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다섯번째 인터뷰 인물 이신범 전 의원 대표 인터뷰 전문②으로 본지 발행인인 김능구 대표가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10. 3당합당때 민자당에 안들어갔는데 그때 상황을 설명해달라

그렇죠. 그게 90년 1월이죠. 1월 한 19일인가 20일경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 며칠전에 상도동에 제가 정책실에 17명의 전문위원을 공채를 해서 데리고서 청문회도 뒷바라지 하고 입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민주당이 상당히 그점에서 점수를 많이 땄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총재께서 저를 참 신임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그랬는데 그래서 이제 정책실 운영관계로 매달 상도동에 가서 아침식사도 하고 이런 기회가 있으니까 갔더니 며칠있으면 중대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시사를 좀 하시더라구요. 3당합당이라는건 생각을 안하고 그전에 몇차례 저나 몇사람이 그래도 야권통합을 한번 해야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어요.

근데 그전에 그말을 하면 역정을 내시거나 이러진 않았는데 아, 역정을 막 자꾸 내세요. 김대중이 하고 무슨 통합이냐고 그래서 아하 이게 참 어렵게 됐구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결국 두분이 대선을 겪고 그다음에 총선에서 아주 합쳐질 수 없는 말하자면 상극관계 비슷하게 되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근데 저희들은 이제 재야출신의 원칙론에서 그래도 야권을 통합해야 되지 않냐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 김영삼 총재 생각은 그래도 영남세력을 묶어서 이렇게 선거를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아마 이생각을 하셨던거 같에요.

제가 이제 3당합당이 발표가 됐는데 한 사흘 아주 두문불출 하면서 고민을 했어요. 이걸 참 여러 가지 정치적 의리나 실리나 이런걸 생각하면 김영삼총재를 따라서 3당합당에 그냥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것도 하나의 길인데 내가 지금 살아온 길이 어떻게 군사정권을 만든 세력하고 내가 거기가서 같이 정당을 하겠느냐, 고민하다가 차라리 정치활동을 당분간 그만둬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3당합당에 불참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이후에 3김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박찬종 의원과 함께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92년 총선에 처음 출마를 하게 됐는데 소수야당으로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당시 어땠나)

그때 이제 3당합당후에 작게 이제 꼬마민주당이라고 남지 않았습니까? 노무현씨, 이기택 이런 분들이 있는데 김정길 같이 뭐 한 2주정도 이렇게 같이 여러 가지 의논도 하고 활동하다가 도저히 그분들이야 현역의원이니까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저는 뭐 현역도 아니고 원외인사로서 우선 뭐 활동을 할 수 있는 전혀 기반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치활동은 그만둘 수밖에 없다하고 그만두고 한참을 쉬었습니다.

쉬었는데 제3정당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지금 말씀하신 박찬종 의원도 그런 논의를 시작을 하고 또 김동길 교수도 그런 논의를 이제 시작을 했는데 그럼 그 두분을 좀 합쳐서 한번 만들어보면 좋겠다 해가지고 제가 중간에 역할을 하면서 두분을 좀 만나게 주선도 하고 그래서 김동길, 박찬종 거기 뭐 =양순지, 김광일의원= 이런분들 해가지고 몇 번 이렇게 모이고 그랬어요.

근데 결국은 그 정주영이란 분이 나타나서 국민당을 한다고 하면서 그중에 많은 부분을 띠어가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제3정당운동이 아주 조그맣게 위축되버렸죠. 그리고 저쪽은 국민당이라는 돈을 가지고 상당한 그 현실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니까 의석을 확보하고 당이 됐는데 신정치개혁당이라는거는 뭐 겨우 1석을 건지는 실적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당을 사실상 거의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버렸죠. 박찬종 의원 자신도 나중에 신한국당의 수도권선대위원장으로 영입이 돼서 들어가시게 되는 그렇게 된거죠.


