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로 흥행대박을 노리는 부적절한 영입 경쟁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2호'인 원종건 씨(가운데)가 지난해 12월 29일 국회에서 이해찬 대표, 윤호중 사무총장 등과 함께 하트를 만들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2호'인 원종건 씨(가운데)가 지난해 12월 29일 국회에서 이해찬 대표, 윤호중 사무총장 등과 함께 하트를 만들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7살의 희망 청년' 원종건은 희망 아닌 절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반짝했던 정치무대에서 퇴장했다. 14년전 어느 TV 각막 기증 방송에서 시각장애인 어머니와 함께 소개돼 화제를 모았던 13세 소년은 27세 청년이 되어 더불어민주당의 '청년 인재'로 영입되었다. ‘효자 청년’, ‘자기 집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는 청년’, ‘청년과 소외계층을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청년’…. 그의 많은 스토리가 언론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와 사귀었던 한 여성의 데이트폭력 폭로로 그 스토리가 쌓은 탑은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원종건 씨는 영입 인재 자격을 반납하고 물러나면서도 "해당 글은 사실이 아니다.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려 참담하다"고 주장했다. 그 여성이 폭로한 내용 가운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데이트폭력이 고발될 때 흔히 등장하는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식의 진부한 논쟁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워낙 구체적인,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내용들은 원 씨가 져야할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뉘늦게야 그 책임을 안 것일까. 원 씨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까지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효자 청년의 아름다웠던 스토리는 하루 아침에 두 얼굴을 가진 청년의 추락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자격 여부를 판단하지 못한 채 정치무대에 올라선, 그리고 자신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며 살아온 청년을 정치시장 한복판에 내보낸 정당의 정치적 상행위가 낳은 참사였다. 어찌보면 원 씨의 추락은 지금 같은 깜짝 쇼식 영입 이벤트 풍조가 낳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선거를 앞둔 여야 정당들의 영입 경쟁이 화제의 인물을 깜짝 영입하는 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검증의 과정조차 없이 그저 감성적 스토리를 홍보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나서는 정당들의 행태가 만연했다. 급기야 사법농단 폭로에 나섰던 이력으로 현직 판사 신분에서 여당으로 직행하여 논란을 빚은 영입 인사는 자신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눈물 흘리는 광경까지 보여주고 말았다. 비단 민주당에서만 이런 광경들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자유한국당이 영입한 북한 인권운동가 지성호 씨와 ‘체육계 미투 1호’ 김은희 씨 또한 화제의 스토리를 우선한 영입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우대받는 대부분의 영입 인사들이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수업과 준비를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발탁된다는 점이다.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가며 자신이 해야할 정치적 역할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하니, 단지 자기가 아는 일에만 갇힌 반쪽 짜리 국회의원으로 임기를 마치기도 하고 때로는 이번과 같은 사고를 치기도 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을 우선 영입하여 흥행 대박을 노리는 것은 공공성을 우선해야 할 정치의 영역에 적절한 방식은 아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해온 인재들, 국민 삶의 현장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는 공익적 인물들, 자기 조직에서 자질과 능력을 검증받아 좋은 평판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정당으로 들어가야 국민의 대표로서 자기 몫을 충실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을 딛고 이루어낸 성공의 서사는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정치로부터 소환당하여 영웅이 되어버린 성공의 주인공들은 흔히 자기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정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가 많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장점은 있겠지만, 반대로 정치인으로서 경계해야 할 것 또한 많아지는 법이다. 원종건 씨는 영입 기자회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년과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정치를 통해, 나이로 따지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세심한 관심과 사랑으로 바꾸는 진정한 세대교체를 이루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먼 곳만 바라본 것일까. 바로 자기 가까이에 있던 여성에게는 ‘세심한 관심과 사랑’ 대신 아픔만 주고 말았던 셈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과 정치라는 공적 영역이 그렇게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옆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공감은 커녕 고통과 원한의 기억을 남긴 사람이 ‘공감의 정치’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인이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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