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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네 번째 인터뷰 인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①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
1. 87년 6월 항쟁 이전의 진보정당 흐름과 상징될만한 일들을 짚어 달라.

1987년은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이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해입니다. 1987년 이전에 진보정당은 어느 정도 성장하던 시기도 있었고 또 이 탄압에 의해서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그런 시기도 있었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1987년 이전의 진보정당의 역사는 1987년 이전의 한국의 정치사의 반영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역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역사와 그 생명을 함께 했다는 겁니다.

건국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그나마 민주주의가 보장됐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꽃을 피웠고 또 민주주의가 짓밟히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함께 짓밟혔습니다. 민주주의가 잠깐 숨통을 틔우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잠깐 숨통을 틔었고 민주주의가 왜곡되던 시절에는 진보정당도 함께 왜곡되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한국에는 진보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다른 나라는 이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보수정당, 진보정당이 강력한 양대 축으로서 민주주의를 갔다가 서로의 경쟁과 또는 타협에 의해서 발전시켜온데 반해서 우리는 일제하시대에 독립운동부터 시작해서 또는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 1945년에서 48년 사이의 그 해방공간에서 좌우대립이 극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보수 세력 위주의 남쪽정부가 들어서면서 진보세력이 있긴 있었지만은 상당부분 이렇게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 진보당이 창당이 되었고 이 진보당이 이승만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을 하게 되자 1956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10석 이상의 의석을 얻었고 그리고 또 195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후보에 이어서 2위로 조봉암 후보가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2위를 차지하게 되자 여기서 정권적 위기감을 갖게 된 이승만 독재정부가 진보당을 갖다가 탄압하게 됩니다. 1958년 만들어진 새로운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가장 먼저 탄압한 대상이 진보당이었고 결국에 당은 해산당하고 조봉암 당수는 이제 사형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떤 그 진보정당의 갑작스런 혹한기가 시작되었는데 1960년 4.19혁명 일어나면서 다시 이른바 진보정당, 혁신정당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1961년 5.16쿠데타에 의해서 모든 정당들이 해산당할 때 함께 해산 당했고 그러나 다른 보수정당들은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지만 이른바 혁신계열은 계속해서 반공법이라거나 여러 가지 정권에 탄압에 의해서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오랜 기간의 군사독재 하에서 진보정당은 살아남기 힘들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진보정당들, 통일사회당이라거나 이런 정당들은 간판만 사실은 갖고 있는 정당에 불과했고 대중정당으로서 활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습니다.
특히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독재세력이 자신의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일종의 관제진보정당이라는 그런 발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입법회의에 참여도 시키고 또 민정당 후보를 갖다 출마시키지 않음으로써 진보정당 후보가 당선되게 만들어서 국제사회에 한국에도 진보정당이 있다는 그런 시늉을 하는 도구로 이렇게 악용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의 독재정치 하에서 민주주의가 신음하고 있을 때 진보정당도 역시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그래서 사실상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서 진보정당도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생각됩니다.

2. 그 이전부분들은 다들 작고하셔서 그 당시 활약했던 분들로부터 직접 들은 것들은 없나

저는 진보당에 대해서는 故정태영 선생이라고 우리나라 사민주의 정당에 관련된 저술을 많이 하셨고 또 진보당에 직접 참여하셨고 또 가장 오래까지 생존해 계시면서 이렇게 활동을 해오신 분들로부터 진보당의 활동에 대해서 얘길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1980년대에는 70년대와 80년대의 진보정당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는가. 대표적인 사례 중에 하나가 통일사회당입니다. 서울역 바로 부근에 통일사회당이 서울역 부근에 빌딩옥상에 있는 그런 옥탑 방이 정당사무실이었습니다. 책상 한두 개밖에 놓을 수 없는 그런 좁은 사무실이 당시 대한민국 거의 유일한 진보정당의 현주소였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은 1979년 이른바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이른바 YH여공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고 그것을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끌려나오게 만들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 YH여공들이 처음에 농성하러 들어가려고 했던 곳은 신민당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고 바로 그 당시에 우리나라 유일한 노동자들이니까 진보정당에 가서 농성을 하면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이렇게 해서 통일사회당에 갈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알아보니까 통일사회당이라는 데가 그렇게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긴급히 점거농성 장소를 갖다가 변경해서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게 됐던 겁니다.
만일에 그때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었다면 그 YH여공들은 제가 직접 YH 당시 점거농성을 했던 분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었다면 당연히 진보정당에 가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어찌 보면 웃지못할 이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짓밟히면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도 없고 그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그런 제대로 된 어떤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암울했던 그 시기의 어떤 특징을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니냐 이리 생각됩니다.

