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1979),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1980), 미국 망명(1983), 후보 단일화 실패(1987)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다섯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신범전 국회의원이다.

이신범 전 의원은 196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자유의 종」을 발간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3선개헌반대와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총 4차례에 걸쳐 5년 8개월 동안 투옥생활을 했다. 1983년 미국망명길을 떠나 DJ와 함께 해외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87년 귀국, 당시 제1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 김광일, 노무현, 강신옥씨 등과 입당하여 정책실장을 맡아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96년 신한국당으로 15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98년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 ‘DJ 저격수’로 활동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국제 외교통으로 유명하다.

이신범 전 의원과 인터뷰는 지난 5월 10일 본사 회의실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 대담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뉘어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서울의 봄’. ‘김대중 내란 사건’, ‘미국망명’과 ‘87년 후보 단일화’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②편에서는 ‘3당 합당 불참’, ‘15대 총선’, ‘총풍사건’, ‘국정원 도청’ ‘YS와 DJ’ 등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굵직한 사건에 대해 다룰 계획이다. ③편에서는 공천혁신 등 우리 정당구조와 정치 문화 개선책에 대한 그의 지론을 전할 예정이다.


“서울의 봄”은 ‘평화의 봄’이 아니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민주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샘솟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이신범 전 의원은 당시 ‘서울의 봄’을 바라보는 입장이 명확히 달랐다. 이 전 의원은 당시에 대해 “저는 측근세력의 이반에 의해서 최고권력자가 제거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치열한 투쟁을 통해 후속쿠데타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10.26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보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혀 유신체제를 당분간 유지할 의사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는 이 전 의원을 비롯한 각계 각층 인사들은 ‘YWCA 위장결혼사건’과 같은 집회로 더 이상의 군부통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투쟁을 계속했다.

이 전 의원은 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대중씨가 큰아들을 보내 이부영씨와 함께 만났습니다. 그분 말씀이 ‘아버님께서 군부의 여러 가지 사태가 우려되니 자극하는 행동은 좀 삼가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야세력이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고 김대중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이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다 준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는다고 쿠데타가 안 일어나겠느냐, 그러니 투쟁을 해야 된다. 거기에 참여하지 못할 입장이라면 뭐 해라, 하지마라 이런 말씀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산건 공판(1972) 당시 이신범 전 의원(오른쪽).ⓒ폴리뉴스


그 당시 재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어있기 때문에 강력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막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에도 투쟁할 명분이 약해진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전의원은 당시 정치인들의 생각은 달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계속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희생을 무릅쓰고 군부세력에 투쟁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정치인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 시점을 잘 요리하면 사태를 피해 어떻게든 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YWCA 위장결혼사건 당시 상황에 대해 “명동에서 잡혀가는 현장에서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위장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밖으로 나와 명동파출소 앞에 가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밀려나오면서 하는 얘기가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는 거예요. 잡혀간 사람들에 대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었어요. 고문하는 내용이 ‘김대중이가 시켰다고 자백해라’ 였어요. 김상현 전 의원 같은 경우 그때 후유증인지 눈수술까지 하시게 됐고 백기완씨 같은 경우는 폐인이 되다시피해서 사경을 해매는 상태가 됐었다”며 참혹했던 고문 상황을 회상했다.

이 전 의원은 그런 사태를 보며 “이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하고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12.12사태때 국방부 앞에서 유혈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보고 “무혈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국방부 올라가는 비탈에 피가 흥건히 흘러 적군을 사살한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위장결혼사건 후에도 이 전 의원을 비롯한 여러 재야인사들의 민주화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는 “저나 몇 몇 사람들은 치열한 투쟁을 하기 위해서 위장결혼사건같은 집회를 계속해서 ‘군부에 의한 계속적인 통치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못 박고 넘어가자’고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이 예상했던 대로 위장결혼사건이 있고 약 2주가 지나 12.12반란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12.12반란으로 소위 군부쿠데타가 일어났고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상황을 제도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전의원은 재야인사들에게 “내년 봄에 군부 정치를 합법화할 정당성을 만들 테니 지금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해 봄에 아주 과감한 투쟁을 벌이자. 우리가 이기든지 지든지 다시 이길 수 있는 도덕적인 정치명분을 축적해 다음 투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 12.12 사태는 “박정희가 길러낸 친위세력들이 군부에 뿌리를 박고 있다가 다른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일으킨 쿠데타”였다고 규정하며 “권력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게 없었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정희 독재 정권이 무너졌는데도 민주화를 위한 정치 일정이 밝혀지지 않은 채 안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두환이 권력의 실체로 떠오르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80년 5월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집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계엄 철폐, 유신 세력 척결’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이 서울역에서 대규모 연합 시위를 벌였다.

