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소신을 지킨 3당 합당 불참, 15대 총선 승리, 집권야욕이 빚어낸 총풍사건, DJ 저격수로서의 임무, 그가 바라 본 YS와 DJ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다섯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신범 전 국회의원이다.

이신범 전 의원은 196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자유의 종」을 발간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3선개헌 반대와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총 4차례에 걸쳐 5년 8개월 동안 투옥생활을 했다. 1983년 미국망명길을 떠나 DJ와 함께 해외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87년 귀국, 당시 제1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 김광일, 노무현, 강신옥씨 등과 입당하여 정책실장을 맡아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96년 신한국당으로 15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98년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 ‘DJ 저격수’로 활동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국제 외교통으로 유명하다.

이신범 전 의원과 인터뷰는 지난 5월 10일 본사 회의실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 대담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뉘어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서울의 봄’ ‘김대중 내란 사건’, ‘미국망명’과 ‘87년 후보 단일화’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②편에서는 ‘3당합당 불참’, ‘15대 총선’, ‘총풍사건’, ‘국정원 도청’ ‘YS와 DJ’ 등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굵직한 사건에 대해 다룰 계획이다. ③편에서는 공천혁신 등 우리 정당구조와 정치 문화 개선책에 대한 그의 지론을 전할 예정이다.


88년 통일민주당 정책실장으로서 바라본 지역주의

야당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호남지역을 석권한 평민당이 13대 총선을 통해 제1야당이 됐지만, 이 전 의원은 야권이 정국의 확실한 주도권을 갖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총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 총재인 YS가 “미국에서 여러 선진적인 경험을 많이 한 이 전의원이 당에 입당해 당을 혁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 달라”고 제안, 노무현, 김광일, 강신옥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 후 통일민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그는 1971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선고받은 형이 1987년 7월의 사면복권에도 불구하고 실효되지 않아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러나 총선 후YS는 통일민주당의 정책실장을 맡기며 그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88년 총선에서도 지역분할구조는 더 뚜렷이 나타났다. 호남지역에 선거구를 더 많이 배정해 통일민주당이 더 많은 득표를 했는데도 더 적은 의석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88 총선에 대해 이 전 의원은 “88년 봄 선거에서 YS의 통일민주당은 24%를 득표했고 DJ의 평민당은 18%를 득표했습니다. 그러나 평민당은 70석, 통일민주당은 59석이 됐어요. 왜냐하면 영남지역은 선거구 인구를 호남보다 훨씬 많게 잘랐으며 같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민정당(민주정의당)과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민당은 수도권에서 소위 선명논쟁을 통해 평민련이라는 재야출신 인사들의 단체를 만들어 입당시켜서 혁신적 이미지로의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평민당이 약진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통일민주당이 6%정도 더 많이 득표했음에도 의석이 적었던 것은 소선거구제 때문”이라며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 3당합당 불참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통합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3당합당이다. 3당합당은 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정부 출범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민정당은 5공화국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 전멸을 비롯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함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국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제1야당인 평민당에게 은밀하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김대중 총재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같은 보수성향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합당을 제의하게 되었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구도를 역전시켰다(1990.2.9).

3당합당에 대해 이 전 의원은 “자주 상도동에 가서 YS와 아침식사를 했는데 어느 날 YS가 며칠 있으면 중대한 여러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당시 김영삼 총재 생각은 이렇게 해서라도(3당합당) 영남세력을 묶어서 선거를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라며 YS가 3당합당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추측했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은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에 입당하지 않는다. 그에게 3당 합당을 반대하게 된 배경에 대해 묻자 “3당합당 발표가 있고 한 사흘 잠을 못 이루며 고민했어요. 여러 가지 정치적 의리나 실리나 이런 것을 생각하면 김영삼 총재를 따라서 3당합당에 들어가 운명을 같이 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었지만, 어떻게 군사정권을 만든 세력하고 같이 정당을 하겠느냐를 고민하다가 차라리 정치활동을 당분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3당합당에 불참하는 성명을 낸 것”이라고 답했다.

3당합당 불참성명 이후 이신범 전 의원은 노무현,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의원 등과 함께 잠시 동안 활동을 같이 했다.

이 전 의원은 “노무현, 이기택, 김정길 의원 등과한 2주정도 여러 가지 의논도 하고 활동도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현역의원이니 활동할 수 있지만 저는 현역도 아니고 원외인사로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약했기에 정치활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며 한동안 정치활동을 쉬게 된 이유를 털어놨다.

