과 해상무역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했던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충남 보령에서 고려 말 정도전, 정몽주등의 제자를 길러낸 대유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으로 태어난 양반가문의 출신이다. 토정은 조선전기 중종 12년에 태어나 인조 명종 대를 거쳐 선조11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정의 생애 전후인 16세기 시대적 사회적 상황은 각종 사화와 당쟁이 심했으며  개국 초와 달리 당시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고 토지세금과 군역, 요역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강제됨으로써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안겨줬던 시기였다.

이지함은 자신이 살던 시기를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사태로 진단하면서 나라의 하늘인 백성들의 구빈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지배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본업인 농업으로는 백성들의 가난구제가 불가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농업을 본업으로 하되 수산업과 광업등 이른바 말업으로 어려움에 빠진 본업인 농업을 보충하자는 실용주의적인 중도 절충안을 상소문을 통해 제시했다.

바다와 섬에 눈을 돌려 바다 섬의 강점을 살려 백성의 가난 구제를 하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담은 토정의 획기적인 주장은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심지어 개혁론자로 일컬어지는 대 유학자이자 관료인 이이에서 정약용에 이르도록, 또 개혁성향을 지닌 여러 성리학자들의 건의나 상소 등에서도 관료들의 탐학이나 토지세, 군역 요역의 감경 등 제도권 내부의 문제에서만 다룰 뿐 토정의 이같은 관점 접근을 찾아볼 수 없다. 토정 사후 150년이 지난 북학파에서 일부 학자들만이 제기했을 뿐이다.  

토정은 실용주의와 실천을 앞세운 경세사상가이자 사회복지 실천가이기도 했다. 특히 재야의 기인 토정과 제도권 관료 모범생 율곡과의 독특한 친분 관계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율곡 이이(1536~1584)보다 20여년 앞서 태어났고 비록 추구하는 학문의 길과 삶의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생각과 교류관계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토정 이지함이 생애 마지막 해인 1578 아산 현감때 질병으로 숨지자 율곡 이이가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으며  6년 뒤에 이조판서였던 율곡의 죽음에 선조가 하늘이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함인가라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토정선생 술회기에서 내가 일찍부터...속마음 내비치고 조금의 장벽도 없었다. (토정)선생은 나에게 인망(人望)을 요구했고 나는 선생에게 천방(天放)을 조금 거둘 것을 요청했다. 서로를 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늦은 공업(功業)을 얻기를 빌었다.” (이이의 석담일기)

이 같은 이이의 기록을 통해 기인으로 통했던 토정 이지함의 정신세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토정 이지함은 50대 중반을 넘어 두 차례 지낸 현감 시절 백성들의 가난과 고통 실상과 이를  해소하는 위한 대책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 중에 주제발표와 관련돼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 직업제 사회에서 본업으로 중시되는 농사로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어려우니 천시했던 수산업이나 소금제조. 광업 등 말업으로 서로 보강하자는 내용이다.

이른바 바다와 섬의 강점을 활용해 백성의 어려움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는 해금정책을 유지하면서 바다와 섬을 천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으나 토정은 구체적으로 전라도 만경현 앞의 양초도를 어업수산기지로 ,황해도 풍천현 앞의 섬인 초도정을 소금생산기지로 만들어 그 곳에서 생산된 물고기와 소금을 곡식으로 바꿔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 재정에 보태자고 제안했다.

이밖에도 토정 이지함은 야인시절 한 섬에 주민들과 박을 심어 그 박 수만개를 팔아 곡식으로 바꿔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등 자원으로서의 바다와 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지함은 명종 대 발생한 충청도 이홍윤 고변사건에 조선 2대 정종의 왕실의 혈통인 장인 이정랑이 역모사건에 휩싸이자 이에 앞서 고향 보령에 내려온 가족을 데리고 섬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지함이 몇 년동안 잠행 생할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선조대 영의정을 지낸 조카 이산해가 쓴 '이지함 묘갈명(묘지명)'에서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한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함은 섬사람의 거친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전국의 어부들로부터 바다와 섬에 관한 지식과 항해술과 조류의 흐름 등 지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생활과 어업등 수산업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이다.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배의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바가지를 달아가지고 세 번 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우환은 없었다고 한다. 손수 장사를 하며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빈손으로 생업을 경영해 수년안에 곡식 수만석을 쌓았다가 빈민들에게 나눠주고는 소매를 털고 가버렸다. 바다 가운데 들어가서 (섬에) 박을 심어 박이 수만개 열렸다. 그것을 쪼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 몇 천석과 바꾸었다. 곡식을 경강의 마포에 옮겨다가 강촌사람들을 모아서 흙을 쌓아 토실을 만들었다.” 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삼성출판사

