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재발견과 밥의 재구성...

레스토랑 코야 <사진=두바이관광청 제공>
▲ 레스토랑 코야 <사진=두바이관광청 제공>

 

'밥'의 재발견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급하게 바꾸고 있다. 각 나라와 각 마을이 처한 조건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일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예수' 오기 전과 후로 구분됐다. 기존 달력을 폐기처분하고 'COVID-19' 오기 전 과 후로 나뉠 지도 모른다. 여하튼 인간 삶의 필수 구성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밥' 또한 그럴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정하게 엮어주던 예의바른 인사말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밥'을 거절하면 무례함이요, 단절의 의미였다. 하지만 COVID-19 이후에는 '욕지꺼리'가 될 지 모른다.

COVID-19가 음식 자체를 통해 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다르지 않다. 이제 '밥'을 권하면 안된다. '밥 먹자'는 인사말은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는 도구가 아니다. '밥 같이 먹자'는 말은 '밥 같이 먹고 같이 죽자?"는 뜻으로 해석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밥'이 일상화 된다. 잔치나 파티도 사라질 것같다. 내 어릴 적, 내 아버지는 집에 군음식이라도 생기면 "이거 큰집 식구들에 갖다드려라" 그랬다. 만약 요즘 낯선 음식, 먹어보라 들이대면 먹을 사람 있을까. '나눠먹기'가 의심스럽다. '음식 공유' 캠페인도 끝났다. 음식 남겨서 남 줄 생각말고, 아예 남기지 말아야 된다. 서울 뉴욕 파리 뱅콕 사천 하바나 등 유명 '맛집 도시' 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유는 '여럿이 함께' 먹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물론 식사예절도 바뀔 것이다. 조선시대는 어른밥상 아이밥상 따로 있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은 포크를 쓰는 것보다 손으로 먹는 게 더 예의에 맞다고 여겼다. 아직도 지구 한켠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나눠 먹는다. 왼손으로는 뒷일을 보고 오른손으로는 음식을 먹는데 사용하는 곳도 있다.

"식사 전 손을 잘 씻어야 한다" 부모가 수 년 간 식사 전에 손을 씻으라고 아이들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일도 일순간 사라졌다. 살고 싶으면 씻어야 한다. '제2차 위생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대한제국 지배를 위한 첫 수단이 '조선의 식사법'을 송두리째 바꾸는 거였다. 그 시절이 '제1차 위생시대'였다. '밥 먹는 방식'을 바꾸면 인간의 생각이 바뀐다는 믿음 때문이다.

식사예절에 이어 '밥 먹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마주 앉기와 나란히 앉기'가 먼저 예상된다. 대중식당에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생겼다. 혼밥에 '독방'을 보탠 셈이다.

점심시간 대중식당에 들리는 소리는 수저 깔짝이는 소리와 쩝쩝 밥씹는 소리뿐, 인간들 사이 오가는 잡담이란 없다. 만약 당신이 밥을 입에 넣고 나를 향해 '씨부린다'면, 나는 당신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눈총'을 쏘아줄 것이 틀림없다.

즉 나란히 앉으면 나란히 보게 되는데, '나란히 보기'는 '눈높이'나 '맞보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평적이라거나 민주적이라거나 하는 '시선의 평등성' 같은 것은 옛말이 됐다.

하지만 한가지 희망적인 것은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 '맞보기'가 아니라 같은 곳을 '나란히 보기'라는 '시선의 방향성'에 대한 발견이다. 아파트마다 안치된 침대가 대한민국 온돌의 잠자리를 바꾼 것처럼, 마주앉기와 나란히앉기는 분명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이다. 분명 시선의 '맞보기'는 인간관계를 '맞짱뜨기'로 몰아갔다. 피아 간의 투쟁, 정복과 복종의 관계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시선의 벡터성'이 인간 공동의 선을 향한 겸손의 모색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먹방'은 잘 될 지 모르나, 먹방처럼 먹지는 못할 것이다. 음식 칼럼니스트들이 시끌벅쩍 시장통, 넘쳐나는 온갖 산해진미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카페와 식당 그리고 고저넉한 풍경, 북적거리는 길거리 음식, 초밥집, 타코 트럭, 국수 전문점.... 일류 요리사들의 산해진미 퍼포먼스, 맛집을 즐기려는 여행객들은 낯선 사람들과 이국적인 '맛집 거리'에 넘쳐난다. SNS를 통하여, TV화면을 통하여, 먹을 것들이 넘치고 넘쳐 세상 널리 퍼지고 퍼져나간다. 이제 보기만 해도 침이 흐른다. 중독이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됐다.

굶어 죽는 인간보다 배 터져 죽는 인간이 더 많아졌다. 아직 먹방의 잔상들을 TV화면에 넘쳐난다. 하지만 잔상이다. 허상이다. 그림의 떡이다. 드디어 인간이 드라마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 속 '주인공'이 인간 삶의 '진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즉 인간 욕망의 한계효용 앞에 정직해질 때가 왔다.

 

'밥'의 재구성

COVID-19 팬데믹이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은 밥의 재발견이다. '밥집 맛집 찾아 삼만리'라는개방적 다층적 '식문화', '밥 한번 먹자'는 인사법과 예절, 떠주고 권하고 멕여주고 나눠 먹는 '식습관', 시장과 북적거리는 거리와 이국적이고 낯선 음식들과의 교류, 혼밥과 음식공유 문화와 삶의 스타일에 대한 전면적 재고를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식食문화'의 근저에는 과도한 '인간욕망'이 흐르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인간 '행복추구권'이라는 이상한 가면을 쓰고 이 푸른 지구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반려자'들을 살해해버렸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처럼...

하여 팬데믹 이후의 인간 식문화는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다뤄질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재발견에 따른 '밥의 재구성'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생사의 시기에 음식 '맛'은 '악세서리'에 불과하다. 본질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다. 플레이팅보다 레시피가 중요하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즐거움을 위한 식사'를 본질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 지난 식습관'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종합예술 미슐랭 요리법보다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조리법을 익혀야 한다. 처참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먹는다'는 그 자체가 우선이고 '어떻게 먹느냐'는 중요치 않다. 살기위해 생존을 위한 조리법을 배워 둬야 한다.

팬데믹을 종식시키기 위해 우리가 당장 뭔가 해야 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밥상머리에 가족들이 오순도순 둘러앉고, 시장에서 맛집과 밥집들의 문이 다시 열리고, (물론 잘 씻은)손으로 밥을 나눠 먹을 만큼 사회의 신뢰자산이 쌓이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COVID-19 팬데믹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인류의 '식습관'이 바뀌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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