서울역에서 연합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사회 혼란을 빌미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시위를 자제할 것을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에 참석한 55개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와 김종필 등 구공화당계 정치인을 체포 (5.17)하기에 이른다.

결국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되며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신군부의 탄압

1979년은 10.26사태와 명동YWCA 위장결혼사건, 12.12사태 등 한국 정치사에 있어 격동의 나날들이었다.

1980년에 접어들며 신군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신군부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이다.

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진출하려는 군중이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으로 회군했다. 하지만 당시 이 전 의원은 “회군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저는 회군을 반대했습니다. 남대문에서 대치했을 때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충돌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제가 서울역에 가서 지휘를 하더라도 절대로 회군하면 안된다, 전두환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해 수천명이 감옥 가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투쟁을 계속해야 된다, 그것만이 군부쿠데타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지휘를 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군중이 모였고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퇴각을 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진 거죠. 그리고 그 퇴각의 뒷사태는 엄청난 탄압으로 이어졌고 광주학살이 일어난 거죠”라며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빌미를 제공한 ‘서울역회군’을 비판했다.

6월 17일, 이 전 의원은 용산역과 고속터미널 몇 군데에 광주 학살 현장을 찍은 사진을 살포하며 광주 학살의 잔혹함을 서울에 알리는 활동을 하며 은신해 있던 중 체포되었다.

당시 복학생이었던 이 전 의원은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어 제명당했다가 3월에 형식상 복학됐지만 지명수배상태였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했다. 김대중 씨가 배후에서 ‘광주 항쟁’을 주동했고 이 전 의원이 전국의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하며 가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전모에 대해 이 전 의원은 “당시에 영향력 있던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 한 그룹이 있고, 재야에 문익환 목사가 대표로 있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약칭 국민연합이라는 재야단체가 있고, 청년단체로 민주청년협의회라는 복학생단체가 있는데 그 복학생단체는 70년대에 감옥에 갔다 온 청년학생 200여명이 결성했던 인권민주화운동단체입니다. 그 복학생단체에 제가 상임위원회 의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에 서울대에는 복학생수가 상당수 됐기 때문에 복학생들이 재학생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형태로 학생운동이 전개됐습니다. 계엄사령부는 12.12사태 이후 권력을 공고화하기위해 12.12사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각본이 필요했고 그래서 어떤 세력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줄거리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작을 하다 보니 재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시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것을 복학생들이 조종했다, 그 복학생은 국민연합이 조종했다, 그 국민연합은 김대중씨가 조종했다, 이렇게 네 개의 단계로 줄거리 조작을 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만 해도 당시 무슨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강연 다니고, 또 저희들 학생들이 볼 때는 김영삼씨하고 두 분이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마치 자유로운 선거가 올 듯이 착각을 하고서 두 분이 과잉경쟁을 해 오히려 민주세력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복학생 중에도 김대중씨와 가까운 분도 있었고 소수는 김영삼씨와 가까운 분도 있었는데 저만해도 김대중씨의 ‘과잉정치판동’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독자적인 투쟁을 통한 신군부 분쇄가 당시 우리 목표였는데 체포된 다음에 억지로 이야기를 갖다 붙여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라며 이 전 의원은 자신이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이어서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보면, 김대중씨가 문익환목사에게 지시하고 문익환목사는 이신범에게 지시하고 이신범은 이해찬에게 지시하고 이해찬은 심재철에게 지시해서 폭동사태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줄거리였다며 “전혀 사실도 아닐 뿐 아니라 아무런 증거도 없는 조작된 줄거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이 전의원이 교도소에 수감 중 이었을 때 겪은 일화를 얘기하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판 배후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과 이 학봉 대공차장이었다고 회고했다.

육균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이 전 의원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2명이 찾아와 “역사를 좌우하는 일이니 잘 듣고 협조를 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해보라고 그러니까 네가 김대중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것을 그대로 넘어갈 수 없으니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협조를 해라, 김대중씨가 시위를 조종했고, 시켰고, 그대로 했다고 법정에 진술해주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겠고, 미국을 보내달라면 미국을 보내주겠고, 국회의원 시켜달라면 국회의원도 시켜주겠다”며 이 의원에게 거짓증언을 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이 나중에 알아보니 전두환씨가 시킨 일이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국회의원 시켜주겠다는 말이 그 안에서 제가 들을 때는 참 우스꽝스럽게 들렸지만 사실은 신군부는 야당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었다”며 회고했다.

