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평민련 결성과 평민당 입당...평민당 입장에서 본 1990년 3당합당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양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배경을 설명하는 이해찬 전 총리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첫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해찬 전 총리다.

재야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으로 출마해 원내 진출에 성공한 후 17대까지 5회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지역주의 정치가 활개를 치던 13, 14, 15, 16대 대선은 물론 이어진 총선들에서 당의 선거기획책임자를 맡았던 그는 지역주의 정치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때 책임총리를 맡는 등 우리 정당사를 반추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4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총 4회로 나뉘어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1987년 13대대선 후보단일화, 1988년 민평련 결성과 평민당 입당 얘기를 시작으로 1990년 3당합당 당시 평민당 입장을, ②편에서는 14대 대선, 1992년 통합민주당 창당 과정과 1994년 서울시장선거, 1995년 민주당 분열 및 국민회의 창당과정을, ③편에서는 1997년 15대 대선 및 집권 과정,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과정을, ④편에서는 16대 대선 그리고 참여정부 얘기를 전할 예정이다.

인터뷰 게재가 완료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터뷰 전문과 동영상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해찬 전 총리 인터뷰 전문 및 동영상


민통련, 양김 후보단일화 위해 DJ 주저앉히려 했다. 그러나 극대화된 지역주의로 불가능

이해찬 전 총리는 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를 정당 구조의 비민주화와 극대화된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87년에는 정당이 말하자면 더 사당화 돼 있었다. 그래서 의사결정구조가 없는 상태여서 ‘그럼 어떻게 단일화를 할 것인가,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견해 차이가 많았다"며 당시 정당구조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전 총리는 당시 민통련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극대화된 지역주의로 인해 실패했다고 진단하며 당시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가 오류였다는 세간의 지적에 동의했다.

그는 당시 지역주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에 대해 "문익환 목사가 중심이 돼 비판적 지지를 하는 선거캠페인도 했다. 도저히 이것 가지고 당선이 안 된다는 전망이 서니까, 그 때는 DJ를 다시 주저앉혀야 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히며 "이미 양쪽에 극대화된 지역주의 때문에 주저앉힌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치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 87년 대선을 기점으로 본격화되면서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평민당 창당 시 여권 자금지원설, ''''사실 아니다''''

평민당 창당 시 여권 쪽 자금이 많이 들어갔다는 의혹에 대해 이 전 총리는 "그것은 아니다"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 우리가 당에 입당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 캠프에 선거운영에는 관여를 했다. 특히 저는 그 때 깊이 관여를 했다"며 "포스터 같은 것 만드는 일도 제대로 못할 때였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쩔쩔매고 그랬다"고 덧붙였다.

DJ ‘평민당 입당 결정 안해주면 나도 정치 못한다’ 압력...출마 지역별로 정당 선택하기도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의 재야 운동가들 집단으로 평가받는 평민련 결성에 대해 그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평민당이 거의 해체 위기에 빠졌다"면서 "정치적으로 극우보수세력인데 노태우에 대응할 수 있는 진보민주개혁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결성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평민당 입당에 대한 질문에 그는 평민당이 망가지면 정치적으로 상당한 급진주의가 올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광주항쟁부터 시작해서. 그쪽이 정치적으로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굉장한 레디컬리즘으로 흘러가기가 쉽다"고 당시 호남 분위기를 전하며 "그래서 저는 호남출신이 아닌데, 이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굉장한 불균형과 진공이 오겠다 싶어서 평민당을 살려 나중에 재통합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소회했다.

이어 "민통련 쪽에서 정치할 사람들을 규합한 것이다. 그래서 평민련을 만들었다.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2월 달인가, 1월 달에 정식으로 입당을 했다. 그래서 총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고 덧붙였다.

그는 평민당 입당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당 압력이 있었다는 점도 밝혔다.

이 전 총리는 "당시 김대중 후보가 재야사람들과 같이 안병무 박사 집에서 한번 만나 저녁을 했는데, 그 때 의원들이 다 떠나니까 교섭단체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까지 내려갔었다"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중재 의원까지도 당을 떠나려고 했던 참이었으니까..."라며 당시 평민당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인사들과 저녁을 하면서 ‘나도 이제 여러분들이 들어와서 같이한다면 정치를 더 하겠지만, 대선 떨어지고 의원들도 다 떠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도 정치를 못한다. 그러니까 빨리 결정을 해달라. 당신들이 들어와서 같이 정당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이 당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이 포기할 것이냐를 빨리 결정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요청을 했다"며 김 전 대통령의 얘기를 전했다.

광주 청문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해찬 전 총리 ⓒ폴리뉴스
재야세력의 평민당 입당은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뒤 처음 치러지는 88년 13대 총선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라는 이변을 연출했다.

88년 총선에서 민정당 124석, 평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공화당이 35석을 차지하면서 이른바 지역주의에 기반한 3김정치가 막을 올렸고 김대중 평민당 전 총재는 제1야당으로서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비화를 소개하면서 재야 사람들 사이에서 출마 예정 지역별로 당을 선택하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파고다공원사무실에서 ‘그럼 당신은 통일민주당으로 가서 출마하고 나는 평민당으로 가겠다, 그래서 국회에서 다시 한 번 양 지역 통합하는 것을 만들자’고 해서 노무현전 대통령은 당시 통일민주당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노태우 중간평가 두고 평민당과 통민당 입장 엇갈려...3당합당 단초 제공

