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영'을 내세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12일 엄수되었다. . (사진/연합)
▲ '세계 경영'을 내세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12일 엄수되었다. . (사진/연합)

[폴리뉴스 강필수 기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에는 어제 하루 총 3000여 명 이상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옛 대우그룹 관계자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방문이 계속됐다. 김 회장의 별세로 그가 남긴 공과 과가 조명되고 있다.

김 회장은 산업화 시대의 기수이자 압축성장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967년 설립된 대우실업은 그의 자금 동원 능력과 영업력을 바탕으로 창업 5년 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후 70년대 대우는 종합상사로 변모해 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그룹을 확장했다.

이중 자동차 분야는 산업 발전의 대표적인 분야로 손꼽힌다. 대우와 자동차의 인연은 1978년 인천 부평에서 새한자동차의 국내 지분 50%를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하며 시작됐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 걸쳐 급성장을 이룩했다. 성장에 따라 인천 지역에서 자동차산업에 대한 위상이 높아지고 관련 일자리도 증가했다. 르망·에스페로·티코 등 차량 보급으로 ‘마이카시대’에 일조했다.

이외에 1974년 설립된 대우전자는 19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오리온전기·광진전자공업 등의 인수를 거치며 금성·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이 외에도 김 회장은 대우의 통신·정보시스템 등 사업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해 기술 발전과 일자리 창출, 산업화에 기여했다.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에는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대우를 다국적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폴란드·베트남·수단 등 신흥국 국가원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이 결과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세종대왕 고등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1998년의 국내 수출액 1323억 달러 중 대우의 수출액이 186억 달러로 약 14%를 차지했다.

배순훈 글로벌경영협회장은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 이렇게까지 발전하는 동력을 제공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이에 반해 분식회계와 그룹의 몰락은 김 회장의 다른 면을 상징한다.

그룹 계열사들은 운영자금을 차입에 의존했다. 차입금에 의존한 공격적인 경영은 재무구조의 악화를 초래했고 이를 회계장부 조작으로 무마했다. 분식회계 규모는 모두 41조 원에 이른다.

대표적인 방법은 매출 부풀리기였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수출관련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국내 은행에서 수출어음(DA)을 할인받는 방식으로 가공매출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손익계산서상 당기순이익을 부풀렸다. 또한 실제 매출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서만으로 실제 제품을 공급한 것처럼 만들었다.

부채를 감추는 방법도 있었다. 해외 금융 기관에서 자금을 빌리며 페이퍼컴페니를 통해 서류상으로는 이를 외자유치로 포장했다. 그 외 재고자산 부풀리고 불량매출채권을 우량채권으로 포장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또한 분식회계에 김우중 전 회장의 직접 관여했다.

여기에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는 그룹의 몰락을 불러왔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쌍용자동차 인수를 추진하고 베트남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구조조정에 집중하던 당시 관료들과 갈등을 불러왔다. 결국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처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이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이후 2006년 김 회장은 그룹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8년 6월과 벌금 1천만 원, 추징금 17조9천253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2008년 특별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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