3. 87년 6월 항쟁이 진보정당의 꽃을 피게 했는데 6월 항쟁 주역중의 한분인데 당시 6월 항쟁의 흐름과 진보정당의 태동 이 부분에 대해 말해 달라

저는 사실 6월 항쟁을 전후에서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1985년 이른바 유화국면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으로 진보정당 얘기가 나왔습니다. 당시에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이런 어떤 진보정당이 한국의 민주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지만 또 그러한 근본적인 변혁을 또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그런 진보정당의 필요성 이런 것들이 얘기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존재하던 야당 민주당은 좀 진보정당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노선 면에서 부족한 게 많았기 때문에 또 다른 어떤 진보정당 활동의 제약이 상당히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진보정당의 필요성은 얘기됐지만 구체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습니다.
진보정당 건설이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계획으로서 고민하게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987년의 6월 항쟁과 뒤이어서 온 87년 7월~9월의 노동자대투쟁 때문입니다. 사실상 여전히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또 그 후에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긴 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6월을 기점으로 한국의 민주화는 시작되었고 그렇다 면은 이 진보정당의 역사가 민주화와 더불어서 부침을 거듭해온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민주화가 역전되기 힘든 그런 상황으로 이제 전개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진보정당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때 이른바 독자후보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큰 논쟁이 되긴 했습니다만 사실 그 독자후보를 굳이 내려고 했던 그 배경에는 그걸 통해서 1988년에는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그런 계획이 있었던 것이지 한 번의 어떤 대통령선거에 전세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던 건 사실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987년 대선을 치르면서 1988년에 어찌 보면은 87년 이후의 최초의 진보정당이라고 할 민중의 당이 창당하게 되었고 민중의 당 이름으로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도 이제 참여하게 됩니다. 참여하게 되고 그 후에 한겨레민주당이라거나 또는 여러 가지 이제 변천을 사실 겪게 됩니다만 분명한 것은 1987년이 한국진보정당의 새로운 출발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이죠.

4. 87년 13대 대통령선거 양김의 분열, 민주세력의 분열이 지금까지도 피해가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에 백기완 후보가 이틀 전인가 사흘 전에 사퇴를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이야기를 해 달라.

당시에 독자후보 진영은 여러 가지 이제 목표도 있었고 또 동시에 고민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필요성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독재세력의 재집권을 막아야 된다는 그런 국민적 요구와 시대적인 어떤 목표가 사실 또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왜 백기완 후보는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는가, 왜 며칠 전이긴 하지만 사퇴를 했는가 하는 것은 일단 백기완 후보의 출마를 통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필요성과 또 그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방향에 대해서는 알릴 수 있는 만큼은 알렸다라고 저희들은 보았습니다. 보았기 때문에 진보정당을 창당하기 위해서는 백기완 후보가 투표당일까지 사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퇴하더라도 진보정당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또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된다는 그런 목표와 동시에 대선에서 단일화를 통해서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어야 된다는 그런 국민적 요구도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사퇴를 했습니다.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를 했고 아마 단일화가 좀 빠르게 이루어졌더라면 또 이런 사퇴가 또 사퇴시점도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표를 분산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물론 당시 백기완 후보의 지지율 자체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적었지만 정치적 명분으로서는 군사독재정권의 재집권에 종지부를 찍어야 된다는 그런 목표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은 수용을 해야 된다고 봤던 것이고 동시에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또 나름대로의 어떤 목표는 며칠 전 사퇴를 하더라도 막판 사퇴를 하더라도 부족하지만 이루어낼 수 있다고 봤던 것이죠.