이 전 의원은 그들의 협박성 요구에 “당신들이 지금 김대중씨를 사형을 시키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그 사람하고 아무 관계가 없지만 그런 영향력 있는 정치인을 사형시켜서 되겠느냐, 나는 협조할 수가 없다”며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협박도 하고 많은 종용과 압력을 행사했어요. 그래서 아침에 공판정에 나가야 되니까 그전에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 그리고 이 문제는 내가 결정을 못하겠다, 나 혼자 어떻게 이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겠냐, 서울구치소에 있는 학생신분의 구속자 전원하고 내가 의논을 할 수 있게 해주면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가타부타 아침에 서울구치소에 있는 학생들 전부 모을 테니 가겠냐 이거에요.”라며 그들이 사건을 조작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다음날인 재판날, 군용호송차에 탄 사람들이 찾아와 이 전 의원에게 찾아와 “김대중씨가 시켜서 했다는 말이 정 하기가 어려우면 김대중씨가 시켰느냐는 말에 기억이 안난다고 대답해줄 수는 없겠냐, 거기까지만 해도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다”며 회유했지만 그는 “기억이 안나긴 왜 안나냐 그런 일이 없는데”라고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이어서 그들은 김대중씨가 시켜서 했느냐는 물음에 묵묵부답으로라도 있어달라고 끝까지 설득했지만 이 전 의원은 “나 그렇게 못한다, 이제 끝난 얘기니까 나 그냥 징역살기로 했으니까 더 이상 이 얘기 꺼내지 마시오”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해도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소신있는 증언을 한 이유를 묻자 “독자적으로 일어난 민주화학생운동을 김대중이란 정치인이 조종한 운동으로 몰아가는데 대해서 아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광주사람들이 들고일어난 일을 사전에 알지도 못한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 씌워 한 정치인을 사형시키려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강력히 투쟁했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이 전 의원은 가장 멀다는 진주교도소로 이감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2년7개월을 보내고 출소하게 된다. 이 전의원은 “김대중씨보다 하루 더 살고 나왔기 때문에 주범이 먼저 나오고 종범이 나중에 나오는 이런 사건이 세상이 어디있냐”며 웃어넘긴 사연도 털어놨다.

그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2007년 7월 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어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철저하게 조작되었던 점과 존재하지도 않았던 김대중 일당을 만들어 공식이름을 ‘김대중 일당 내란음모사건’이라 부른 것에 대해 재차 비판했다.


83년, 민주화운동을 위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다

이 전 의원은 82년 12월 24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이듬해인 83년 2월 16일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국내에서는 말 한마디만 하면 와서 잡아넣겠다고 하는 바람에 도저히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징역 12년 중 2년 7개월을 복역하고 형집행정지로 석방이 되던 날 열린 석방자환영회에서도 이 전 의원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전두환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가 다음날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이 찾아오는 등의 소란을 겪기도 했다.

이 전 의원은 서부경찰서 과장에게 “사람 말도 못하게 하는 나라에서 더는 못 살겠다”며 “전두환 밑에서 살기 싫으니까 날 내쫓던지, 도로 집어넣으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감옥에 다시 가게 되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딸의 출생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되었다. 이 전 의원이 지명수배중일 때 그의 딸은 처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이 전 의원의 딸이 세 살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된다.
형집행정지로 망명길에 올라 이국땅에서 세살된 딸을 처음으로 만나는 이신범 전 의원(1983).ⓒ폴리뉴스


이 전 의원의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은 미국의 상원의원, 하원의원, 인권단체 등에 전해졌고 유력일간지와 TV에 보도되면서 부녀상봉을 위한 여론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마지못해 1년짜리 단수여권을 발행해주었다.