11. 문민정부 탄생이후 환경관리공단의 관리사로 가게 됐는데 지금도 낙하산 인사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부분에 대해 입장표명을 해달라

그 낙하산 인사라는게 어느정도는 불가피한겁니다. 자꾸 그 낙하산, 낙하사나 그러는데 대통령제 하에서 역관주의라고도 그러죠. 대통령이 된 사람과 정당이 자기들의 뜻을 펴기 위해서 어떤 그 기관의 중요한 부서를 장악해야 되는거는 그건 뭐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를들면 당시의 상황을 말씀드리면 제가 환경관리공단에 부임해보니까 인원이 한 천명되는데 주요간부들이 60%가 군인출신이었습니다. 5공화국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군대에서 예편되는 장교들을 갖다가 과장급이상으로 특채를 해가지고 주요한 부서에 과장급 이상이 60%가 군인출신이고 그걸 가서 이렇게 인사를 좀 개혁을 할려고 보니까 승진대상자를 3배수, 6배수 이렇게 가져가도 거의 다 군출신이에요. 도저히 이건 뭐 어떻게 개혁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여러 가지 규정을 검토하다가 특별승진을 시켜야겠다, 민간인 출신. 그래가지고 군출신들 보고 당신들 잘해먹었으니까 몇분 좀 양보해라, 권고사직을 이제 사직을 권고하니까 굉장한 반발을 해요. 그래 제가 청와대에 힘을 업고 온 사람처럼 =돼있으니까= 굉장히 여러 가지로 사직을 권고하다 안되서 결국 특별감사라는걸 해가지고 이사람들이 과거에 품위손상한 행위를 적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제 사직을 권고해도 또 안해요.

두사람은 결국 설득해서 했습니다만 한사람은 끝까지 거부해서 해임을 시켰는데 그사람이 정보사 출신입니다. 중앙일보 기자 퇴역했던..
절보고 뭐 칼로 찔른다, 가만 놔두지 않겠다 협박해서 제가 이제 박정희, 전두환이도 날 못죽였는데 니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그런짓을 할 수가..한번 해봐라 이러고 한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빈자리를 민간인 출신으로 특별승진을 시켰는데 이 사례를 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구정권이 만들어놓은 어떤 인사의 폐해라든가, 어떤 적체라든가 또 =적패= 또 잘못된 관행 이런거를 과감하게 개혁할려면은 내부인사 가지고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제가 보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정무직 인사가 와서 그런일을 해줘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식의 어떤 그 하향식 인사가 어느정도 불가피하다, 그런데 결국은 그때마다 자꾸 시비를 거는건 뭐냐면 기득권세력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또 이렇게 내려보내는 사람이 자격미달이거나 함량미달인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에 그런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을 어떤 정확한 사명을 부여해서 내려보낸다면은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거다, 그래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나 정당이 그런 점에서 세심하게 사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전제하에 하향식 인사는 불가피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을 내려보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죠. 그리고 어떤 임무를 띠고서 내려보내냐..


(내려보낸 자체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불가피하다..)

그건 불가피하다 이거죠. 그걸 일일이 다 뭐 공무원시험 보듯이 뽑을수도 없는거고 또 그안에 있는 인사라는게 지금 말씀드렸듯이 기득권세력이 많거든요.


12. 1996년 15대총선때 정치신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때 신한국당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정당사적 의미로 보면 신한국당의 뿌리를 같이하는 여당이 서울에서 총선에서 이긴게 처음으로 알려져있는데 당시 총선상황이 어땠나

당시에 이제 김영삼 대통령이 이제 3당합당을 통해 집권해가지고 그게 처음 맞는 선거죠. 그분이 93년에 취임을 했는데 그리고나서 96년에 총선 아닙니까. 그러니까.


(95년 지방선거 있었다)

지방선거말고 이제 총선은 처음 공천권을 행사하는 선거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제가 사실 이제 95년 3월에 환경관리공단 사직하고 한두달 쉬고 있는데 당시에 김덕룡 의원이 민자당의 사무총장이었습니다.

