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한대수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948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세살인 한대수는 핵물리학자인 아버지 한창석(핵물리학자)과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박정자(피아니스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한대수의 할아버지 한영교씨는 1930년대 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에 건너간 초기 유학생으로,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주도하에 백낙준 박사와 함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대수의 아버지 한창석은 핵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코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한대수가 7살 무렵이던 시기 돌연 실종됐다.

이에 실종과 관련한 많은 소문들이 난무했는데, 특히 소문 중에는 한창석 씨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수제자였고, 수소폭탄 제조기술을 본국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CIA가 제거했다는 말도 있었다.
한대수는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이와 같은 가족사가 한대수만의 '한(恨)의 정서'를 가진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을 배우다가, 1967년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이후 1968년 귀국해 세시봉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하였고, 1974년 해군 제대 후에는 코리아 헤럴드 신문기자 겸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이 시기 1집 <멀고 먼 길>을 발표하였고, 그해 제1회 한국가요제에서 10대 작곡가상을 수상했다.

1968년,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음악 클럽 ‘쎄시봉’에 등장한 한대수의 모습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운 목소리로 번안곡을 부르는 가수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곡을 ‘자기 마음대로’ 불렀다.

결코 아름답다 할 순 없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강렬한 목소리. 그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꿈조차 꾸지 못 했던 자유와 혁명의 외침과도 같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한대수를 '한국 최초의 히피'라고 불렀다.

1975년 2집 <고무신>을 발표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광고사진가 및 록밴드 리더 등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 귀국해 3집 <무한대>, 4집 <기억상실(1990), 5집 <천사들의 담화>(1991)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후 1991년 뉴욕으로 이주해 사진가로 활동했으며, 1997년에는 일본 록스타 카르멘 마키(Carmen Maki)와 함께 일본과 서울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여기에 1997년 시집 <대지의 새벽>을 비롯해 자서전 <물 좀 주소, 목 마르요>(1998), <한대수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2000) 등을 출간하였고, 2002년에는 9집 <고민>을 발표하였다. 그는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수상하였고, 2004년에는 부산 국제 록페스티벌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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