(견해가 거의 일치됐나)

다수는 사퇴하는 게 맞다고 봤고 소수는 사퇴하면 안 된다고 봤던 것이죠. 그러니까 완전히 일치를 본건 아니지만은 다수의 견해는 사퇴하는 게 맞다고 봤던 것입니다.

5. 사료의 가치가 있으니 구체적 이름들도 이야기를 해 달라, 지금까지도 유의미한 분들이 계시다면 말해 달라. 공개적으로 토론을 했던 것 아닌가.

아니요. 그게 그 당시에는 뭐 사실 어찌 보면 1987년이니까 이른바 변혁적인 운동을 하는 그런 세력들이 상당부분 이렇게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을 갖다 뒷받침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의구조가 이중화 돼있었어요. 그러니까 공개적인 논의구조가 있었고 나머지는 또 이렇게 다 모일 수 없으니까 따로따로 이렇게 단체별 의견, 조직별 의견 이런 식으로 사실 돼있습니다. 돼있어서 애초부터 백기완 후보의 생각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소신은 분명했지만 당시 12월 선거는 단일화를 통해서 정권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이 대단히 강했습니다.

(백기완 후보 본인은?)

본인도 대단히 강했던 것 이구요. 그리고 또 여기 참여했던 분들은 단일화도 중요하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봤던 것인데 선거가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끝까지 후보로 남아있는 것이 진보정당 건설에 어느 정도 더 도움이 되느냐, 혹은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시대적 명분인 단일화를 갖다가 촉구하면서 사퇴를 갖다가 했을 때 그것이 진보정당 동력을 갖다가 별로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향후에 진보정당 건설에 정치적 명분을 더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그러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그런 판단을 하는 세력들도 사실 있었습니다.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은 그 이후에도 심각하게 백기완 후보의 사퇴,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하는 사퇴에 대해서 그렇게 뭐 심각하게 내부에 분란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시에 재야세력에서 변혁운동세력이 사실상 한축으로 있었다?)

그렇습니다.

6. 그때 진보정당을 함께 했던 그런 세력들을 크게 나눠본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나.

네, 진보정당을 함께 했던 부분은 노동운동을 했던 세력들 그리고 노동운동을 했던 세력들은 당시에 이른바 인민노련 있었고 그 이외에 여러 좌파노동운동을 하던 세력들이 대표적이고 가장 적극적이었던 부분은 인민노련과 이른바 제헌의회그룹이 가장 어떤 중심이었다라고 저는 기억을 하구요. 그다음에 나중에 이제 뭐 민중연합 이렇게 불려 지게 되는 오세철교수 등을 포함한 그런 분들 그다음에 이제 청년진보단체들 이런 부분들이 여기 참여를 했습니다. 참여를 했고 그다음에는 문화계인사들 대표적으로는 임진택씨, 그다음에 우리 또 환경운동을 그 후에 하게 되었던 최열 총장 등이 있습니다.

(최열 총장도 처음에 진보정당 참여했네요)

예. 참여를 했었습니다. 참여를 했었고 그리고 이애주 서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뭐 이런 분들 그래서 당시에 문화진영은 굉장히 두텁게 사실 참여를 했었습니다. 그다음에 학생들, 각 학교 학생조직들 이런 부분들도 상당히 참여를 했죠. 그래서 저는 뭐 그 후에도 13대 대선이후로 한 번도 대선에 쉬어본적이 없는데 13대 대선에서의 그 어떤 열기 이런 것들은 오히려 그이후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자발적인 참여라거나 이런 것들은 이제 뜨거웠다고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농민세력은 어땠나)

당시에 농민운동은 전농충북도연맹정도다.

(전농의 지역연맹정도?)

지역연맹정도가 참여를 했고 나머지 전농, 그 전농은 지금 전농하고 좀 다릅니다만 참여를 하지 않았고 그다음에 대구경북지역의 농민회 조직들은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지역은 거의 이제 뭐 김대중씨를 지지하거나 또는 후보단일화도 있었구요. 이렇게 나뉘어져 있었죠.

7. 지금 민노당의 핵심은 민노총인데 당시에는 전노협의 조직이 있지 않았나)

당시에 전노협 전 단계였죠. 87년이면

(88년도 진보정당을 만든 그 시기에는?)