토정 이지함의 섬과 바다에 대한 인식은 신분관으로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사농공상으로 사실상 어업이나 뱃일은 위 네 신분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천인들이 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다음은 백사 이항복과 나중 인조의 장인인 된 유천 한준겸이 사마초시(지금의 고시)에 합격하고 회시준비를 하면서 이지함이 기거하던 마포 토정에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면서 강의도 받고 나눈 대화이다. 이항복이 묻기를 학식이 뛰어난 숨은 인재를 본 일이 있습니까. 하자 토정은 많은 인재를 알고 있다면서 그 가운데서 최고의 인물로 뱃사람을 꼽는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한 사람은 항상 바다 위에 있으면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충청도 해상에서 만났는데 10여년 뒤 전라도 바닷가에서 만났다...뱃짐도 적당히 싣고 운임도 욕심을 부려 받지 않았고... 일찍이 먼 바다에 고기잡이를 가는데 청하여 같이 갔다. 그가 키를 잡고 노를 젓는 것은 다른 어부들이 따를 수가 없었고..딸이 고기값을 시장 가격의 배를 받자 반값을 되돌려주게 했다...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백사 이상국(항복)이 기록한 바에 나옴. 출처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삼성출판사 )   

훗날 서인세력의 중심이 된 이항복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이 때 토정의 답변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듯하다. 토정은 당시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어부와 뱃사람을 최고의 인물로 꼽은 것인데 이들에게 진정한 관료가 되면 신분을 가리지 말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들어가 필요한 인재를 발굴하고 실용을 배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선조 1573년 토정 이지함은 천거제도에 따라 57살 나이에 종6품 벼슬을 받고 포천현감에 부임하게 된다. 토정은 비록 하급 지방 관료지만 현의 상황과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임금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듯하다.

포천현의 폐해를 진술해 올린 상소문은 이지함의 사상이 담긴 글로 평가 받고 있다. 상소문에서 포천현의 실상을 죽음을 앞둔 병든 고아 거지아이라고 표현하고 곡식이 부족한 가난의 원인을 백성의 게으름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구제 방법을 상책과 중책, 하책으로 구분해 지배층의 책임과 도덕성 회복 등 도덕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이 풀어야할 상책, 적재적소 인물등용 등 인재의 창고를 여는 것은 임금과 중앙관료가 해결해야 할 중책으로 보고 있다

다만 포천 현감인 자신이 지방관으로서 할 일은 하책인 바다와 육지의 창고를 열어 가난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사업 대안을 제시한다. 즉 가난은 정부의 식량 창고를 열어 구제할 수도 없고 근본적으로 본업으로 여기는 농업에 의존하는 시각을 벗어나 섬과 바다의 무궁한 자원을 활용하고 그리고 광업 상업 등 말업으로 보충하는 등 산업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본말상보(本末相補)론이다.  

물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萬頃)현에 양초주(洋草洲)라는 곳이 있는데 공()에도 사()에도 소속된 곳이 없습니다. 만약 이곳을 잠깐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물고기를 잡아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수천 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소금은 황해도 풍천부(豊川府)에 초도정(椒島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공에도 사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곳을 우선 포천에 소속시킨다면 소금을 구어서 곡식을 바꾸면 수년 안에 또한 수 천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포천현의 창고에 저장해 두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고 관비(官費/관의 비용))를 쓰게 해 원곡(元穀)의 회계에서 영구히 한 섬도 감하지 않는다면 미속(米粟/쌀과 조,식량)이 점점 감축될 염려가 없어져 영세(永世)에 항상 풍족한 즐거움이 있겠습니다.