총선 이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중간평가를 받게 돼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은 입장 차이를 보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정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합당을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총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받게 돼있었지 않았겠나. 그걸 놓고 당에서 전략대책이 있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쪽에서 통일민주당에서는 중간평가를 하자는 주장을 했었고, 평민당 쪽에서는 중간평가는 실익이 없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지방자치제를 확실히 실시하는 전제로 중간평가를 잡았다. 말하자면, 중간평가를 면제해주고 대신 지방선거를 확실하게 얻어내는 쪽으로 당의 전략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91년도에 지방의회선거를 먼저 하고 95년도부터는 자치단체장선거까지 같이 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했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과 견해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방자치단체(91년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게 되고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어떻게 됐느냐하면, 의석도 적은데다가 도저히 민주당(통일민주당)의 역량이 평민당보다 약했다. 그러니까 다시 당을 통합해서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적어진 것 아닌가, 그래서 3당합당 하는 쪽으로 김 대통령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 발언은 중간평가를 둔 평민당과의 입장과 통민당 입장이 엇갈렸지만 평민당 주장을 관철시켜 지방자치 기반을 만들었고,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선택하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광주사태 발포명령자 끝내 못 밝혀 아쉬워...발포명령 정황 확보했지만 검찰 수사 안 해

89년 월 열린 국회 청문회는 의원들을 일약 스타로 만드는 전기가 됐는데 그 중 광주사태 청문회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총재는 "텔레비전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국회의원들이 증인들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질의 답변하는 걸 생생하게 보게 됐다"며 "그 전까지는 다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 이였는데, 그게 처음으로 유일하게 직접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과 신선도가 대단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광주사태의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종결된 상황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발포명령 정황까지는 우리가 거의 잡았는데, 이제 수사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사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거기까지 못 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94년인가 95년인가 검찰이 수사를 하게 됐는데, 우리가 냈던 광주항쟁일지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가지고 검찰이 기본수사계획서를 세웠다. (책을 내보이며)요새 나와 유시민 의원이 같이 쓴 책인데, 청문회 토대로 해서 쓴 책이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검찰이 수사계획서를 세워가지고 했는데,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시키면서 발포명령에 관한 것은 수사를 안 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이후에도 수사할 순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 사람들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나중에 복권된 것 아닌가. 이 사건에 관한 것은 그걸로 종결돼버린 것"이라며 "일사부재리는 아니지만, 그 수사가 끝나고 나서 발포명령에 관한 수사를 다시 재개하긴 어려운 것이다.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3당합당 제안 DJ에게 먼저 했지만 거절...박철언 중간 역할

이 전 총리는 90년 1월 22일 벌어진 민정, 통합민주, 신민주공화당 간의 3당합당과 관련해 노태우 대통령이 김대중 총재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당시 저와 노무현 대통령, 이철 의원 등 몇 사람들이 양당 통합운동을 추진했었다. 의원직도 사직하고 했었다. 그런데 이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90년 말, 91년 초 3당합당으로 바뀌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김원기 의원이나 이런 분들에게 증언을 들어보면 잘 알 것"이라며 "3당 합당하자고 먼저 제안이 있었다. 박철언이 여기서 심부름을 했다"고 덧붙였다.

제안 내용에 대해 그는 " 평민당과 둘이 하자는 것"이라며 " 과반수가 되는 거니까 하자라는 제안이 있었죠. 그걸 이제 김대중 총재가 서로 당의 정치노선이 다르다 이렇게 하는 건 안 된다 해가지고 그때 그 제안을 거절 했죠"라고 합당 제안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 3당합당 당시 뒷 얘기를 나누고 있다 ⓒ폴리뉴스
이어 "그 바람에 이제 노태우가 혼자 정부를 끌어가기 어렵겠다고 판단이 되니까 김영삼 대통령 쪽 통일민주당에 또 제안을 해서 합당을 한 거죠"라고 말했다.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에서 개헌선인 2/3를 넘는 218석을 확보하고, 지역에 기반한 4당구조를 보수 대 혁신의 양당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계파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공천 및 당직배분으로 당내갈등이 지속됐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으로 1992년 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299석 중 149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같은 해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이종찬 ·박태준 ·박철언 등 2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혼란도 있었지만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41.4%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됨으로써 민자당은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3당합당과 대연정은 다르다...대연정 제안 반대 입장 밝혀

3당합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제안한 ''''대연정''''과의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질문에 참여정부 시절 총리를 역임한 그는 "아니에요. 내가 그때 총리를 할 때인데..."라며 3당합당과는 다르다는 점을 먼저 강조한 뒤 말을 이어갔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자꾸 장관 해임안을 국회에서 내지 않습니까. 김두관 장관 해임안도 내고 윤광웅 장관 해임안도 내고 그러니까 이게 국정을 끌어가기가 어렵다, 실제로 어렵죠"라며 연정 제안 당시 정치 상황을 언급했다.

이어 "그렇게 되니까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이게 도저히 지역구도가 이렇게 해갖고는 정치가 안정이 안 된다, 누가 대통령을 해도. 그래서 연정안을 먼저 제안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라고 밝혔다.

이 전 총리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연정에 반대를 했었다고 소회하면서 제안 방식에 있어 노 전 대통령과 스타일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굉장히 중요한 제안인데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합당을 하려해도 사전에 막후교섭이라는 게 있는 것 아닙니까. 노태우 대통령도 힘들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한테 막후로 제안을 한 것 아닙니까. 비공개라고 하는 전제하에서. 또 그걸 받은 사람도 우리가 안하면 그만이지 내가 제안 받았다는 얘길 공개할 필요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게 일종에 하나의 정치하는 서로간에 신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연정 같은 것도 하려면 진정으로 하려면 사전에 조율이 돼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전조율 없이 공개적인 선언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거든요. 사전조율을 해가지고 안되면 제안을 안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성격차이가 있는 거여요. 스타일.." <②편에서 계속>

인터뷰 ; 김능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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