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보다 먼저 해야 할 것


지난 대선 때였다. TV 후보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를 상대하던 안철수 후보의 표정은 다른 후보들을 대할 때와는 많이 달라보였다. 문 후보와 토론할 때면 유난히 긴장되고 전의를 품은 듯한 안 후보의 표정이 TV 화면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지켜본 많은 사람들 입에서 “문재인을 정말 싫어하나 보다”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안철수 대표와 문재인 대통령 사이의 악연에 가까운 우여곡절 인연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2012년 대선정국에서 후보단일화를 둘러싼 갈등,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갈등과 분당, 그리고 19대 대선에서의 격렬한 대결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우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다. 아직도 표정을 감추는데 익숙하지 않은 안 대표에게서 그런 불편한 마음이 유독 그대로 드러나는 것인지 모른다.

2012년 대선정국에서 안 대표가 겪었던 상황을 그의 입장에서 복기한다면 그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게도 자신의 등판을 요청했던 민주당은 막상 그가 링에 오르자 흔들어댔다. 당시 문재인 후보가 통 큰 양보를 했다면 자신이 박근혜를 이길 수 있었겠건만, 후보단일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야 했던 것은 자신이었고 결국 정권교체는 그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 통한의 사퇴 이후, 안철수의 정치는 문재인을 이기기 위한 집념을 불태우는 정치로 비쳐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것일진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난 대선까지는.

그런데 지난 5월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고, 안철수는 패했다. 물러날 것을 요구받던 안철수였지만, 당 대표 출마라는 승부수를 던져 110일 만에 정치의 전면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비판과 반발을 무릅쓰고 선택한 그 길이 안철수를 회생시키는 극약이 될지, 아니면 정치생명을 마감시키는 독배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문재인을 향한 안철수의 새로운 대결이 시도될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안 대표는 당 대표 수락연설에서 “싸움” “싸우겠다”는 표현을 무려 11번이나 쓰며 문재인 정부를 향한 전의를 불태웠다. 연설의 표현들도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광야에서 쓰러져 죽을 수 있다는 결연한 심정” “고통의 길일지언정 저는 선봉에 서서 싸워 나가겠습니다” “적진에 제일 먼저 달려갈 것이고, 적진에서 제일 나중에 나올 것이고, 단 한 명의 동지도 고난 속에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싸우는 선명한 야당의 길”을 갈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국민과 나라에게 좋은 일이라면 언제라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기는 했지만, 언론들은 문재인 정부를 향한 안철수의 ‘선전포고’라고 해석했다. 안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전의에 불타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야당이 정권 견제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고유의 책임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80%가 아니라 90%가 된다 해도, 야당은 정권의 잘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 다만 안 대표와 문 대통령의 ‘특수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몇 가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은 이미 끝났다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은 승자였고 안철수는 패자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경쟁관계가 아니다. 안철수가 재기하여 차기에 다시 도전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상대는 더 이상 문재인이 아니다. 이 사실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안철수는 ‘문재인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가 언제나 문재인과의 승부를 의식하는 족쇄를 스스로 채우는 한, 그는 ‘큰 정치’의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를 향한 안철수의 ‘전의’(戰意)는 절제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와 싸우겠다는 그의 결의는 국민의 마음을 얼마나 읽고 있는 것일까. 박근혜 정부의 처참한 폐망을 경험한 국민들에게는, 이번 정부만큼은 성공한 정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확산되어 있는 편이다. 그것은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하는 것 가운데 불만스럽고 우려되는 일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을 주고 지켜보려는 마음들이 많아 보인다. 촛불과 탄핵, 대선을 거친 국민들에게도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 정치피로증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싸움이 아닌 평온 속의 변화를 원하게 된다.

그런 마당에 안철수가 앞에 나서서 문재인을 공격하는 장면은 안철수 자신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그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본의가 무엇이든 간에, ‘문재인을 이기지 못한 안철수의 복수’로 비쳐질 것이고, 안철수와 문재인의 반복되는 갈등을 보는 국민의 피로증은 고스란히 안철수에게로 향할 위험이 크다. 안철수가 굳이 문재인 정부의 집권 초기에 야당 대표로서 선봉에서 싸우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이다. 이제 지난 얘기가 되었지만, 그래서 아직 그가 앞에 나설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제3당은 ‘싸움’과 ‘개혁’ 가운데 무엇을 택해야 할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면 우선은 개혁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직은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쌓여왔던 잘못된 문제들을 바로잡는데 더 힘이 모아져야 한다. 그것은 국민의당이나 안철수 대표도 지난 대선을 치르면서 약속했던 바이다. 검찰개혁, 방송개혁, 재벌개혁 같은 절박한 과제들에 대해서는 정파의 이해에 갇히지 말고 대승적인 개혁협치를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그것은 정권과 민주당의 2중대가 아니라 국민의 2중대가 되는, 주어진 소명을 이행하는 길이다. 전면적인 싸움은 그런 이후에, 조금은 한숨을 돌린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안 대표 자신도 국민의당도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대선에서 21.4%를 얻었다는 것은 지나간 옛 추억일 뿐이라 할 정도로, 국민의 불신과 회의의 시선이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여소야대 현실에서 원내 40석의 제3당이 갖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국민의당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그리고 자유한국당-바른정당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개혁의 앞길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국민들은 장차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안철수가 ‘문재인’에서 벗어나, 역사의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마음을 껴안는 정치를 할 때 비로소 그에게도 앞길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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