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격동의 시기, 부산에서 태어나다.

관복 입은 박기종. 부산의 선각자로 부산의 근대화 에 앞장섰다. <자료 제공=부산개성고등학교>
▲ 관복 입은 박기종. 부산의 선각자로 부산의 근대화 에 앞장섰다. <자료 제공=부산개성고등학교>



 
 부산 토박이 박기종, 경무관이 되다

부산은 지석영 이후 동래부는 동래군으로 바뀌었다가 1896년 다시 동래부로 바뀐다. 1883년부터 동래부사가 겸했던 외교와 통상업무를 담당했던 감리가 1885년 폐지되었다가 다시 동래부사는 부산항재판소, 동래감리를 겸하게 된다. 당시 부산감리소는 현재 부산 영주동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1896년 5월 1일 개항장인 동래(부산)에 경무서가 설치되어 해양 경찰사무를 담당하게 된다. 부산 감리소 안에 있었다. 동래의 초대 경무관(경찰청장)은 박기종(朴琪淙, 1829~1907)이었다.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박기종은 젊은 시절 당시 부산을 대표하던 상인 조직인 동래 팔상고(八商賈)를 드나들면서 일본어와 상업을 배웠다. 박기종은 1876년과 1880년 김기수, 김홍집 일본 수신사 일행의 통역관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대일 외교활동에 참여하였고 국가로부터 사업자금이 될 은전도 받았다. 부산에서 "기생과 음악을 모두 준비하고 술상을 뻑적지근하게 차려놓고" 연회를 베풀 정도로 상업 및 어업을 겸업하며 자본을 축적하였고, 부산에서 서울과 일본을 왕래하며 대일외교를 수행하였다.

 
박기종은 1886년 10월 부산항 경찰관으로 개항장 부산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 객주와 어민 간의 알력 다툼을 중재하고, 일본인의 이권을 견제하며 측량에도 관여하는 등 개항장 내의 조선측 치안관이자 외국인과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1880년 6월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갔던 지석영은 1895년 동래부사로, 1894년 8월 박기종은 절영도 첨사로 있다가 초대 경무관이 되었다. 경무관은 동래부사겸감리의 지휘를 받았다.

1886년에서 1895년까지 10여 년 동안 부산항 경찰관, 사검관(일본어선에 대한 징세 담당), 경무관 등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인과 중국인 등 외국인과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이는 그의 사업 기반이 되었다. 개항장의 치안과 무역 등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던 박기종과 동래부사 지석영은 서로 만남이 있었다. 청일전쟁 및 동학농민운동 시기로, 박기종은 부산에서의 일본군의 활동을 돕는 한편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입장을 일본 측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일본어를 잘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1896.01.25. 부산개성학교 개교식 사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 속에 일어 교육의 근대식 학교가 부산에서 개교하였다.<자료제공=부산개성고>
▲ 1896.01.25. 부산개성학교 개교식 사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 속에 일어 교육의 근대식 학교가 부산에서 개교하였다.<자료제공=부산개성고>

 

 

박기종, 부산 최초 근대 학교인 개성학교를 설립하다
  

경무관에 해임된 박기종은 1895년 5월 이내옥, 배문화, 변한경(셋째 사위), 이명서 등과 협의하여 부산에 근대식 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일본 상인들과 거래하던 객주들로 추정된다.

박기종은 1차 김기수 수신사를 수행하여 동경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를 참관한 바 있다. 박기종이 관료로 기업가로 성공한 배경은 일본어였다. 당시 외국어는 소통 수단이지만, 권력의 길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설립자 5명은 300원씩 낸 자금 1500원으로 영주동의 현 봉래초등학교 남쪽 언덕 위에 1천여 평 규모의 부지에 대소 건물 6동을 1896년 1월 건축하였으나, 총경비가 3천여 원에 달해 다시 5명으로부터 재차 추징하였다. 그해 2월 14일 학부의 내락을 얻어 3월 1일에 부산 최초로 한국인을 위한 일어교육 기관으로 '사립부산개성학교'를 개교하였다.

1896년 1월 25일 부산 개성학교 제1회 입학식이 열렸다. 부산 영주동 민둥산과 밭이 보이는 산비탈의 초가집과 논밭을 배경으로 흰색 기와로 된 학교 건물 6동과 운동장에 입학식날 수백 명의 아이와 선생님이 모여있다. 건물 현관에는 태극기가 높이 게양되어 있고, 건물 왼편에는 축하온 경찰과 기관원이 도열해있고 흰 두루마기 등을 갖춰 입은 학부모와 동네 주민들은 학교 담장 밖에서 행사를 지켜보고 있고, 운동장 한쪽에는 신기한 듯 동네 꼬마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입학식은 부산의 큰 잔치였었다. 인근에 부산 감리서가 있었다.

조선인을 위한 초등 과정과 중등 과정을 겸한 개성학교는 개교 당시 100여 명이 입학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부산 출신이었으나 멀리 전라도에서도 왔다. 설립 때부터 관여했던 일본인 아라나미 헤이치로(荒波平治郞)가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교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있었다. 교사의 절반 정도가 일본인이었다. 수업 과정은 초등과(전기 3년), 중등과(4년), 고등과(2년)로 되어있었다. 개성학교의 학비는 무료로 궁핍한 서민 자제를 대상으로 '일본어에 의한 보통학'을 가르쳤다. 모든 교육은 일본어 과목 중심으로 일본어로 수업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지리 공부, 군대식 체조하기, 양잠 실습도 하였다. 조선과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다.

