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에 대한 ‘민족공조’ 촉구, 금강산 등 남북경협 풀기에 나서라는 의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자신이 공언한 연내 시한의 북미 비핵화 협상의 출구를 못 찾자 한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최고 수위로 높여 미국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지난 10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 실무협상 결렬 후 북미 양측이 한 치의 진전 없이 겉돌기만 하자 북한은 그 분풀이를 남한에다 하는 형국이다. 다시 말해 이제 한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는 친서를 보냈다고 공개한 것은 그 절정이다.
<조선중앙통신>은 11월 22일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제목의 논평을 통해 “무슨 일에서나 다 제 시간과 장소가 있으며 들데, 날 데가 따로 있는 법이다. 과연 지금의 시점이 북남 수뇌 분들이 만날 때이겠는가”라며 “위원장께서 부산에 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데 대해 이해해 달라”고 문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했다.
문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 김 위원장을 초청했다는 것을 공개하며 거부의사를 밝히고 문 대통령의 대북-대미 정책을 싸잡아 비난한 것은 결례를 넘어 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공격으로 볼 수 있다. 특사라도 보내달라고 했다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밝힌 것은 이러한 의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소 거친 언사 속에 담긴 뜻을 보면 북미 비핵화 협상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부산에 가서 남북 정상이 만나고 아세안 정상들과 어울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며 아울러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문 대통령이 직접 움직여 금강산관광 등 남북경협사업에 나서야한다는 촉구다.
조선중앙통신이 “판문점과 평양, 백두산에서 한 약속이 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는 지금의 시점에 형식뿐인 북남수뇌상봉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한 것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가동 재개, 도로·철도 연결사업 등 4.27선언과 9.19공동성명에서 약속한 사항들이 1년이 넘은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볼멘소리다.
북한은 스톡홀름 실무협상 결렬 후 미국에게는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한국에게는 ‘대미의존 탈피와 민족공조 강화’를 줄곧 주문해 왔다. 특히 미국과의 물밑 접촉에서 진전이 없을 경우 남한을 향한 ‘경협 약속 이행’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김정은 위원장의 금강산 내 남측시설 철거 지시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남한 압박을 통해 2개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미워킹그룹’에 손발이 묶인 남북경협사업에 돌파구를 낼 수 있고 남북경협사업에 물꼬가 트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금강산 시설 철거 지시 이후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한 점을 보면 일정 효과를 보는 측면이 있다.
당장 북한의 주관심사는 연말 시한의 북미협상이다. 대남 압박은 그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지금 모든 외교적 자원을 총동원해 미국을 상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를 방문 중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11월 20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계속되면 정상회담도 수뇌급 회담도 흥미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을까”라면서 “아마 핵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앞으로 협상테이블에서 내려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북미 간 대화에 진전이 없다는 얘기다.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대표인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11월 19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 과정에서 뜬금없이 미국이 스웨덴을 통해 북미협상을 타진해 왔다면서 스웨덴을 향해 “푼수 없는 행동”의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측이 우리에게 빌붙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스웨덴을 이용해 먹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더 이상 3국을 내세우면서 조미대화에 관심이 있는 듯이 냄새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의 북미 중간자 역할을 공개하면서 미국을 비난한 것은 미국이 스웨덴을 통해 북한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다.
北, 미국에게는 ‘적대정책 폐기’, 한국에겐 ‘대미의존 탈피-민족공조’ 촉구
이러한 미국과의 줄다리기는 2월28일 하노이 결렬 이후 9개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6.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등 반짝 이벤트는 있었지만 교착 국면을 깨진 못했다. 일시적인 대화 기류가 형성되는 듯이 보이다가도 냉기류는 걷히지 않았다. 스톡홀름 실무협상 결렬은 이러한 북미관계의 한 단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곧 보자(See you soon)’고 말하고 미국이 한미연합공중훈련을 조정키로 하면서 또 한 차례 대화의 문이 열리는 듯 했으나 여의치 않은 국면이다. 북한은 11월 18일과 19일 김계관 외무성 고문과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담화를 내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 폐기 없이는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특히 김영철 위원장은 “미국이 말끝마다 비핵화협상에 대하여 운운하고 있는데 조선반도 핵문제의 근원인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게 철회되기 전에는 그에 대해 논의할 여지도 없다”며 “우리는 바쁠 것이 없으며 지금처럼 잔꾀를 부리고 있는 미국과 마주앉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미국 대통령이 1년도 퍽 넘게 자부하며 말끝마다 자랑해온 치적들에 대해 조목조목 해당한 값을 받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경고도 했다. 그만큼 미국에서 온 대화 신호가 북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어진 김명길 대사의 스웨덴 관련 발언은 이를 뒷받침 한다.
이처럼 북미가 평행선을 달리는 배경은 미국이 비핵화 협상의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차 북미정상회담을 가질 경우 ‘하노이 결렬’의 재판(再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하노이는 잊을 수 없는 굴욕에 가까운 것임을 감안할 때 그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문 대통령의 초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대남 압박을 높이는 배경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이 미국에게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미국도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다. 이 부분이 ‘민족공조’를 강조하면서 한국의 ‘대미의존 외교’를 비난하는 지점이다.
때문에 북한은 문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하면서 “민족공조가 아닌 외세의존으로 풀어나가려는 그릇된 입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엄연한 현실”이라며 “지금 이 순간에조차 통일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북남관계문제를 들고 미국에로의 구걸행각에 올랐다”고 에둘러 한국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미국을 설득해달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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