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몬텔레나. <사진=나라셀라 제공>
▲ 샤또 몬텔레나. <사진=나라셀라 제공>

1850년대의 골드러쉬와 이후 한 세대에 걸친 미국 와인업계의 1차 중흥기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미국인들은 와인 보다는 위스키로 대표되는 고도주를 주로 마셨다. 1860년대의 남북전쟁은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많은 사람들이 독한 술로 시름을 달래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전반을 강타한 두 개의 사전, 제 1차 세계대전과 이어지는 경제대공황을 거치며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미국은 청교도 주의에 입각해 세워진 국가로서 음주의 사회적 폐단에 대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늘고, 음주에 따른 각종 사건사고가 줄지어 생기자 마침내 미국 정부는 상업적 용도의 알코올의 생산, 및 유통을 전면 금지하는 금주령(The Prohibition)을 1919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까지 이른다.

금주령 시행 이후 표면적으로는 알코올 소비와 그에 따른 해악이 줄어든 듯 보였으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법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술을 구하거나, 합법적으로 포도즙처럼 술의 원료를 사서 집에서 밀주를 직접 담궈 마시기도 했다. 또한 마피아가 주류 밀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하는 등 다른 방향으로 금주령의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미정부는 마침내 15년간 유지해 온 금주령을 1933년 해제하기에 이른다.

금주령은 미국 와인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주령 초기에 와이너리들은 와인이 아닌 발효 전의 포도즙이나 포도벽돌(발효 안 된 포도즙을 탈수시킨 벽돌모양의 분말)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포도즙은 집이나 마피아들이 담그는 밀주의 주원료가 되었으나 포도즙 판매 만으로 와이너리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많은 양조장이 문을 닫았다. (이 와중에 베린저를 포함한 극소수의 와이너리는 공식적으로 미사주 양조를 허가 받아 명맥을 유지했다.)

샤또 몬텔레나 나파 밸리 샤도네이. <사진=나라셀라 제공>
▲ 샤또 몬텔레나 나파 밸리 샤도네이. <사진=나라셀라 제공>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에 캘리포니아에 800개 정도의 와이너리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해제된 1933년에는 고작 140개 정도의 와이너리만이 남아 있었다. 폐쇄되고 주인을 잃은 양조장과 포도밭들은 일부 재건되었으나 미국인들의 와인 소비는 금주령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늘지 않았다. 1930년대에서부터 1950년대까지 여전히 어려운 시기를 거치는 동안 비전가들은 나파와 소노마에서 포도밭과 양조장을 재건하고, 유럽의 포도재배와 양조기술의 습득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유럽의 고급 포도품종들을 자신들의 포도밭에 심고 양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와 1960년대까지도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생산되던 와인들은 대부분 포트 와인과 유사한 달콤한 와인이었다. 하지만 선구자들의 지칠줄 모르는 노력은 마침내 1976년 파리 테이스팅이라는 예상 밖의 급물살을 타고 미국와인 품질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다음 달에 계속)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