저를 이제 부르더니 혼자 그렇게 쉬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많은데 부대변인으로 발령을 할테니 와서 당에 좀 적극적으로 일을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이제 뭐라 그랬냐면 제가 3당합당할 때 민자당에 들어가질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민자당에 들어가겠느냐, 저는 그거 안합니다,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당명도 바꾸고 당을 새로 만들다시피 할테니까 조금 참고 들어오라고 그래서 이제 제가 그때도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과거 민정당같은 유산을 다 정리는 못하겠지만 한꺼번에 상당부분 좀 씻어낼 필요가 있고 또 수도권사람들이 그걸 원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적절한 기회에 당명도 바꾸고 당을 혁신하신다면은 그런 전제하에 제가 그럼 와서 부대변인직을 하겠다, 이렇게 돼가지고 95년 5월말에 제가 민자당의 부대변인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천을 상당한 물갈이를 한거는 어떤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3당합당때 소수파로 들어갔다가 소수파가 이제 주류가 되는 그런 정치적 혁신이 아니었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수도권사람들이 그런 정치적 혁신을 도와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게 아니겠느냐, 또 그 방향이 옳았고 그래서 수도권에서 약진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13. 정당에서 제일 중요한게 선거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건 공천인데 당시 공천에 그이후 문제가 된 김현철씨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공천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었다는 말도 하는데 여론조사를 통해 공천을 최초로 전면적으로 도입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 공천에 대해 말해달라

지금 말씀하신대로 어떤 인물놓고 여론조사 여러차례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훌륭하지만은 대중적이지 못한 사람은 공천할 수가 없는거니까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또 그런 대중성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론조사를 여러번 하면서 거기에서 인물군을 추려내고 그 인물군은 상당히 광범하게 인재풀을 만들어가지고 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 여론조사를 하는 과정에 김현철씨가 원래 여론조사 기관을 운영했고 전문가였고 그러니까 어떤 역할을 했다 이렇게 이제 추측을 하고 공천받은 사람이 다 김현철씨가 공천한거 아니냐 이런 얘기까지 나돌았던거죠.

심지어는 지금 감옥에 가있습니다만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이 한보청문회를 하는데 느닷없이 이신범의원하고 김문수의원은 김현철씨가 공천한 사람이고 공천받기전에 김현철씨하고 여러번 만났다 이렇게 얘길해서 정회가 되고 제가 이제 사과하라고 한참 야단한적이 있어요.

고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공천전에 김현철씨 만난일이 한번도 없어요. 제가 88년에 통일민주당 정책실장할 때 김현철씨가 그때 아주 젊은 나이였습니다. 제가 그때 39살 시절이니까 와서 인사를 해서 정책실장으로 아버님 돕게 되셨다고 들었다고 중앙조사연구소라는걸 한다고 명함을 줘서 알고 상당히 똑똑한 청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두번 차마신거 외에는 그사람하고 그관계가 그게 다에요.

저는 이제 공천을 어떻게 받았냐면 제가 96년 4월선거죠. 95년 12월까지 어디로 지역구를 정해야될지 모르고 있는데 남재희 의원께서 =우등장을= 하셨죠. 강서을구의 국회의원이셨는데 4선의원입니다. 이분이 제 서울법대 선배인데 제방에 자주 놀러오셨어요.

부대변인실에요. 하루는 오시더니 12월 중순에 내가 모시던 전두환, 노태우가 도둑놈으로 규정이 되버렸는데 고대로 그분 말씀하신..도둑놈으로 되버렸는데 내가 이거 정치를 이제 그만해야 되는거 아니냐, 후배 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 그래서 그 말씀이 옳으신데 청와대에다 물어보고 그만두시라고 함부로 그냥 먼저 그만두시는거 아니다 그랬더니 좋은 말이라고 청와대 그럼 물어보겠다고 청와대 소식이 없다는 거에요.

2주일이 지나도. 그래서 이게 뭐냐 그래서 그만 두시란 얘기같은..그렇게 이제 농담을 했더니 이분이 진짜 그만두셨어요. 그러더니 한 일주일 지나서 전화가 왔어요. 지역구를 아직도 못정했느냐, 못정했으면 내가 하던 지역구가 괜찮으니 여기를 좀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 적당한 인물이 없다 자기가 보기에. 그래서 오라 그래서 지역구를 갔어요.

가서 보니까 뭐 그냥 그런가보다 그런데로 뭐 서울이고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이제 와서 제가 그럼 사무총장하고 의논하고 좀 물어보겠습니다, 그러고서 사무총장하고도 의논을 했지만은 청와대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김광일 실장입니다. 대통령께 제가 여기 국회의원을 좀 출마하고 싶은데 해도 되겠는지 한번 여쭤봐라 그랬더니 김광일씨가 바로 전화가 왔어요.

