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나경원 ‘반민특위 폄훼’ 맹비난
친일파 청산 위한 ‘반민특위’, 이승만 정부 방해로 좌초
친일 인사·일제 경찰 체포했지만 1명도 처벌 못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제공>

 

[폴리뉴스 이지혜 인턴기자]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에 대해 “국민 분열을 가져왔다”고 말한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이 여론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밝히며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를 전수조사하여 가짜 유공자를 가려내고,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서훈 수여를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나 원내대표는 지난 14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본인들 마음에 안 드는 역사적 인물에 친일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 아닌가. 우파는 곧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문 정부의 역사공정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해방 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 또 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해 문제가 됐다.

반민특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1949년 1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약 8개월간 활동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원활한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친일청산을 위한 위원회에 대해 ‘국민 분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이어지자, 나 원내대표는 15일 인터뷰를 통해 “반민특위 활동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민특위가 왜 ‘국민 분열’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 파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여론의 분노, “친일 기득권 세력 대변하나”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과 친일 잔재 청산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나 원내대표의 돌발적인 ‘반민특위’ 폄훼성 발언에 여·야의 맹비난이 쏟아졌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나 원내대표는 정녕 ‘친일 반민족 세력의 대변인’임을 자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자신의 역사왜곡 발언을 취소하고 국민과 역사 앞에 석고대죄하라.”고 촉구했다.

김동균 정의당 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반민특위 때문이 아니라 반민특위가 좌초됐기 때문에 국민이 분열됐던 것”이라며, “친일 청산은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고 꼬집었다.

또한 “한국당은 친일의 ‘ㅊ’자만 나와도 과민반응하면서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왜 그런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그러는가”라고 힐난했다.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도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 실패한 반민특위가 나경원과 같은 국적불명의 괴물을 낳았다.”고 강도 높게 반박했다. 

여론 역시 들끓었다. 한국PD연합회는 15일 성명을 내고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대다수 국민의 상식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동안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PD들의 성과에 찬물을 끼얹는 망언이다”라며 개탄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 후 기념촬영 . 좌측 상단 원내는 반민특위 조사관 겸 총무과장을 지낸 이용원씨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 후 기념촬영 . 좌측 상단 원내는 반민특위 조사관 겸 총무과장을 지낸 이용원씨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친일 청산’ 주장한 반민특위, 정부의 방해로 동력 잃고 ‘실패’

제헌헌법 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에 근거하여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긴급동의안이 통과됐다.

기초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만들어 1948년 9월 7일 통과시켰다. 

반민법에는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독립운동가를 박해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일본 통치 하에서 일정 직위 이상에 있던 자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될 수 없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반민특위는 1949년 구성 이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광수·최린·최남선 등 친일 혐의가 있는 주요 인사와 노덕술·김덕기 등 독립지사를 검거·고문했던 친일 경찰 등을 체포했다.

정부와 친일 경찰 출신들은 끊임없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당시 친일파는 이승만 정부의 정권 유지에 핵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 당시 ‘반공’을 목적으로 대거 등용된 친일파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반민특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간부들에 대한 뒷조사, 암살 테러 음모, 국회프락치사건, 관제 시위 등을 일으켰다. 

1949년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등은 정부의 허락을 받고 반민특위 산하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튿날 무장한 40여명의 경찰을 반민특위 본부로 출동시켜 특경대 요원 35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이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반민특위가 활동 기간 동안 취급한 반민족 행위자는 688명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특별검찰부에 송치돼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293명에 불과했다. 1949년 10월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 판결 받은 사람은 78명에 그쳤다.

판결을 받은 자 중 징역형 이상은 불과 12명이었다. 이마저도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 등 폐지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며 모두 풀려났다. 결국 친일파를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셈이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이후 한국사회에서 친일파의 권력을 공고히 만들었으며, 제때 친일청산을 이루지 못해 현재 친일 혐의 인물의 평가를 어렵게 했다는 평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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