이 전 의원은 “한국에서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고, 살수도 없어서 미국에 나가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해외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며 미국으로의 망명 배경을 설명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하기 약 2달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출감직후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고 미국에서 재회한 이 전 의원과 김 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돕는 활동을 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망명 투쟁에 대해 이 전 의원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간 인사들은 문동환 목사, 나중에 적십자총재가 된 한완상 교수, 최성일 교수 등이었고 나중에 미국에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라는 교포 민주화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망명기간동안 워싱턴 소재 국제정책개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THE MONTHLY REVIEW OF KOREAN AFFAIRS 편집국장을 지내며 케네디 의원 등과 당시 망명 중이던 망글라푸스 필리핀 전 외무부장관 등과 함께 지구촌 양심수를 위한 일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또 워싱턴을 무대로 한 민주화 활동에 대해 미국 ABC TV등과 개별적인 인터뷰를 갖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반미감정이 美문화원방화로 이어지며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12·12 사태와 광주민주항쟁의 유혈 진압에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한 사실을 묵인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광주 미문화원방화 사건(1980.10)에 이은 부산 미문화원방화 사건(1982.3), 대구 미문화원방화 사건(1983.9), 서울 미문화원점거 사건(1985.5)등으로 반미감정은 표출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이 전의원에게 미국의 정확한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이 전 의원은 “미국이 전두환 편을 들었다는 인식이 재야세력과 학생운동세력 사이에 널리 퍼져 반미감정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보진 않아요. 한국 군부 내에서 미국의 힘의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미국의 역할과 태도에 대해서는 올해와 내년 더 많은 기밀문서가 공개되므로 진실이 더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 의원은 망명부터 85년 2월까지 2년간 DJ와 워싱턴을 근거로 활동을 하며 DJ의 활동도 도왔다. 이 전 의원은 “주말이 되면 DJ와 동지들이 모여 함께 식사도 하고 행사 때도 만나게 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한국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의논을 하다 보니 DJ와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치적 관계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건너간 재야학생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 출신으로서 동지적 관계에서 일을 했지, 그분과 상하관계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에서의 DJ와 관계에 대해 “같은 지역에 있고 같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에서 그야말로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그 분 하시는 일 돕고, 또 그분도 저를 그렇게 대했다”고 말했다.

85년 DJ가 귀국할 때도 안전귀국을 위한 동행단의 책임자 역할을 한 이 전 의원은 미국에 체류하던 한국출신재야인사들과 저명한 미국인사 30명, 미국의 교포들 중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아 ‘DJ 귀국동행단’을 만들어 함께 귀국길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은 형집행정지상태여서 돌아가면 다시 출국할 수 없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워싱턴에 남아 미국의회나 언론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세력을 대변하는 역할을 부탁해 도쿄까지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망명시절 abc tv 나이트라인 생방송에서 앵커 테드카플씨와 대담하는 이신범 전 의원(1986).ⓒ폴리뉴스
그 해 9월 YS는 강연회가 있어 워싱턴을 방문하게 되었고 YS의 부탁으로 이 전 의원은 강연 준비도 돕고 워싱턴포스트와 회견도 주선하며 YS와도 민주화의 한 동지이자 지도자로서 사심 없이 도우며 인연을 맺어 나갔다.

이 전 의원은 87년 7월 11일 4년여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이에 대해 이 전 의원은 “6.29 선언이 있고나서 사면복권조치가 있을 거라는 예고가 있었지만 날짜를 정확히 몰라 7월 10일에 일단 워싱턴을 떠나 귀국하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에서는 이 전 의원에게 귀국을 연기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했다. 지금 귀국하면 형집행정지상태이기 때문에 체포되어 물의가 빚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은 “그렇게는 못한다”며 계획대로 귀국했다. 이 전 의원은 7월10일자로 사면복권이 되었고 무사히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87년 후보 단일화 실패가 가져온 민주주의의 굴곡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진 다음날, 민주정의당은 인기 가수와 치어리더까지 동원한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6.10)한다. 이날 국민운동본부는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했다. 오후 6시를 기해서 전국에 애국가가 불려지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이 타종하였으며,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다. ‘넥타이부대’로 불리는 퇴근길 직장인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운동이 시작된지 18일 만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이끄는 신군부는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6.10 항쟁이 종식되고 미국의 군부 개입 반대로 벼랑에 선 전두환 정권은 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선언했다. 국민들은 15년 만에 부활한 국민 직접선거로 야당의 김영삼 총재와 재야인사인 김대중씨의 후보 단일화를 열망했다.

그 얼마전 워싱턴을 방문한 신민당 이민우 총재의 활동을 돕기도 했던 이 전 의원은 국민 모두의 열망이었던 ‘후보 단일화’를 의심하지 않으며 87년 7월 11일 귀국해 동교동과 상도동을 오가며 DJ와 YS에게 후보단일화를 강조했다.