대통령께서 거기 해도 좋다고 그러신다, 그래서 이제 그래도 공식적으로 뭐가 있어야 준비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무총장한테 갔더니 강삼재 사무총장이 자기가 한번 청와대 들어가서 들어가는 길에 다시 한번 여쭤보고 확실하게 주신다고 그러면 그때 사무실을 내고 움직여라, 그래서 이제 1월초에 청와대 갔다 오더니 확실하게 여길 주는게 옳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준비해보라고 그래서 이제 강서을구에 가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 공천과정은 김영삼 대통령과 저와 직접 한거지 중간에 누가 뭐 굳이 끼었다면은 김광일 비서실장하고 강삼재 사무총장이 중간에 낀것뿐이고 남재희 전의원이 거기서 역할을 하신거지, 김현철씨는 거기 그야말로 천만분의 1도 아무 역할이 없었다, 그런데 모략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받은 사람은 다 김현철이가 공천한거 아니냐 이렇게 이제 모략을 한겁니다.

그래서 이제 국회의원이 당선된 다음에 한번 연락이 와서 식사를 같이 한적은 있어요. 그러나 그건 뭐 의례적으로 그냥 식사한거지 그게 무슨 그사람한테 공천에 대해서 내가 무슨 감사할 일도 없는거고 대통령 아들이니까 한번 만나서 알고 지내는게 좋겠다 이정도로 생각한거죠.


(당시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였기 때문에 총재로서 공천권을 행사한 것이네요)

예. 그렇죠.


14. 국민의 정부시절 DJ저격수로 맹활약했는데 깊은 원한관계가 생겼나 곡해가 생기기도 하고 16대 총선에서 실제로 저격을 받아 낙선했다는 얘기도 있다, 여기에 대해 말해달라

뭐 그분하고 무슨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건 아니구요. 대통령 되셨을때 제가 물론 한나라다아 소속이었으니까 한나라당이 패배한데 대해서 참 야당역할을 하게 됐구나, 고단한 정치생활이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만 어떻든 그분 대통령 된건 잘됐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전라도 출신이 한번도 대통령이 안됐는데 그분이 전라도의 한을 풀어주게 됐고 또 이분이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경륜과 경험이 있는 분이니까 좋은일을 많이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제 참 잘하시길 바란다 이렇게 인터뷰에도 얘기하고 또 취임식에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잘 안가는데 제가 여러사람 권해서 취임식장에도 가서 당선자 취임하시는 분 뒤에 앉아서 축하해줬더니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 중에 한두분이 참 고맙다고 전화도 오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이제 그뒤에 뭐 청와대 밥먹으러 갈일이 있어가지고 80년 밤까치산분들 초청해서 가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마 98년 중반쯤 된거 같은데 가서 그냥 이렇게 덕담을 하고 뭐 여러 가지 얘길하고 그날도 안갈라 그랬는데 한나라당 당적가진 내가 거기 왜 갑니까? 그랬더니 꼭 오라고 또 여러번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가서 이제 식사를 했는데 그뒤에 작은 사건입니다만 모여당의원한테 전화가 왔어요. 당시에 여당. 김대중 대통령 측근이.

대통령의 건강이 이상하고 치매에 걸렸다는 얘기를 이의원께서 하고 다닌다는데 대통령 청와대에서 아주 굉장히 불쾌하게 지금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 그런 얘기한적이 없는데 어떻게 어디서 올라간 보고서냐 그러니까 안기부에서 그런 보고가 올라갔다, 청와대로.

근데 그날 이제 끝나고 나와서 그 다음날인가 한나라당 의원들 모임이 있었는데 대통령이 건강이 어떻드냐 그러기에 뭐 감기 걸려서 좀 늦게 왔지 그런데로 그 연세에 괜찮은편 아니냐 이정도로 그냥 넘어간 얘기에요.