쉬고 있던 이 전 의원에게 박찬종 의원과 김동길 교수가 제3정당을 만들어보자는 논의를 해왔고 이를 받아들였다. “양순직 전 의원, 김광일 의원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며 제3정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 때 정주영씨가 등장해 국민당을 한다며 많은 분들을 데려갔고, 박찬종 의원과 따로 남게 되어 신정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정치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문민정부’시절 환경관리공단 관리이사 직은 낙하산?

91년 2월 명지대학생들은 발전위원회가 결렬되고 학교측이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고지하자 명지대학생들은 등록을 연기하기에 이른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생들은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학교 안팎의 상황을 연락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강경대가 경찰에게 쇠파이프로 구타당하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1991.4)한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자유당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어 노태우 정권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참패(1992.3.25)한다. 획기적인 용단을 내리지 않고는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야당에게 내어줄 상황이었던 노태우 정권은 타개책으로 민주자유당 당 대표직을 김영삼에게 맡기고,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93년 김영삼 후보는 당선되었고 ‘문민정부’가 시작되었다. 3당합당 때문에 통일민주당과 YS 곁을 떠났던 이신범 전 의원은 92년 대선 때 다시 YS를 도왔고, YS가 당선되자 이 전 의원은 93년 환경관리공단 관리이사로 발령받는다.

당시 ‘낙하산 인사’라는 논란이 일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낙하산 인사는 어느정도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이 전 의원은 “대통령과 정당들이 자신들의 뜻을 펴기 위해 어떤 기관의 중요 부서를 장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환경관리공단에 부임했을 때 1000명 정도 되는 인원 중 주요간부들 대부분이 군인출신이어서 인사를 개혁하려고 보니 승진대상자를 3배수, 6배수 뽑아도 거의 다 군 출신이었습니다. 도저히 개혁할 방법이 없다싶어 상위직 자리를 비워 특별승진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군 출신 몇 분에게 사직을 권고하니까 굉장한 반발이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특별감사를 시행해 품위손상 행위를 물어 몇 분을 해임 또는 사직시켰습니다. 이 인사조치 때문에 당시 칼로 찌른다,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험난했던 인사개혁 조치에 대해 회상했다.

그는 민간인 출신 특별승진에 대해 “모두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하향식 인사’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구정권이 만들어놓은 인사의 폐해라든가, 적체라든가 잘못된 관행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개혁하려면 내부인사로도 될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정무직 인사가 와 그런 일을 해줘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향식 인사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며 “하향식 인사에 대해 시비가 생겨나는 이유는 자격미달이거나 함량미달인 사람들이 내려보내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향식 인사에 대해서 그는 “정확한 사명을 부여받은 유능한 사람을 내려 보낸다면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권을 잡은 대통령과 정당은 그런 점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국당 부대변인 15대 국회의원 당선되다

'99 14개상임위 의원들이 뽑은 국감베스트의원 중 1위를 한 이신범 전 의원(조선일보 99.7.15)
95년 3월 환경관리공단 이사직을 사직하고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이신범 전 의원은 민자당의 사무총장이었던 김덕룡 의원의 연락을 받았다. 김덕룡 의원은 이 전 의원에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많은데 혼자 그렇게 쉬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부대변인으로 발령할테니 당에 들어와 적극적으로 일을 해 달라”며 이 전의원에게 민자당으로 입당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은 김덕룡 의원의 이 제안에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3당합당 할 때 민자당에 들어가질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민자당에 들어가겠습니까”라며 민정당의 뿌리를 둔 민자당 입당은 곤란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민정당의 유산을 다 청산할 수는 없지만 과감하게 청산할 것이고, 내부개혁을 하고 당명도 바꿀 것이니 당을 새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 전 의원을 설득했고, 이신범 전 의원은 그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얼마 뒤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는 민자당의 부대변인 직을 수락했다.

신한국당의 부대변인으로서 이신범 전 의원은 15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당선 배경에 대해 “수도권 사람들이 3당합당 당시의 소수파가 주류가 되는 것을 정치 혁신이라 보고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공천과정에 대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이었던 김현철씨의 역할이 컸다는 소문에 대해 이 전의원은 억울함을 표하며 말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공천 과정을 위해 여론조사 공천을 최초로 실시하게 됐습니다. 김현철씨가 여론조사 기관을 운영했던 전문가였기 때문에 공천 받은 사람들은 김현철씨가 공천 한 것이라는 소문이 난 것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천 전에 김현철씨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88년 통일민주당 정책 실장이었을 때 아버님을 도우신다고 들었다고...중앙연구소를 한다며 명함을 줘서 차 한두번 마신 것이 전부”였다며 김현철씨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이어 그는 15대 공천과정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95년 12월까지 지역구를 어디로 정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울법대 선배인 ‘강서을’ 출신 남재희 의원께서 제 방에 오셨어요. 그 분 말씀이 자신의 윗사람이던 전두환, 노태우가 도둑놈으로 규정된 상황에 계속 정치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청와대에 물어보고 그만둬야겠다고 하셨어요. 후에 남 의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 때 지역구를 아직 못 정했으면 당신이 있던 ‘강서을’에 출마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김광일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 강서을 국회의원으로 출마해도 되는지 여쭤봐 달라고 그랬더니 바로 전화가 와 대통령께서 해도 좋다고 하셨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그 후 1월 초에 강삼재 당시 당 사무총장이 다시 청와대에 직접 가서 확답을 받아 왔습니다”

