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4.19혁명일 4월 19일을 맞아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4.19혁명이란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했다.

1960년 4월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한 달 전 실시된 3·15 부정 선거였다. 제4대 정, 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자유당 대통령 후보로는 4선을 노리는 이승만이, 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李起鵬)이 출마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외 상황은 이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12년간 이어진 이승만의 장기 독재 체제는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민심을 이반시켰고, 자립 기반이 취약한 경제는 만성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면서 산업 침체와 실업률 상승을 불러왔다.

여기에 미국이 한국을 직접 원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일본의 지역 통합 전략을 구사하면서 미국의 경제 원조도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겪었다.

이에 3·15 선거를 앞두고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개악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무리하게 바꾸는가 하면, 비판적인 논조의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독재 정권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절정은 3·15 부정선거였다.

선거 전인 1959년 11월부터 이승만 정권은 각 지역의 시장과 군수 들에게 미리 사표를 받고 불법 선거운동을 강요했으며, 선거 중에는 40퍼센트 사전 투표, 3인조, 5인조, 9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유령 유권자 조작과 기권 강요, 야당 참관인 매수와 테러,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그리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승만의 4선 연임 가능성이 높아지자, 자유당 이기붕은 선거주무장관인 내무장관 최인규(崔仁圭)를 앞세워 공무원과 관변 단체를 동원해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4월 11일 1차 마산시위(3월 15일)에서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됐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후 4월 18 고려대학교의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던 중 이승만 정권이 동원한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고,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해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4월 19일 고려대생 피습 사건에 자극을 받은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면서 항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뒤 중앙청을 향해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정오를 전후해 국회 앞과 세종로를 중심으로 폭정을 규탄하고 재선거 실시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고등학생과 시민 들의 합세로 순식간에 2만여 명으로 불어나 광화문 주변을 가득 메웠다. 시위대의 일부는 반공청년단이 있는 반공회관과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내무부, 시경찰국, 이기붕의 사택 등을 공격했다.

이때 한 무리의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향해 나아가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사격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의 발포로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과 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 186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그 밖에 부상자도 6,026명이나 되었다. 이 유혈사태를 계기로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는 독재 정권 타도 시위로 발전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위원 전원 경질,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취소, 자유당 총재 사퇴, 구속 학생 전원 석방 등의 조치로 사태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4월 25일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27개 대학교수 258명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대통령과 여야 의원, 대법관 등이 부정 선거와 유혈사태에 책임지고 사퇴할 것, 재선거를 실시할 것 등의 주장을 담은 14개 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며 평화 시위를 벌였다. 교수단 시위는 계엄 아래 다소 누그러졌던 시민, 학생 들의 궐기를 촉발시켜 다음 날 대대적인 시위로 발전했다.

이어 26일에는 주한 미 대사 매카나기(W. C. MacConaughy)가 이승만의 하야 촉구 성명을 내고 ‘오늘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전 세계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날’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정권 안정과 현상 유지를 바랐던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파행과 4월 혁명의 급진적인 전개를 우려해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이승만은 이날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로써 12년간에 걸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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