그게. 근데 제가 왜 이말씀을 드리냐면 김대중 대통령 주변에 그렇게 저에 대해서 상당히 뭔가 좋지 않게 얘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얘기를 좀 드릴라고 하는거고 그다음에 이제 그 안기부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야당이 되니까 98년 이후에 이제 야당이 됐는데 김대중 대통령 취임후에 야당이 되고나서 저한테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좀 그쪽으로 와줬으면 좋겠다는 교섭이 왔어요. 그결과로 이제 그때 한 10여명이 이제 탈당해서 갔죠.

근데 저야 뭐 개인적으로 무슨 약점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여당에서 야당을 갈 수 있지만 또 야당에서 야당을 가는건 괜찮지만 정치도의상 야당에서 여당으로 개인적으로 움직이는건 이건 옳지 않다 전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권고가 있었는데 제가 제 지역구에 호남사람이 많지 않냐 또 이런 얘기까지 붙여주고 해가면서 제의가 왔는데 제가 그렇게 못하겠다 그러고 이제 끝을 냈습니다.

그러고 이제 몇 달 지나니까 총풍사건이라는게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98년 9월입니다. 그게. 총풍사건이라는게 장석중, 오정은 뭐 이런 사람들이 판문점에서 대통령 선거기간중에 총격을 요청했다고 북한에다가 총격을 요청했다 하는 취지로 이사람들 체포해갔는데 제가 이제 야당이 됐으니까 야당의 역할을 해야될거 아닙니까.

제가 그당시에 한나라당 인권위원회에 간부였는데 가서 이렇게 그때 추석명절인데 법원에 가서 이사람들 면회할려고 기다리고 그러다 밤중에 용케 면회했는데 보니까 고문을 했어요. 이제 고문사건을 언론에다가 의원으로서 발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전에 가족들이 했습니다만은 근데 결국은 그사건이 다 무죄가 선고 됐습니다. 나중에.

이사건 과정에 지금까지도 조사되지 않은 비화가 몇 개 남아있는데 제가 이사건을 보면서 그때 월간조선이나 여러군데 인터뷰를 했는데 법정에서 고문당한 얘기를 들으면서 천장을 쳐다보고 참 눈물을 참느라고 애를 썼어요. 아니 어떻게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을 했으면 됐지, 자기하고 경쟁한 야당대통령 후보를 음해할려고 어떻게 저런사람들 잡아다가 국가기관에서 고문을 하고 그것도 아니라고 자꾸 부인을 하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내가 좀 발언해야겠다, 그 문제를 제가 계속해서 파헤치기 시작했죠.

결국 이제 제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야당이 됐으니까 야당의원으로서 충실하게 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겠다, 이게 입법부의 임무니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야당이 있어야 된다, 강력한 야당이 있어야 여당이 탈선하지 않고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냐 그런 점에서 내 소신이 강력한 야당의 앞장에 서자, 그렇게 하다 이제 보니까 저한테 자꾸 제보가 들어와요.

여러 가지 제보도 들어오고 또 제보가 들어오면 제가 상당히 성실하게 그사람들 입장을 대변해주니까 많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들어오고 그래서 앞장서서 자꾸 비판적인 활동을 하게 된거죠. 그러다보니까 아마 감정적으로 저한테 이제 그쪽에서 대응을 하게 됐고 결국 16대 총선에 2004년 4월입니다만은 소위 표적공천이라는걸 했는데 표적공천까지는 제가 이해를 합니다.

그럴 수 있다, 엄청난 돈을 갖다가 뿌려댔는데 그러고서 그 당선된 사람이 자기가 아주 굉장한 공명선거를 했다고 떠드니까 더 한심한거고 흑색선전을 해대는데 내가 미국에 집을 사놨다, 다 허위로 판명됐는데 법원, 검찰까지 한통속이 되가지고 뭐 기소도 안하고 제정신청도 안받아주고 그런걸보고 제가 굉장한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근데 그 당시에 부정선거에 사용된 돈이 대북송금특검과정에서 죽은 정몽헌씨가 회장으로 있던 현대상선이죠.

현대상선에서 200억원의 현찰이 총선 일주일전에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의 용도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거는 철저하게 조사해야 되요.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은 이 돈이 어디로 갔느냐 이거에요.