이 전 의원은 공천과정은 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직접 이루어진 것이지 공천과정에서 김현철씨는 천만분의 일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뚫고 OECD 가입

한국은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은 OECD를 당론이자 국책으로 정해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반면에 DJ가 이끌던 국민회의는 OECD 가입을 한사코 반대했었다.

이 전 의원은 “국민회의 측은 우리 경제가 위험해진다며 후진국대우를 계속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무역이나 경제지표 등을 봤을 때 한국은 더 이상 후진국으로 취급받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민회의 측이 끝내 반대를 해서 여야협상 끝에 상임위에서 표결하자는 합의에 이르렀어요. 그런데 그 당시 여당이 한명이 앞서 있는 상태였지만 국민회의 측은 자신들이 퇴장하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표결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 전원 퇴장해버렸습니다. 결국 늦은 9시쯤 이회창 의원이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 정족수를 채워 상임위 통과시키고 본회의에서도 통과 시킨 것”이라며 OECD 가입안이 통과 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oecd에 가입하여 온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신범 전 의원


그는 “OECD 가입으로 우리나라의 법제도와 금융 등이 선진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외환위기 극복과 투명성을 높이는 사회로의 성장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OECD 가입이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국민회의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외환위기는 박정희식 관치금융, 박정희식 정경유착 등의 유산과 부패로 인해 투명 사회로의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OECD 가입이 원인은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국민회의 측이 ‘국민의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모습을 보면 이 당시 반대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며 “정권을 잡는다는 목표 하나로 제도개혁까지 당리당략으로 판단하는 것은 솔직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따라야한다”고 말했다.


집권야욕이 빚어낸 총풍사건

총풍사건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앞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당시 청와대 행정관을 비롯한 3명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를 만나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에도 대통령 선거 때마다 분단된 남북 관계의 안보심리를 자극해 여당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이용했다는 의구심이 있어 왔으나, 소문만 무성했을 뿐 실질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다.

2000년 11월 11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6부는 총풍사건 관련자로 기소된 당시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한성기·장석중 등 ‘총풍 3인방’에게 회합·통신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을 적용해 각각 실형을 선고하였다.

총풍사건 당시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간부였던 이 전의원은 총풍 3인방을 면회했다고 한다. 추석연휴 중이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전 의원은 “밤중에 면회를 했는데 고문을 한 흔적이 보였어요. 그래서 언론에 이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이 고문당한 얘기를 들으며 자기와 경쟁한 야당대통령 후보를 음해하려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국가기관에서 고문을 하고 그 사실을 자꾸 부인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제가 계속해서 그 문제를 파헤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후에 장석중·오정은씨는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인 장씨와 오씨에게 추가로 2억1000만원과 2억40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이어 “국정원이 98년 9월에 총풍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98년 4월에 중국선양에서 북한사람 최인수를 납치한 사건이 있었다”며 총풍사건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총풍사건의 증인으로 세우려고 단순한 무역일꾼인 최인수를 남으로 데려와 고문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해 다리가 부러져 불편한 몸 임에도 최인수는 탈출을 시도했고 택시를 타고 한나라당 당사에 왔다가 문이 닫혀있어 중앙일보사에 가서 자기가 겪은 일을 녹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일이 걱정이 된 중앙일보사는 국정원에 다시 최인수를 넘겼고 그 뒤 최인수는 다시 북으로 송환돼 지금은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전의원은 국정원과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해 무고한 북한 사람을 인권유린한 사실과 당시 국정원장과 의원들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청했지만, 주도한 사람들이 처벌받았다는 얘기도 없고 인사조치 당했다는 얘기도 아직도 없다며 정권이 바뀌었으니 조사해야 할 것은 철저히 조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DJ 저격수’ 이신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이신범 전 의원은 강력한 야당 만들기에 앞장섰다. 이 전 의원은 “강력한 야당이 있어야 여당이 탈선하지 않고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며 “야당의원의 역할은 충실하게 정권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의 부정행각을 파헤치는 일에 앞장선 이 전 의원은 국회 529호 불법 도·감청 정치사찰 고발과 청와대가 직접 개입된 권력형 비리와 옷 로비 사건, 언론문건사건 관련 폭로 등으로 ‘DJ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별칭에 대해 그 자신은 "인간적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중진들이 나서지 않기 때문에 DJ 비판을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불법 도·감청 사건’ 당시 이 전의원은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국회 529호로 들어가 보자고 주장했다. “의원총회에서 529호실에서 국회의원들 도청과 사찰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자 한나라당은 그럼 직접 들어가 도청장비가 있는지 없는지 보자며 여당과 합의했습니다. 안기부요원이 사찰보고서가 담긴 가방을 두고 밥 먹으러 나간 것을 몰랐던 새천년민주당 측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의원들의 동향 등 59건의 정치 사찰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여당은 문을 못 열겠다며 막아섰습니다. 국회의원이 제 집 문 여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것을 막은 것입니다”라며 529호실 문을 두고 여당과 야당이 대치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DJ저격수’로 여당의 요주인물이 된 이신범 전 의원은 여당의 집중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의 패인은 여당의 흑색선전과 수십억대의 금품살포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위 표적공천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엄청난 돈을 살포해놓고 공명선거를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며 불공정했던 16대 총선을 비판했다. “그것도 모자라 제가 미국에 호화주택을 사놓았다고 엉뚱한 사람의 집번지까지 들고 나와 흑색선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라며 당시 느꼈던 억울함과 절망감을 토로했다.