당시에는 그렇습니다. 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1990년 1월 달에 만들어졌으니까요. 전노협 전에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인노협(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이래서 이런 부분들이 전국적인 연대의 어떤 임시적인 틀은 있었습니다.

(대중조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조직들은 참여를 안했나)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참여하지 않고 나뉘어져 있었죠. 주로 이런 후보단일화 다 뭐 독자후보다 이렇게 나뉘어져 있었죠.

8. 요즘 민노당 즉 진보정당이 분열되는데 있어서 NL과 PD가 나눠졌다는데 이 당시에 노동운동세력 중에 NL그룹은 참여하지 않았나.

아, 그 당시에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뭐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일단은 노동운동의 초창기에 노동조합운동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방침을 갖다가 이렇게 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그럴 정도로 이렇게 노동조합조직이 견고하지 못했고 그러니까 NL, PD가 조정이 안 되서 하나의 방침을 못 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측면이 없는 건 아닌데 노동조합 자체가 아주 초창기 1987년이면 노동조합을 만든 지 몇 달밖에 안되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정치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 조합원들이 충분히 수용을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에서는 그런 이제 여러 가지 좀 독자후보냐, 후보단일화냐, 아니면 비판적 지지냐로 나뉘어져 있었던 문제가 있었고 또 노동조합의 허리와 아래 부분은 아직까지 이제 정치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그런 방침을 갖다가 못 정한 그런 상태였죠.

(노동운동세력 중에서 NL그룹은 참여하지 않았나)

참여하지 않았죠.

(왜 안했나, 민중의 당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이제 그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군정종식이 우선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진보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보다는 진보진영까지 좀 함께하는 그런 어떤 민주세력의 대통합이 우선이다, 이런 좀 정세판단을 그분들은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1987년에 대통령선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민중의 당에도 참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불거져나온 것이 이른바 전민련사건입니다.
전민련사건이라고 하면 1987년 이후에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다시 찾아오면서 여러 민주세력들 또 이제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 세력들, 굉장히 폭넓은 세력들의 전국적인 연대체로서 전민련이 결성이 됐었습니다. 그 전민련 결성을 한 후에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은 전민련의 어떤 정치적인 진로와 관련된 것입니다. 전민련은 독자적인 어떤 정치세력화의 토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전민련은 이른바 보수야당 민주당과 전략적인 제휴를 할 것인가,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굉장히 민감한 문제가 사실 되었던 것이고 결국에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전민련이 앞장선다는 결의안이 상정됐지만은 전민련 중앙위원회에서 그게 부결됐습니다. 부결되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것이 바로 이제 민중당입니다.
그래서 1988년의 민중의 당은 1987년 백선본(백기완선거대책본부)에 참여했던 세력을 중심으로 선거를 앞두고 급조되었고 선거후에 의석을 제대로 얻지 못해 해산당하면서 진보정치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중장기적인 진보정당 건설에 나갔는데 전민련이라는 최대의 어떤 그런 이른바 민중운동연합단체에서 독자정치세력화가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함에 따라서 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민중운동진영의 부분적인 참여라는 약점을 안고서 추진이 되었고 그것이 1990년 민중당 창당으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민중당에 노대표도 참여했나)

저는 뭐 내용적으로는 사실 참여를 한 것인데...

(진보정치연합에서 참여를 했는데...)

저는 그때도 그 당시 이제 빈민층의 노동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고 제가 1989년에 구속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속되기 전부터 논의는 시작되었는데 제가 구속된 직후에 민중당이 창당이 되었고 그래서 제가 또 석방되기 전에 민중당이 해산됐기 때문에 제가 이제 실질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던 거죠.

(민중당도 92년 선거를 하고 해산됐나?)

바로 해산됐죠. 92년 4월입니다.

(민중당 출신들이 그 이후 신한국당에 입당을 하죠?)

그렇습니다. 이재오, 김문수, 이우제 대표적으로는 그 세분이죠. 그 세분이 당시 그 신한국당에 입당하였고 장기표씨는 행동을 같이 하진 않았습니다.

(민중당의 맥도 사실 끊긴 거네요. 지도부로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완전히 분화됐죠. 일부는 지금 한나라당에 가있고 또 일부는 민주당에도 있고요. 또 일부는 지금 진보신당으로도 와있는 거죠.

