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판 짜기 ‘미중 신냉전 질서’ 새 변수, 체제안전 우선하는 北, 美 대선이 분수령  
대북정책 ‘고르디우스 매듭’ 끊는 방식 아닌 긴 호흡 필요, 北 내부 대남적대청산도 관건 

조선중앙TV는 6월 1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폭발음과 함께 연락사무소가 회색 먼지 속에 자취를 감추고 바로 옆 15층 높이의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전면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난 모습이 담겼다.[사진=연합뉴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 조선중앙TV는 6월 1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폭발음과 함께 연락사무소가 회색 먼지 속에 자취를 감추고 바로 옆 15층 높이의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전면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난 모습이 담겼다.[사진=연합뉴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폴리뉴스 정찬 기자]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6월 4일 대남 담화 발표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다. 발단은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이지만 근본 배경은 북미 비핵화협상 실패에 따른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좌초 위기와 맞물려 있다.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남한을 향해 대북전단 살포가 4.27판문점선언 위반이라면서 응분의 조치를 요구하면서 개성공단 완전철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남북군사합의 파기를 거론했다. 이어진 북한의 행보는 김 제1부부장 담화에서 제시한 프로세스를 밟아갔다.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국내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와 청와대가 대북전단 살포금지법 입법화 입장을 밝혔지만 북한의 대남정책결정기구 통일전선부는 다음날인 5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적(敵)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8일 열린 북한의 대남사업 부서들의 사업총화 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의 김영철 부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對敵)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북한은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다음날인 17일 김여정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의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 메시지에 <철면피한 감언이설을 듣자니 역스럽다>는 제목의 장문의 담화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막말로 공격했다.

북한 권력서열 2위로 부상한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북남합의가 한걸음도 이행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남측이 스스로 제 목에 걸어놓은 친미사대의 올가미 때문”이라며 “<한미실무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 물고 사사건건 북남관계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 바쳐온 것이 오늘의 참혹한 후과로 되돌아왔다”고 미국에 얽매인 남북관계를 직접적으로 조준했다. 

또 김 제1부부장은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북남관계의 기초이며 출발점인 상호존중과 신뢰를 남측이 작심하고 건드렸다는데 근본문제가 있다”며 “위원장동지를 감히 모독한 것은 우리 인민의 정신적 핵을 건드린 것이며 그가 누구이든 이것만은 절대로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김 제1부부장 담화 발표 당일에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 발표를 통해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업지구에 연대급 부대들과 필요한 화력구분대 전개,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하였던 민경초소들의 재진출 전개, 접경지역 부근에서의 각종 군사훈련 재개 등도 밝혔다. 북한 관영매체 중앙통신도 청와대가 특사파견을 요청했지만 김 제1부부장이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16일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강력한 유감과 함께 “북측이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할 경우, 우리는 그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4.27판문점합의를 파기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또 청와대는 다음 날인 17일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에 공식적으로 ‘몰상식한 행위’로 몰아세우면서 앞으로 “감내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북한의 특사 제안 공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했다. 북한의 거듭되는 대남공세에 처음으로 강경한 자세로 임함에 따라 남북 간의 긴장고조 수위는 지속적으로 높아지면서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북한은 청와대 입장에 6월 21일 통전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남조선 당국자들이 늘상 입에 달고 사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똑같이 한번 제대로 당해보아야 우리가 느끼는 혐오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것이 얼마나 기분 더러운 것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맞받았다. 그리고 4.27판문점선언을 깨는 대남 확성기 방송시설을 다시 설치하고 대남전단 1,200만장을 살포하는 등의 조치에 들어가겠다며 긴장을 고조시켜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김정은 위원장이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에서 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는 결정을 했다는 6월 24일 <조선중앙통신> 보도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6월 4일 김여정 제1부부장 담화 이후 20여일 만이며 김 제1부부장이 8일 대남사업을 ‘대적(對敵)사업’으로 전환하겠다고 한 지 불과 2주 만이다. 

한반도 새판 짜기에 앞서 남북한 긴장을 최대한 고조시켜 협상력을 높여야 하는 김 위원장이 갑자기 후퇴 지시를 한 배경에 ‘볼턴 회고록’이 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은 북미정상회담 당사자다. 지난 상황을 자신의 관점에서 복기(復棋)했을 가능성이 높다.

文정부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새판 짜기 돌입, ‘미중 신냉전 질서’ 도래가 새 변수

‘볼턴 회고록’은 역설적으로 남북한이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새판 짜기’에 돌입하도록 하는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6월 대공세를 맞아 외교안보통일라인 재정비에 나섰다.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남북관계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17일 사의를 표명한 것이 신호탄이다. 신임 통일부 장관 임명에 이어 정의용 실장도 물러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새롭게 등장할 외교안보라인의 첫 과제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 2막 새판 짜기다.