1987년 망명 4년만의 귀국-김포공항 귀국회견(왼쪽은 이 전 의원과 동행한 톰포그리에타 미연방하원의원, 오른쪽은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출처-upi통신>
이신범 전 의원은 두 사람의 입장의 틈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두 분의 입장이 굉장히 달랐어요, 이제야 말씀 드릴 수 있는데 김대중씨는 저를 보고 단둘이 앉아있는데, 지금 민주화가 된 것이 아니다, 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으니 워싱턴에 가서 동지들 대변하는데 역할할 수 있는 사람이 李동지다, 그러니 민주화과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워싱턴에 머무르면서 일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분의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국내에서 활동해야지, 더 이상 외국에 있을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전 의원은 상도동에서 김영삼씨를 만났던 일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영삼 총재가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사람을 보냈어요. 그래서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 당시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입당원서를 주면서 이제 정치활동을 해야 되니 빨리 입당을 해 지구당도 맡고 그래야 된다고 빨리 귀국하라 하셨어요. 한분은 미국에 있으라 그러고 한분은 빨리 귀국하라 그러고 시국을 보는 시각 차이를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 전 의원은 “두 분이 80년도처럼 또 과잉경쟁을 하는 게 아니냐, 두 분이 어떻게하든 단일화를 하셔야 된다. 우리가 지금 수십년을 싸웠는데 두 분이 여기서 갈라지면 우리 투쟁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많지 않냐, 그러니 분당은 안된다, 어떻게 하든 통일민주당이라는 틀 안에서 두 분이 후보를 단일화해야 합니다”라며 거듭해서 강조했다고 말했다.

LA로 돌아간 이 전 의원은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양김씨 단일화에 대해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는 8월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귀국했다.

귀국 후, 10월경 이 전 의원은 DJ를 찾아가 어떻게 하든 통일민주당 내에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대중씨가 뭐라 그러냐면 자기가 나이도 더 먹고 감옥도 많이 살았고 먼저 대통령을 해야되는데 김영삼씨 생각이 다르다 이거에요. 그런 상태가 지속되어 당을 따로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말씀하셨어요”라며 그는 평민당의 창당 배경을 털어놨다.

이 전 의원은 평민당에 입당하지 않고 홍성우 변호사와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해 김대중씨 쪽 지지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후보단일화 국민협의회를 만들어 성명서를 내는데 참여하는 등 후보단일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DJ는 결국 ‘4자 필승론’이라는 이론으로 독자 출마를 감행 하였다. 4자 필승론이란 노태우, 김영삼이 영남 출신이니 둘이 영남표를 양분 하고, 김종필이 충청표를 몰아가고, 김대중 자신은 호남을 석권하고 서울에서 1/3 만 얻어도 당선이 된다는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이다.

이 전 의원은 당시 DJ 앞에서 4자 필승론을 반박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60%이고 저쪽이 40%인데 60%를 둘로 나누면 우리는 30, 30이 되고 저쪽은 40이 됩니다. 김종필씨가 나와서 상대표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표를 가져가는 겁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DJ는 이 전 의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4자 필승론을 밀고나갔고 그 결과 대선에서 노태우 8,282,738표, 김영삼 6,337,581표, 김대중 6,113,375표, 김종필 1,823,067표로 노태우가 당선하게 된다.

이신범 전 의원과 인터뷰는 지난 5월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 대담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폴리뉴스
야당의 표가 노태우의 표 보다 약 400만표가 많았지만 분산되어 노태우가 어부지리를 얻었고 김대중은 바램대로 호남에서 압도적인 90% 이상의 표를 얻었지만 3등을 하였다.

이 전 의원은 88년 초에 합의됐었던 야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지역분열구도를 심화시킨 원인이었다고도 말했다. “총선전 통일민주당은 거의 70석이었고 평민당은 23석 정도였지만 그건 무시하고 4:4:2로 야권을 통합하여 총선에 임하자는 합의가 88년 2월경에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김대중 씨의 평민당 쪽에서 먼저 깼다”며 야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4당이 총선에 참가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4자 필승론이 현재의 지역분할구도를 고착화하는 모태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87대선을 통해 또 다시 군사정권의 연장인 노태우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 의원은 “양 김씨의 분열이 우리 정당사에 엄청난 굴곡을 만들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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