(이것이 92년 대선 앞두고 국민승리21로 다시 진보세력이 모아지는 건가?)

97년 대선이지요.

(92년 대선 때는 어찌된 건가)

92년 대통령선거 때에는 92년 총선이 4월에 있었고요. 대통령선거가 92년 12월 달에 있었는데 총선에서 이제 의석을 얻지 못하고 2%도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민중당은 자연히 이제 해산됐습니다. 민중당이 해산된 뒤에 진보정당운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서 사실은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부 좀 상층명망가들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더 이상 힘들다고 하면서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이우제 이런 분들은 이제 다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남은 사람들 상대적으로 좀 연령도 좀 아래인 지역에 이렇게 있는 이런 분들은 진보정당운동을 계속 하자라고 해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내에서는 민중당 해산 이후에 즉각적인 진보정당재건론과 그다음에 좀 이렇게 시간을 갖고서 준비를 더 하자라는 그런 견해로 나뉘어졌고 당시 저는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순 없다, 민중의 당부터 민중당까지 실패한 그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해내고 실패에 이르게 됐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시 당을 건설하는데 급급해 한다면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진보정당에 더 나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서 시간을 충분히 갖고서 이 진보정당 건설에 장애물을 좀 제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자, 이런 입장을 택했습니다.

(뭐가 문제였나?)

저는 당시 진보정당 실패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라고 봤습니다. 하나는 뭔가 하면은 이 진보정당을 하면서 노동운동의 공식적인 그러한 지지를 바탕에 두지 못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제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조합간부라거나 여러 가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긴 했지만은 당시에 전노협이라거나 이런 데로부터 공식적인 지지를 갖다가 받지 못하고 출발한 점이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 이구요. 두 번째는 민족민주운동진영의 합의에 기초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민련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일부의 동의만으로 이렇게 정당을 만들다보니까 민중당이 창당된 순간부터해서 해산될 때까지 내내 가장 어떤 괴로웠던 것은 이른바 민정당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 진보정당에 동의하지 않는 또 다른 어떤 민중운동세력과의 갈등, 대립, 여기에 엄청난 어떤 에너지가 사실은 소모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지형이 조성되어야 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사실 보았고 저는 그래서 그걸 공개적으로 아예 글까지 써서 이제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92년 대통령선거 때는 당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후보로 이렇게 어찌 보면 진보정당운동 차원에서 참여를 했고요. 그리고 1996년 총선 후에 드디어 이제 1997년에 대통령선거 때에는 두 가지 문제가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는 당시에 전민련의 후신인 전국연합과의 대화 속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어떤 동의가 일정하게 이렇게 확인이 되었고 당시 갓 만들어진 민주노총이 그전과 다르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의 공식결의를 통해서 독자적인 정당건설에 나선다는 그런 이른바 참여와 지지가 가능하다는 게 확인됐기 때문에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을 해서 국민승리21을 만들었고 국민승리21 만드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전국연합의 참여를 갖다가 끌어내고 또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그런 어떤 과거의 진보정당이 넘지 못했던 그런 이제 한계를 넘는 어떤 그런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97년 국민승리21을 만들게 되었던 거죠.

9. 96년도 총선 때는 진보정당이 없었나.

예, 없었고 96년 총선이 4월에 있었습니다. 근데 그 선거 때는 진보정당은 없고 또 진보정당이 곧 만들어질 가능성도 그 당시에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보정당운동세력은 또 보존을 해야 되고 이런 차원에서 당시에 이제 이른바 기성정당들에 대한 어떤 국민적인 어떤 불신 그래서 개혁정당 제가 볼 때는 한 50% 진보정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른바 3김씨에 휘둘리지 않는 특히 양김씨와도 거리를 두고 있는 지역주의를 갖다가 완전히 극복하는 그런 이른바 정치개혁을 이루어내겠다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꼬마민주당 출신들 그다음에 이제 여러 가지 시민운동 쭉 해왔던 분들 그리고 일부 진보정당을 해왔던 분들 그래서 이런 분들이 1996년 선거에 일종에 좀 전술적인 그러한 동맹을 맺었던 거죠. 그게 바로 이른바 개혁적 국민정당 개혁정당으로 이렇게 출범을 했고 나중에는 이제 민주당과 통합을 해서 통합민주당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가 아마 기성야당과의 결합의 실험을 했던 시기가 아닌가 하는데 실제 겪어보니 어땠나, 개혁신당으로해서 민주당과 합당해서 민주당내에서 활동을 한 건데 물론 꼬마민주당이었지만)