이것이 바로 이중에 아마 제 짐작에 한 5분의 1은 내선거구로 왔다, 그래서 내가 이제 선거끝난 후에 우리 지역구민들보고 인사다니면서 여러분들 제 덕분에 돈 많이 쓰셨으니 제가 국회의원으로서 참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러고 하고 다녔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죠. 그점에선 김대중 대통령한테 제가 많이 실망을 했습니다. 제가 일종의 야당으로서 정적이니까 표적공천해서 그거 하는것까지 다 이해를 하는데 거기에 돈까지 뿌리고 흑색선전을 왜 하느냐..


15. 새천년민주당 사무부총장이 상주했다는 말도 있는데..

한 두사람이 상주하면서 동서중간에 마곡지대라고 백만평이 녹지대가 있어서 사실상 지역구가 분할 비슷하게 되있으니까 동서로 다니면서 뿌렸는데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사는 지역이 상당히 넓습니다. 거기가. 그리고 임대아파트가 18000가구 되고 그러니까 거기 뭐 아니 대통령후보가= 800표밖에 지지하는= 동네에서 제가 1200표를 졌어요.

그리고 제가 여당일때 60표 이긴 동네인데 1200표 졌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다니면서 물어보니까 그런 얘길해요.

돈받은 얘기를. 그리고 돈 주는거를 망원렌즈로 촬영해서 검찰에 갖다주고 법원에 갖다줬는데 그냥 그 준 구의원만 100만원 벌금하고 여자들 몇 명 처벌하고 그냥 후보는 몰랐기 때문에 죄가 없다 그리고 예를들면 수천대 차량을 세차했다고 붙여놨는데 갖다 다 증거물로 제출했는데 참 이 통탄스러운 일은 민노당에 권영길 후보가 창원에서 그렇게 세차를 몇백대 했는데 그양반은 벌금 몇십만원 때리고 우리는 아예 기소를 안했어요.

후보가 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래서 제가 한 얘기가 그럽니다. 힘없는 민노당은 죄가 있고 힘있는 새천년민주당은 죄가 없구나, 그런식으로 선거를 조작했다 그런점에서 참 무슨 인권대통령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지금도 저양반이 좀 너무 심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과정에서 쌍방간 소송이 여러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지금 정리가 되고 있나)

미국에서 김대중 대통령 셋째 아들의 호화주택의혹과 관련해서 저한테 허위폭로 했다고 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소송이 이제 처음에 KBS를 상대로해서 일단 제가 졌고, 그다음에 아들 걸어서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졌다 해서 일단 소송을 했다가 취하를 했었는데 소송비용을 변상하라고 취하했는데 그걸 이행안하니까 다시 걸었죠.

그래서 그 소송이 진행되다가 2002년 5월달에 김홍걸씨가 구속됐죠. 최규선 사건에 연루돼서 그때 이제 합의해서 취하를 했습니다. 소송은 일단 취하가 됐는데 그뒤에 노무현 정권에서 99년도에 제네바에 가서 제가 인권위원회에서 연설한걸 가지고 2004년 4월 16일날 다시 또 국정원 명예훼손으로 기소해가지고 그거에 대한 보복이죠.

그게. 그렇게 해서 재판을 받다가 2005년 1월에 공소기각 됐습니다. 2005년 1월까지 계속된거죠.


(당시 국정원도청사건 당시에 도청을 확인하기 위해서 들어간...)

그렇죠. 근데 그거는 이렇게 보면 되죠. 일단 국회529호실에서 국회의원들을 도청하고 있다, 사찰하고 있다 이런 의혹을 이제 의원총회에서 제기한건데 여당에서 새천년민주당에서 부인을 했어요.

그럼 들어가서 보자, 들어가서 도청장비가 있는지 없는지 보자, 처음에 이제 합의를 했습니다. 들어가서 보기로. 장영달씨가 그때 아마 수석부총린가 그랬을거에요. 그런데 안에 묘하게도 안철현인가 안기부요원이 지 가방을 그안에다 놓고 밥먹으러 갔어요. 그동안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가서 그 방을 봉쇄를 했습니다.


