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대들 또래의 자식을 두고 있는 애비로서 고민 끝에 평어체로 글 쓰는 것에 대해 정중한 양해를 구하네. 이해하고 읽어주면 고맙겠네.

두 말 할 것 없이 미안하다. 
당신들이 잘 하는 것을, 메달 따내는 것을
그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어)서 미안하다. 

전력질주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기는 원심력. 
선수들을 주행라인 밖으로 밀어내려는 그 원심력과, 
벗어나지 않으려는 당신들 의지 사이의 절묘한 그 한 점. 
그 점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최단 주행선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칼날같은 스케이트를 놓아야 하는 당신들의 그 살 떨리는 팽팽함을, “눈 뜨면 그 훈련만 해온 선수들이니 이겨내는 게 당연한 거지…”라고 생각해(왔어)서 미안하다. 

당신들이 잘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와서 미안하다

더욱 미안하게도, 그리고 염치없게도, 쇼트트랙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촌각을 다퉈 뉴스를 다루는 내 직업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동안은 하이라이트 정도만 봤었다네. 바쁘다는 핑계였는데, 미안한 일이네. 그래서 오늘 밤, 맥주 한 캔 빌어 이렇게 치기어린 사과의 글을 쓰고 있네.

나는 쇼트트랙 종목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말 해놓고 보니 또 한 번 미안한 얘기구먼.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얘길 하냐구? 
세상에 그거 볼 것 못 되더라구.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다 못해 파르르 떨리다가, 잠깐씩 숨이 멎곤 하더군. 그런데 ‘볼 것 못 되는 그 운동’을 하는 당신들은 어쩌겠는가. 

나는 쇼트트랙 종목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행여 넘어질까, 행여나 부딪힐까… 그 오마조마함이라니.
장갑 낀 왼손 -오른손 장갑과는 모양이 조금 다르던데 아마도 얼음을 짚기 때문에 그런가 부지? 내가 이렇게 상식이 부족하다네. 이것도 이해해주게- 으로 빙판을 짚으며 코너를 돌 때, 그 절묘한 힘의 균형으로 당신들이 넘어지지 않을 때, 나는 마음 속으로 수 백 번 넘어졌다네. 

얼마를 연습하면, 아니 평소에 칼날 위를 걷는 긴장을 얼마나 유지하면 그럴 수 있니. 아직 어린 나의 아들 딸들아, 조카들아.

네가 아슬아슬 넘어지지 않을 때, 나는 수 백 번 넘어졌다네 

가야할 레인이 각자 딱 지정돼있는 다른 빙상종목과는 달리
총성과 함께 한 지점을 향해 우루루 달려나가는 쇼트트랙 타원형,
롱 트랙에 비해 유달리 작은 그 숨 막히는 타원형,
계란처럼 깨지기 쉬운 그 타원형,
자리 차지하려 몸싸움 하다 자칫 한 순간 삐끗하면 
여지없이 미끄러져버릴 그 타원형 위를

당신들은 돌고 또 돌아야 한다. 

그런 당신들을 더는 못 보겠더라. 
잠수부가 소라 따오듯 메달 쑥쑥 따오던 당신들이 자랑스럽다는 말도 감히, 차마, 할 수 없더라. 아슬아슬하고 미안하고 마음 졸여서 더는 못보겠더라.

넘어졌을 때 부서져 내리던 얼음조각이 네게도 보이든?

네가 넘어졌을 때, 
그 여리고 작은 몸집이 구겨지며 펜스에 처박혔을 때, 
나도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슬로우비디오로 반복되는 너의 넘어지는 모습, 그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리던 얼음 조각들… 그 고속촬영 화면을 보면서 내 정신도 마디마디 분절되더라. 

“메달 연연하지 말고 즐기라”던 말도 잔인한 똥폼이었네 

넘어졌을 때 어땠니? 
“이런 불운이 왜 하필 나에게…”, 또는 “지난 4년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리는구나…”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니. 몇 백분의 1초 상간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그 아슬아슬함을 아직 어린 너는 어떻게 견뎌왔니.

TV 화면에 잡히던 그 자디 잔 얼음 조각들이 넘어진 네 눈에도 보였을까, 관중들의 탄식이 들렸을까. 지난 시간 그 혹독한 훈련 과정과 어디선가 애태우고 있을 가족들이 주마등을 스치고 지나갔겠지? 세상에, 세상에 말이다, 이렇게 아슬아슬해서야 어디 살겠니. 자네들이 메달 따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것, 정식으로 사과한다. 정말로 미안해. 

나, 미안한 것 또 있다

파벌, 폭력, 왕따… 등 일반인들로서는 알기 힘들었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조국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이름까지 바꿔가면서도 빙판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그 선수, 안현수, 빅토르 안. 결국은 이번 평창올림픽 출전기회를 박탈당했던 그의 얼굴도 빅토르 안이라는 이국적 이름과 함께 오버랩 되더라. 

나, 미안한 것 또 있다.
그동안 당신들이 메달 따는 건 너무나 당연했기에, 국가대표가 되었으면서도 메달 따지 못해 좌절했을 너희 동료들을 생각하니 안쓰럽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어른들의 욕심이 만든 구조적 문제

금메달에만 집착하는 비뚤어진 풍토를 꼬집으며, 나는 세련된 사람임을 강조하듯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말고 경기를 즐기라”고 대범하게 폼 잡으며 얘기한 것도 돌이켜보니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내 불찰이자, 잔인한 ‘똥폼’이었네. 부끄럽네.  

애썼다는 말도, 자랑스럽다는 말도 차마 못하겠다. 
미안하고, 고맙고, 고마워서 더 미안하다. 
자네들의 분투를 지켜보다 감격한 나머지 알량한 서푼 짜리 감상을 늘어놔서, 약한 소리 해서 또 미안하구나. 밤에 쓴 편지는 보내지 말랬는데, 이 편지를 되읽으면 감정 과잉에 낯 뜨거워지겠지만, 이번 만큼은 표현이나 문장 고치지 않고 그냥 털어놓으련다(오글거리더라도 잠시 참아줘^^) 

경기 끝나면 잠시라도 모든 것 내려놓고 후련하게 쉴 수 있기 바라네. 그런데 이런 말, 너무 식상하지? 여지껏 말한 그 숱한 미안함을 무릅쓰고서도, 이 말은 해야겠네. 애 많이 썼어…. 욕 봤다들.

잘못은 우리가 해놓고 자네들더러 고쳐달라 하자니 민망하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빙상 여자 팀추월경기의 팀웍 부재와 ‘왕따 논란’으로 온 나라가 지금 시끄럽네. 쇼트트랙이든 롱트랙이든 문제는 비슷하겠지. 기본적으로 어른들의 욕심과 권력욕이 만들어낸 잘못된 구조적 문제네. 자네들은 그 피해자이자 희생양이기도 하고. 그 어른들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 

올 겨울 보름 간, 그대들로 인해 행복했네
 
“나는 ‘바담 풍’ 하더라도 너는 ‘바람 풍’이라고 하라”는 게 도저히 말이 안되지만, 자네들이 나중에 지도자가 됐을 때는 지금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자네들은 스포츠맨십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사이좋게 지내주게. 같은 길을 걷는 동료이자 선후배로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파벌과 인적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주게. 잘못은 우리가 해놓고 자네들더러 고쳐달라고 하자니 참으로 민망하고 민망하네.

아직 올림픽은 끝나지 않았지만,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감동을 안겨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 전하네. 대견스럽네. 올 겨울 보름 간, 그대들로 인해 행복했네. 

못 난 어른이….

2018.2.20. 이강윤.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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