새판 짜기의 핵심은 남북, 북미, 한미 3개축의 중심을 북미에서 남북 축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까지 한반도 문제의 최대 장애물이 북한 핵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 핵협상 타결에 모든 외교력을 동원했지만 올해부터는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구도를 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또한 험난하다. 미국은 끊임없이 ‘한반도 비핵화 속도’에 맞춘 ‘남북관계 진전’을 얘기하고 있다. 사사건건 미국과 의견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를 바라지 않는 일본, 미국과 한국의 한반도 정세 주도를 용인할 수 없는 중국까지 감안하면 남북한 주도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지난 2년의 어려움보다 더 큰 난관을 맞을 수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북한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가길 원하지만 실제로는 결단을 못했고 행동도 따르지 않았다. 과거의 ‘6자회담’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은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의 협상 목표는 ‘체제 안전보장’이다. 그러나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신의 발목을 잡는 현상도 반복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혁과 개방을 주저하며 ‘행동 대 행동’이란 원칙의 ‘비핵화 살라미 전술’을 들고 나온 배경도 여기에 있다. 경제발전을 원하면서도 체제 안정에 우선순위를 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 축으로 한반도평화프로세스 2막이 열리는 전제는 북한의 ‘비핵화’ 약속이 어떤 식으로든 지켜져야 가능하다. 북미 협상 결렬을 이유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 할 경우 시작도 못하고 파탄에 빠진다. ‘핵’과 ‘체제안전’을 동일시하는 북한의 2막을 열기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6월 20일 평양을 처음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찬을 함께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조선중앙통신]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6월 20일 평양을 처음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찬을 함께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조선중앙통신]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 특히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는 충돌한다. 일본과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남북한이 의기투합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의기투합한다 해도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를 뚫고 나가기 것은 어렵다. 볼턴 회고록이 증명하듯 집요한 일본의 방해가 하노이 결렬의 원인 중 하나다.

한반도 정세 변화는 국제질서와 호흡할 수밖에 없다. 이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한반도 분단과 전쟁은 우리 의지가 아닌 미소냉전의 국제질서가 낳은 산물이다. 또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고르바초프 등장에 따른 냉전질서 해체과정의 부산물이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던 미국이 1987년에는 막았다. 소련의 개혁·개방이 그 배경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민주화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냉전해체기에 북한은 국제적 외톨이로 전락했다. 남한은 중국, 소련과 수교했지만 북한은 미국, 일본과 수교하지 못한 채 동맹을 상실했다. 그 결과가 북한 핵 개발이며 지금의 북핵문제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국제질서는 변하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중 신냉전’ 시대가 시간이 갈수록 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반도 뿐 아니라 남중국해, 대만, 홍콩을 거쳐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지로 미국과 중국 간의 충돌 면이 넓고 깊어지고 있다.

이는 북한에게 새로운 기회다. 중국이 북한의 혈맹으로 거듭나는 국제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곧바로 북한의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고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해 6월 북한을 처음 방문했다. 

북한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걸을 때 외면했고 김정은 정권이 출범했을 때 홀대했던 것이 중국이다. 심지어 2015년 9월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천안문에 나란히 서기조차 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북한의 동맹이다. 중국은 최근 80만 톤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했다.   

북한에게 ‘미중 신냉전’은 소련 해체 이후 30년 간 지속된 고립에서 벗어나는 계기다. 이는 한반도 신냉전체제라는 암운을 몰고 올 수 있지만 북한 핵 문제 해결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핵=체제안전’이란 등식은 고립 속에서 나왔기에 고립에서 벗어나는 만큼 그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새판짜기 분수령 美 대선, ‘고르디우스 매듭’ 끊는 방식 아닌 긴 호흡 필요, 남북 상호적대 청산이 관건 

이러한 전개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기존의 남·북·미에서 남·북·미·중 4개 국가 참여로의 변화를 예고한다. 북한 핵과 체제안전 보장은 한 묶음이지만 북미 간의 깊은 불신의 골이 가로막혀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을 이번 북미협상 과정에서 확인했다. 결국 중국이란 또 다른 완충지대 내지는 중재자가 필요한 여건이다.

새판 짜기 분수령은 미국 11월 대선이다.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것은 미국이기 때문이다. 2기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든 새롭게 북한 핵문제에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트럼프 대북정책을 실패로 규정할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셈법’, ‘단계적 비핵화’ 협상으로 갈 경우 중국을 ‘보증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에 맞춰 한국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정책 추진은 보다 신중해질 것이다. 지난 2년처럼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듯 단숨에 질주하기보다는 보다 긴 호흡으로 국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2막은 4.27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기초해 한반도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면서 남북경협과 교류 확대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또 독일 통일을 모델로 하는 한국의 통일정책 방향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2020년대는 30년 전 미소 냉전해체기가 아니라 미중 신냉전 체제 구축기다. 1990년 독일 통일은 냉전해체라는 국제질서의 흐름을 탔지만 지금의 한반도는 신냉전이란 역류에 휩싸여 있다.

당시 미국은 영국, 프랑스 방해에도 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라는 전략적 이익을 위해 독일통일을 도왔지만 지금의 한반도는 다르다. 또 당시 독일은 분단됐지만 전쟁 없이 장기간 교류했다. 대결과 혐오의 벽도 낮았다. 외부환경 변화와 내적 역량이 상호 조응한 결과가 독일 통일이었다. 

우리는 지금 남북한 주민들이 정상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성을 겹겹이 쌓아왔다. 6.25전쟁을 겪고 이후 70여 년간 서로 적대한 탓이다. 또 이것이 남북 정치체제를 규정했다. 남북대결 정서는 남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북한에도 뿌리 깊다. 하노이 회담 결렬 배경에 북한 내 대남적대정서가 작용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이 벽을 넘지 못했다.

진보진영의 ‘햇볕정책’, ‘대북포용정책’ 용어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감이 크다는 것은 탈북민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남한에 대한 대결정서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진 북한 정권의 정치적 기반이다.

문 대통령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해왔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재차 가동되면 남북 축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그러나 남북 축에 응축된 ‘신뢰의 힘’이 신냉전질서의 힘에 맞설 정도가 될 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신뢰의 힘’ 구축은 남한 뿐 아니라 북한의 ‘대남 적대정서’ 청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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