16. YS, DJ를 가까이서 다 본 드문 케이스중 한분인데 정당사에 있어서 두분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구체적 예를 들어 이야기해달라

뭐 두분 다 역량도 있고 경륜도 있고 이런 분들이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시련과 경험을 겪은 분들 아닙니까. 그점에선 뭐 노무현 대통령보다 다 훌륭한 분들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두분의 단점도 물론 있겠죠. 근데 제가 이제 두분을 이렇게 가까이서 같이 모셨거나 일할 기회가 있어서 이렇게 느낀거는 김영삼 대통령은 저에 대해서만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을 믿으면은 일을 아주 상당히 많이 맡기는 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상당히 꼼꼼하게 직접 챙기시는 형이다, 그런 인상을 좀 받았어요.


(예를들면..)

구체적으로 뭐.....제가 이제 김대중 대통령 이렇게 미국에서 귀국하실 때 아까 동행단을 제가 실무적으로 만들고 또 도쿄까지 수행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과정에서 보면 굉장히 꼼꼼하게 일을 많이 챙기에요. 그래서 이제 제가 아유 그런건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냥 큰 윤곽만 말씀하시라고 이렇게 몇 번 그런적도 있고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보면 그냥 예를들면 미국에 가서 이러이런 일을 해라 하는 방향만 딱주고 나머진 니가 알아서 해라 이런식이거든요. 그러니까 스타일에 상당히 차이가 있어요.

그건 뭐 살아온 과정이 좀 김대중 대통령은 어려운 과정을 많이 겪어서 사람을 상당히 그 이렇게 믿으면서도 한쪽으론 의심을 많이 가지는 편이신거 같고 김영삼 대통령은 좀 그러면서도 그냥 대범하게 이렇게 넘어가는 스타일 아니냐 그렇게 이제 제가 받은 인상은 그렇습니다.


(그부분이 우리 정당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글쎄요. 그게 이제 측근들 예를들면 핵심인사들한테 김영삼 대통령은 많은 재량권을 줬던거 같에요. 사람을 발탁하는 과정이라든가 이런..근데 김대중 대통령 상당히 그 직접하지 않으셨냐 그런 인상을 제가 좀 많이 받아요. 제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은..


17. 지난 촛불집회 속에서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과 부동층이 60%에 달하는 이런걸보고 우리나라 정당위기가 온것인가, 정당정치 어떻게 가야되나 이런 속에서 시작했는데 젊은네티즌들한테 정당정치의 비전이라거나 당부의 말씀 부탁드린다

그러니까 새천년민주당이 처음에 그걸 모르고서 뜯고 들어가봐야 아무것도 없다, 근데 사실은 그 가방안에 59건의 정치사찰보고서가 들어있었단 말입니다. 거기 뭐 의원동향, 무슨 여러 가지 사찰보고서가 들어있었어요.

그러니까 도저히 문을 열수가 없는거에요. 그러니까 여야합의를 깨고 집권당이 아, 문 못연다, 이렇게 된거에요. 그러니까 그상황에서는 한나라당이 문을 여는게 국회의원이 제집문여는거에요. 그거는.

그건 이번에 무슨 이번에 민주당의원들이 단상점거하고 전혀 성격이 다른 사태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국회의원의 정당방위 내지는 정당한 직무수행을 위해서 합의내용을 이행하는거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봐야죠.

국정원에 대한 제가 의혹을 여러 가지 제기한 적이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 국정원을 그야말로 혁명적인 환골탈태를 시키는데 저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점에서 좀 이 부분은 제가 보기에 시기를 많이 놓치지 않았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요. 국정원이 98년9월에 총풍사건 조작하는 과정에서 98년 4월에 중국선양에서 북한사람 최인수를 납치한 사건이 있습니다. 최인수를 납치해다가 총풍사건의 증인으로 세울려고 데려왔는데 이 최인수는 그런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순수한 무역일꾼이었다, 이게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최인수가 고문을 당하다가 국정원의 그 안가 내곡동 안가에서 탈출을 해가지고 다리가 부러져서 상당히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택시를 타고 한나라당 당사에 왔다가 문을 안열어주니까 중앙일보사에 가서 자기가 겪은 일을 녹화를 해놓고 중앙일보사는 걱정이 되니까 국정원에다가 사람 잃어버리지 않았냐 해가지고 이 최인수를 국정원에 돌려줬습니다. 이 최인수가 그뒤에 거꾸로 이제 북한으로 송환이 돼서 지금은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근데 이 과정에서 우리의 그 중국에 있는 비밀정보망이 전부 노출이 되다시피 해가지고 중국정부에다가 당시 국정원장이 가서 사과를 하고 철수시키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지금까지 전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그래서 국정원하고 청와대에다가 청원서를 냈습니다.