더구나 조처를 잘하면 수만(數萬)의 자본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천이 다른 날 국가의 대보장(大保障:일이 잘되도록 크게 보호하거나 뒷받침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포천이 이미 회복돼 소생한 뒤에는 양초주와 초도정은 또 피폐한 열읍(列邑/다른 읍)에 옮겨주어 포천에서 한 것과 같이 한다면 널리 베풀어 여러 사람을 건지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한국의 민속종교사상,삼성출판사)    

만경현 양초주에서 황해도 초도정까지 구체적인 사업 장소까지 열거하는 것은 토정 이지함이 얼마만큼 바다와 섬의 장점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성의 가난구제와 국부를 위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는 반증이다. 상소문에서는 지역 관할주의 폐단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산물은 다만 그 고을에서 취하며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하여 취용(取用)하지 못하게 하니 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타도(他道)나 타관(他官)일 지라도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는데, 포천에는 바다가 없으니 해물을 다른 고을의 경계 안에서 채취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다고 합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  

구체적인 사업 실천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고기 잡고 소금 굽는데 부역(赴役/일하는)할 사람에 대해서는 자원하는 자를 모집해 ,백성과 더불어 이()를 나눈다면 국가에서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사람 인부의 힘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만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고을도 백년의 계책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출처 토정집 리포천시상소(한국의 민속종교사상,삼성출판사 )  

토정 이지함은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하고 국부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관할 주의에 얽매인 각종 규제 등을 과감하게 풀어 시급한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이른바 현실에 기반한 실용적 개혁론을 폈다.

또 농업(본업)에만 의존해 어려움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백성의 삶을 바다와 상공업(말업)를 통해 농업을 보완하고 부를 높여야 하고 필요하면 류쿠(오키나와)와 해상교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특히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국가 창고와 부자 마을의 쌀을 빈민에게 나눠 주는 일시적인 베품은 근본적 치유가 아니다. 일시적인 시혜보다는 산업의 틀을 바꾸고 지역과 개인의 강점을 살려 사회구조적 문제인 빈곤을 탈피해야 한다는 자립형 또는 생산적 사회경제복지 정책 등을 제안하고 있다.

당시 선조 임금은 토정의 상소문을 받아 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시대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토정의 제안은 양반 기득권층과 왕실, 독점상인들의 이익과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토정의 사상은 150년 뒤 북학파와 실학에서 거론됐으나 완전한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다가 백성 구빈정책을 시행해 보지도 못한 채 토정이 죽은 지 3백여 년 뒤 조선시대는 막을 내리면서 일제 침탈의 식민시대를 맞게 된다.   

7. 결론과 시사점

토정 이지함은 조선시대 빈곤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된다. 토정이 본 빈곤의 사회 구조적 문제는 양민을 농토에 묶어 세금징수가 쉬운 지나친 농업 의존 정책과 사농공상의 폐쇄적 수직적 사회 그리고 관료들의 가혹한 수탈 등으로 보고 있다.

양반으로서 패랭이를 쓰고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닌 천민 행위와 천하게 여겨졌던 바다 섬사람과 서얼 등을 최고 인물로 치켜 세웠던 행위 등은 당시 폐쇄적인 신분사회에 대한 무언의 도전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또 사농공상의 고정적이고 수직적인 계층사회에 수산업과 광업 상업을 강조하는 것도 당시 농업을 본업으로 중시한 유교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그러면서도 본을 농업과 사농에 두고 말업인 수산업 광업 상업으로 보충하자는 본말상보론과 기인의 행각 등으로 첨예한 대립이나 음모론을 피해갈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토정의 1차 목표는 백성의 빈곤구제에 역점을 두고 있다. 개방성과 역동성으로 상징되는 바다와 섬 상업 광업 수공업 등 다각적인 산업자원을 활용하자며 농업에만 묶인 당시 지배층의 생각과 정책의 대전환을 강조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 한국사회도 헬 조선으로 상징되는 금수저와 흙수저론의 신분과 부의 세습화 ,사회 양극화, 대기업의 독점화, 저출산, 고령화 등 관점에 따라서는 조선시대와 유사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는 수직적 신분적 폐쇄성과 지나친 농업의존정책이 문제였다면 현대는 산업화, 도시화, 신 자유시장주의 정책에서 빚어진 원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얼마 전 한 도시 시장의 청년수당 신설을 둘러싸고 미래를 위한 청년투자다’, ‘표를 얻기 위한 표퓰리즘이다라며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파와 우파적 발상으로 대립하며 양극화된 논란이 일었다. 어느 편 주장이 맞는 지는 우선 유보하고 500년 전 이지함 선생이 강조했던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에 주목한다.