학교는 운영경비 부족으로 경영이 어려웠다. 그 결과 1897년 정부로부터 공립 학교로 인가되어 '한국공립부산개성학교'로 전환되었고 정부에서 1200원을, 일본 외무성에서 1800원을 지원받게 되어 학교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식교육은 여전했다. 1898년에는 초등과(전기 3년)의 제1회 졸업생 6명이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3년)에 부산진과 고관에 개성학교 지교(支校)가 설립되었으며, 동래에는 보조학교로 일어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후 1907년 3월 학교는 사립보조교로 '부산일어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09년 정부에 헌납하였다.

개성학교의 후원자는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일본의 부산공사나 영사 그리고 주차대장 등 9명과 지석영을 비롯한 역대 동래 부윤(감리) 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당시 직책상 후원자가 되었던 것 같다. 교빈(校賓) 17명 중 한국인은 박영효, 이정용(이지용?), 송태관 3명이었다.

개성학교의 설립은 조선인 유지들이 하였으나 운영은 철저하게 일본의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왔다. 민족 자주적 인간의 양성이라기보다 친일적 인간의 양성이었다.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국권회복을 꾀했던 사립학교와는 교과과정이나 교육목표가 달랐다. 또 남학생을 대상으로 했으며 여자교육은 도외시되었다. 여학교는 1895년 10월 15일 좌천동 초가에서 수업 연한 3개년의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여 호주선교사 멘지스가 교장을 맡았다.

 

박영효, 김홍조 그리고 송태관 이들 세 명의 인간관계는 정치적 경제적 지역적 연결고리로 엮여 있다.<자료 제공=이병길>
▲ 박영효, 김홍조 그리고 송태관 이들 세 명의 인간관계는 정치적 경제적 지역적 연결고리로 엮여 있다.<자료 제공=이병길>

 

개성학교 졸업생 송태관, 기업가로 변신하다
  

개성학교 학생은 성적이 우등하면 졸업 후에 외국 유학을 보냈다. 2회 졸업생 송태관(宋台觀, 1874~1940)이 그중 한 명이다. 송태관은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 출신이다. 조실부모하여 조모인 평산신씨가 어린 손자를 업고 키웠다. 개성학교에 입학한 연유를 알 수 없으나 김홍조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그가 김홍조의 집에서 심부름하며 기거하였는데 재주가 많고 영민하였다고 한다. 개성학교를 1898년 3월에 졸업하고 학교 전액 장학금으로 도쿄상업학교에 유학을 하러 갔다. 당시 도쿄에는 일본 망명객 박영효가 있었고, 김홍조가 1900년부터 1907년까지 후원하였다. 이때 김홍조가 울산 유학생을 후원하고 있었는 데, 송태관도 그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일본에 망명 중인 개화파들과 교류했을 것이다.

졸업 후 일본어가 능통하여 1905년(고종 42) 탁지부(度支部)의 주사로 관직을 시작하여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대통령 비서실 차장)에까지 올랐다. 1907년 7월 박영효가 주도한 고종 양위반대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반일 동우회원들이 이완용의 가재도구와 고서적 등이 있는 집을 불태워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혔다.이때부터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양위반대 사건으로 정부는 박영효를 제주도로, 송태관은 전남 진도로 유배하였다.

송태관은 이후 부산 좌천동에 거주하면서 대지주로서 구포은행과 경남은행의 대주주로 참가한다. 부산자동차, 삼산자동차, 부산신탄, 송태 정미소, 조선주조 등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하고, 1919년 백산 안희제가 만든 '기미육영회'의 평의원에 참가하여 인재를 유학 보내고, 1921년 경남은행의 두취(현 은행장)에 오르고, 부산에 극장을 짓는 등 활동을 하였다. 부산은 조선 최초의 개항 도시였는데도, 막상 극장업 분야에서 일본인이 독점하여 민족적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송태관은 상업적 이익 못지않게 민족적 형평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조선인 극장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그는 자본가였기에 사업으로 인한 친일적 경향은 있어도 부왜의 흔적은 많지 않다. 1921년 부산 서면으로 훗날 개성학교의 후신인 부산공립상업학교가 옮길 때 상의원과 유지들 기부액(3만3550원)의 73%에 해당하는 2만4550원을 기부한다. 그의 아들이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宋錫夏, 1904~1948)이다.

개성학교의 설립은 한국인이 하였으나 경영과 교육은 일본인이 하였다. 운영경비는 한국정부와 일본 외무성이 제공하였다. 한일합작 학교로 볼 수 있다. 학교 설립은 일본어 교육이 지역 인재를 양성하고 이는 지역 근대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지역 경제인의 바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어 사용 능력의 신장은 또 다른 한편으로 친일 인재의 양성으로 나타났다. 송태관이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이었다. 유학을 갔던 졸업생은 관료로 진출했다. 아마 졸업생은 일본어를 통해 생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항일투사는 알려진 바 없다. 격동의 시기에 친일인사는 반민족 부왜인은 뚜렷이 아니었다.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 이 글은 작가 이병길의 동의에 따라 '오마이뉴스'에도 동시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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