또 그는 “당시 현대상선에 빠져나간 200억 원의 행방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한다”며 “그 돈의 일부는 내 선거구(강서을)로 왔을 것” 이라고 추측했다.

이어서 야당으로서 정적이기에 표적공천하는 것 까지는 이해하지만 돈까지 뿌려가며 흑색선전을 한 것에 대해서 여당 대표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대통령 부부가 시민 연대의 공천 반대자 명단에서 이신범 전 의원이 빠진것을 아쉬원하고 있음을 풍자한 만화(동아일보 2000.1.26)
이 전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의 호화주택의혹 폭로 사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호화주택의혹 폭로 사건’으로 ‘허위폭로전문가’라는 비판을 받았던 이 전 의원은 “이 부분에도 많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억울함을 표했다.

그는 2000년 유학생 신분의 김홍걸씨가 미국에서 호화주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국회발언을 통해 폭로했다. 이 전 의원은 미국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홍걸씨가 유학생 신분으로 특별한 소득이 없는데도 호화주택을 구입한 배경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과 김홍걸 씨 측은 이 전 의원이 허위사실을 폭로했다며 공격을 했고 이 전 의원은 진상을 밝히겠다며 소송을 걸어 쌍방간 소송이 진행되었다.

이 전 의원은 “2000년 2월 로스엔젤리스 법원에 KBS, 새천년민주당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제소,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김홍걸씨의 증언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김씨가 이에 불응했고 2001년 1월 김 씨의 증언거부로 발생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오렌지카운티법원에 냈습니다. 그 소송 진행 중인 2002년 5월 결국 김홍걸씨는 최규선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합의하에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그러나 DJ정권 측의 부탁이 있었는가, 노무현 정권은 2004년 4월16일에 대한 보복으로 제가 99년도 제네바 인권위원회에서 연설한 것을 빌미삼아 공소시효 5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국정원 명예훼손으로 저를 기소 공소시효 5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했지만 2005년 결국 공소기각 됐습니다. 2000년에 시작한 쌍방간 소송은 2005년까지 계속된 거죠”라며 DJ와의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털어놨다.


그가 바라본 YS vs DJ

이신범 전 의원은 YS, DJ처럼 일선에 서서 민주화 역사를 이끈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망명생활 당시 DJ와 돈독히 지내며 민주화 동지로서 해외에서의 민주화투쟁을 함께했고 망명 후 귀국해서는 YS 당의 정책실장과 부대변인을 맡으며 정치적 협력자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그 두 전 대통령에 관해 그 보다 잘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이 전 의원에게 YS와 DJ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물었다. “두 분 모두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시련과 경험을 겪은 분들이기에 역량과 경륜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저에 대해서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믿으면 일을 상당히 많이 맡기는 편입니다. 반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매우 꼼꼼하게 직접 챙기신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귀국하실 때 동행단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굉장히 꼼꼼하게 챙기셨어요. 그런 것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큰 윤곽만 말씀하시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였어요. 반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요한 임무로 미국에 출 장갈 때도 이런 일을 해라 하는 방향만 주고는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맡기시는 스타일이었어요”

이 전의원은 인사 발탁에 있어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핵심인사들에게 재량권을 주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접 발탁하는 스타일”이었다며 두 전 대통령의 대비되는 성격이 잘 드러났다고 평했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