본말상보는 근본과 지엽은 대립이 아닌 서로 보충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다. 본질이 청년일자리 창출이라면 지엽은 미래투자인지 표퓰리즘을 떠나 지자체의 시도를 지켜보는 것이다. 성과가 있으면 정부 주도로 다른 시도로 확대하고 문제점이 발생하면 책임을 따지고 보완해서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본말상보론의 핵심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경제적 갈등의 일차적 요소인 지금의 불평등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바꿀 건가?

정부는 사회복지를 통한 재분배를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하면서 계속 복지논쟁만 벌이고 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기본소득을 결정하는 임금이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은 그대로 둔 채 복지로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복지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지만 경제성장률에 비해 임금이 줄어들고 기업간 임금 격차도 같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사회복지 예산을 늘려도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원천적인 분배문제는 그대로 둔 채 재분배만 치중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원천적인 분배가 잘못돼 있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고용격차 기업격차 임금격차를 해소하고 경제성과가 임금으로 이전되는 쪽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기업 간 불균형과 고용불평등 임금불평등의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바꿀 수 있다면 누가 바꿀 거냐?

요즘 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야!”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바로 정치다. 법과 제도를 다루는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군수, 시도의원 심지어 표로 선출되는 농수축협 조합장과 사회단체장까지 분명하게 요구해야 한다.

무조건 잘 하겠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는 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실행계획이 담긴 구체적인 공약으로 요구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그러다가 계층간 세대간 집단간 갈등과 대립이 더 격화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정치가 계층간 집단간의 싸움을 부추기는 일은 있어도 계층간 집단 갈등이 정치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정치는 조화와 타협의 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제발표에 토정 이지함의 본말상보론은,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500년 전 아니 200년 전만해도 당시 지배층이 한번 정한 농업제도나 관행화된 제도가 얼마나 완고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개혁이 힘들다는 반증이다.

또 지금이 산업의 체질을 바꾸고 양극단의 의견을 모아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이고 특히 한반도 육지 영토의 4배가 넘는 섬과 바다의 연안을 활용하는 새로운 먹을거리와 일자리 사업도 연구해볼 일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일반적인 갈등과 양극화 현상을 경제 사회적 관점에서 본 것이고 전남은 깨끗한 농업 환경과 섬과 바다라는 지역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

전남은 비록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경쟁과 강자독식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시장주의 경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약점도 되지만 강점도 된다. 특히 든든한 여성단체 회원들이 있기에 공동체 운동을 통한 갈등이나 양극화 해소에 큰 강점이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조금씩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앞으로 지역 특성을 활용한 1차 산업 중심의 4-6차 산업이 각광받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으로 본다. 특히 바다 건너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14억 중국 소비시장이 있다는 것은 전남의 큰 행운이다.

지역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여성단체회원들은 생활 살림을 책임지시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체험이나 감각적으로 잘 아실 것이다. 그것을 자치단체장, 시도의원, 조합장에게 요구하자.

지역의 청년층은 정보와 유통산업에, , 장년층은 지역의 특성을 살린 생산, 가공, 관광산업 등에 참여하는 입체적인 종합산업을 일으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전남에서부터 청년과 중장년 세대가 어우러지는 공동체, 공유문화를 꽃피어야 한다. 전남의 여성단체들이 지역의 희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2500년 전 논어에 있는 글을 소개하고 끝맺고자 한다.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 -가까운 사람이 즐거워하면 먼데 있는 사람들이 찾는다-

 <참고문헌>

토정유사, 한국의 민속종교사상, 삼성출판사 1985

장하성, 왜 분노해야하는가-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헤이북스, 2015

서영구, 뉴노멀 시대와 기업윤리, 교육방송 통찰, 2016

고석규, 고명진, 한국사 속의 한국사2, 느낌이 있는 책, 2016

홍정열 기자 hongpen@pol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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