어차피 제가 볼 때는 진보정당의 힘이 진보세력의 힘이 작은 상태에서는 결국에 그 당을 좀 진보적인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왜냐면은 그러한 이제 개혁정당을 만드는 과정 또 만들어진 개혁정당이 민주당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강령이라거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그러한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이렇게 수용이 됐습니다. 강령 같은 것은. 그러나 실제로 그 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문화, 정치문화는 당시만 하더라도 보스에 의한 공천, 하향식 공천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리고 그 뒤에도 다 밝혀졌습니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자금에 의해서 이렇게 이른바 금권정치 이런 것들이 그나마 적다고 하는 민주당에서도 민정당이나 신한국당, 한나라당에 비해 적다고 하는 민주당에서도 전혀 없진 않았어요.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저는 그걸 참여하면서 하나의 선거연합 차원에서 그 96년도 선거에 임했던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은 당을 함께 하고 철학과 노선을 함께 하는 그런 당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 이렇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혼재돼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의 선진화가 결국에는 정책중심으로 정체성이 좀 같은 사람들끼리의 어떤 정책중심 정당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본다면 당시의 통합민주당은 그런 점에서 한계가 많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10. 그 당시 지역구에 복권문제 때문에 출마를 못했었나

당시에 제가 강서을에 출마하기로 공천까지 받았습니다만 공천이 되지 않았고 뭐 그 후에 여기저기서 확인된 얘깁니다만 의도적인 사면복권 배제였다, 그 당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이 더 있습니다만 당시에 그 한나라당에서 자신들의 국회의원 당선율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어떤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인사가 출마하는 지역에서는 그거는 사면복권도 봉쇄해버리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11. 97년도가 그런 조건들이 마련되며 국민승리21로 됐는데 이때 어느 정도 세력들이 어느 정도 참여하나.

네, 96년에 국민승리21은 제가 97년 1월 달에 ‘말지’에다가 이른바 민주민중세력들이 총집결해가지고 97년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제안을 사실 했었습니다. 하고 바로 저희는 그 작업에 착수했는데 일단 민주노총은 그해 6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공식참여 결의를 했고 농민운동조직은 아직 뜻은 같이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또 농민운동이 민주당과 함께 지역에서 지방선거도 같이 하고 여러 가지 해온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그런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농민 부분은 한참 뒤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농민 부분은 이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나 이제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국민승리21에는 참여하지 못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빈민조직도 그 당시에는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러나 민주노총이 상당히 큰 힘이 사실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전국연합이 참여를 갖다가 했고요. 전국연합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참여를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뭐 이창복 의장을 포함해서 이창복, 천영세, 그다음에 최규영, 양재덕 이런 분들이 이제 참여를 갖다가 유기홍 전의원도 참여를 사실 했었죠.
그다음에 당시에 이제 진보정치연합 제가 대표로 있던 진보정치연합 그래서 실제로 국민승리21 출범선언문에서도 그렇게 돼있습니다만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그리고 진보정치연합 주요하게는 이 세 조직을 중심으로 하되 폭넓게 그래서 국민승리21에는 뭐 오세철 교수나 김세균 교수 같은 그런 어떤 분들 좌파지식인들도 참여를 했고 그다음에 장기표씨도 초기에는 참여를 했었습니다. 국민승리21 대통령선거까지는 참여했고요. 그리고 거기서 권영길 위원장을 이제 대통령후보로 추대를 해서 선거를 치렀던 거죠.

(이때 몇% 받았나)

이때 1.9% 받았죠.

(그 이후 실질적인 창당 작업에 들어간 건가)

그렇습니다. 국민승리21은 일단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정당작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19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저희들이 제안해서 원탁회의를 만들었고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98년 하반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9년도에는 이른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 날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죠.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정리 : 정찬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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