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타히티를 조명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일요일인 9월 8일 방송된 KBS 1TV 교양프로그램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는 매혹의 땅 타히티를 소개해 실시간 검색어를 장식하고 있다.

남태평양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타히티(Tahiti), 에메랄드처럼 푸른 물빛을 자랑하는 보라보라 섬에서 상어, 가오리와 함께하는 힐링 액티비티를 즐긴다.

이날 방송에서는 타히티 사람들의 삶을 만나볼 수 있는 파페에테(Papeete)에서 여정을 시작해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후아히네 섬(Huahine) ‘남태평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보라보라 섬(Bora Bora) 등 일생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타히티를 소개했다.

타히티는 면적 1,042㎢이며, 인구 약 13만 명(1988)이고, 중심도시는 파페에테이다. 화산성섬으로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서부에는오로헤나산(2,200m)이 솟아 있고, 동부에는 로니우산(1,300m)이 솟아 있다. 무역풍의 영향으로 기후는 지내기에 알맞으나 허리케인의 피해를 입는 일도 있다.

타히티는 폴리네시아 민족의 중심 거주지로서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발전시켰는데 17세기 이래 유럽인들이 찾아왔다. 아름다운 열대 풍물과 외래인을 환대하는 주민의성격에 매료된 유럽인들은 '남해의 낙원', '비너스의 섬'이라고 불렀다.

또 이섬의 이국적인 정취는 근대 유럽 사상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P.L.로티, P.G.고갱등과 같이 타히티를 작품 활동의 무대로 한 문학가·화가도 많다. 그러나 유럽과접촉은 섬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1844년 프랑스가 전통적 왕조를 멸망시켜 식민지로 만들었고, 사회적으로는 육지에서 옮겨온 병(病)으로 원주민 인구의 멸실을 가져왔다. 또 많은혼혈인이 출생하고, 화교의 진출도 현저하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개발되지는않았으나, 남태평양의 관광지로서 제2의 하와이로 변모하였다.

주민 가운데 순수한 폴리네시아인은 3,000∼4,000명에 지나지 않고 약 6,000명의화교가 있다. 열대성 농산물과 그 가공품, 진주조개·인광석을 산출하며, 말·소·돼지도 사육한다. 로스앤젤레스와 시드니를 왕래하는 대형 선박이 기항하며국제공항이 있다.

1891년, 고갱은 프랑스를 떠나 열대 지방에 머물며 창작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반 고흐는 이미 "미래는 열대 지방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신세대 화가들에게 오래되고 상투적인 서양 예술의 방식은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고갱은 자신의 영감을 살찌울만한 새로운 소재를 찾는 중이었다.

그는 여러 곳의 여행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그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던 타히티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곳에서 순조로운 삶을 살기 바랐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정부의 여행 보조금을 받고 모든 재산과 그림을 판 후, 오세아니아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타히티는 더 이상 뱃사람과 작가들이 찬양하던 그런 섬이 아니었다. 전통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진보된 서양 문명에 억눌려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가 도착했을 때, 타히티의 왕이었던 포마레 5세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식민지의 뱃길이 이미 열린 상황이었다.

그리해 고갱은 수도인 파페에테를 벗어나 시골로 가서 타히티인들의 일상 생활을 체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나무와 종려나무를 이용해서 ‘파레’라고 하는 타히티의 전통 가옥을 직접 만든 후, 14세의 타히티 소녀를 동반자로 삼아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타히티의 언어를 배우면서 선교사들의 압박 속에 버림받은 마오리족의 옛 종교에 관해서도 알아가기 시작했다.

'타히티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에서는 총독이나 신부 또는 목사에 의해 강제로 들어온 새로운 풍습과 전통의 충돌이 느껴진다. 타히티는 수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다. 왼쪽 여인은 허리 아래로 흰 티아레 꽃 무늬가 장식된 '파레오'라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여인의 귀에는 옷의 무늬와 똑같은 생화가 꽂혀 있어 여인의 아름다운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며, 숱이 많은 검정색 머리에서 마치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고갱의 동반자로서 선교사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채 움츠러든 것처럼 보인다.

목까지 올라온 이 ‘선교사 원피스’는 몸의 형태를 완전히 가리고 있는데,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긴 소매가 팔 전체를 감싼 채, 한 치의 피부도 드러나지 않게끔 꽁꽁 가리고 있다. 화면에는 전체적으로 우울한 느낌이 감돈다. 정면을 향한 여인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진다.

이 여인은 종려나무 잎으로 모자를 짜는 일을 중단했고, 짜다 만 동그란 모자가 그녀의 옆에 놓여 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이걸 짜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옆에 있는 여인의 폐쇄적인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운 빠지게 한다. 고갱은 타히티에 있는 처음 몇 개월간 현지인의 태도와 얼굴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물을 그려서 목록으로 만든 후 그림 그릴 때 소재로 삼곤 했다.

작품 속 두 명의 ‘타히티 여인들’은 실제로는 한 명의 모델에게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게 하여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금색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한 그림의 뒤쪽으로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며 인위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펼쳐진 배경을 열대 지방을 연상케 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정확히 묘사하지 않아도 현지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림 윗부분까지 색색의 층으로 표현된 배경은 평면감을 주며, 이로 인해 두 명의 타이티 여인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고갱은 작곡가가 소리를 만들 듯, 색채를 진동시키며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분홍과 주황, 노랑, 초록을 연결한 대담한 채색 방식은 마티스 화풍의 전조가 되었다. 이 그림은 타히티에 군복무를 하러 왔다가 상인으로 눌러 앉은 샤를 아르노 대위에게 1982년에 팔렸다. 고갱은 ‘하루의 소식’이라는 뜻의 타히티어 파라우 아피라는 제목으로 《타히티의 여인들》을 변형시킨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