이거 조사해달라고. 내가 국회의원 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됐는데 왜 정권이 바뀐 다음에도 이걸 조사하지 않느냐, 이거야말로 참 파렴치한 탄압을 위해서 무고한 북한사람을 납치한 인권유린이고 그런 점에서 이건 용납할 수 없는..여기 가담한 당시 국정원장이나 의원들 왜 지금이라도 처벌하지 않느냐, 색출해달라, 청원서를 냈고 또 저에 대한 두 번의 기소만해도 이거야말로 국정원의 정치활동이거든요. 근데 주도한 사람들이 전혀 처벌받았다는 얘기도 없고 인사조치 당했다는 얘기도 없어요.

그리고 이제 제가 한가지 더 말씀드린다면은 그동안에 전직대통령들이나 고위직들이 스위스에다가 돈을 숨겨놓지 않았냐 하는 얘기들이 많이 억측이죠. 지금까지는. 떠돌았습니다. 우리도 뭔가 조치를 할때가 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태우씨가 왜 스위스에 들렸었는지 또 어떤 전직대통령이 왜 자꾸 외국에 나가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국민들이 굉장한 의혹을 가지고 있거든요. 최근에 미국 국세청에서 스위스 정부에다가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중에 스위스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 명단을 통보해달라, 그래서 스위스 정부가 13000여명의 명단을 통보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돈을 찾으면 탈세로 걸리고 안찾으면 이제 돈을 포기해야 되는 지금 그런 사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전부 수표로 돌려줬기 때문에.

우리도 이번에 국세청장이 바뀌면 스위스정부에다가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중에 스위스에 계좌를 가진 사람 명단을 통보해달라고 요청해서 이런 비자금중에 은닉된거를 회수할 필요가 있지 않냐, 저는 과거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 보면서 또 이사람이 스위스에 가서 별 일도 없이 스위스에 들렸다가 시애틀로 가는걸 보면서 저게 뭔가 의혹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조사를 할려고 여러번 시도했는데 한 국회의원의 힘만으로는 그게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까 말씀드린 그 최인수사건 또 이 스위스은행의 비자금에 대한 의혹 이거는 좀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국정원 요원중에 김기삼이라고 미국에 망명을 해서 이번에 얼마전에 망명이 승인된 사람 있는데 이사람도 정권이 바뀌었으면 그사람 데려와서 그사람이 폭로한 의혹이 진실인지 아닌지 조사를 해야될거 아닙니까.

그런데 구정권에서 국정원장 했던 사람을 거기다 일년동안 앉혀놨으니 국정원장이 아니죠. 구정권에서 장관한 사람을 국정원장으로 앉혀놨으니 그사람이 과연 이걸 조사하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이번에 국정원장을 교체했으니까 이런걸 좀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최인수씨는 무슨 증인으로..)

그러니까 이제 98년 9월에 국정원에서 조작을 한 =장석중, 오정은, 한선기 등에 대한 소위 총풍사건 북한에 대한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이죠. 그당시 이름이. 거기에 이제 소위 장석중이가 그런걸 요청한거를 안다는 증인으로 이 최인수를 납치해온겁니다. 선양에서.

근데 납치해왔을때 대한항공 승무원 복장을 입혀가지고 중국 공항을 빠져나왔는데 그 대한항공 선양지사장하던 원모씨가 구속되가지고 한참 고생을 했어요. 근데 이걸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게 정권이 바뀌어도 밝혀지질 않느냐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게 정권을 바꾼게 아니라 정권을 바꿨다는 인식이 좀 부족하지 않느냐 지금 정부의 핵심인사들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18. 97년도 우리나라가 OECD 가입을 하게 됐다, 당시에 반대도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에 어땠나

당시에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은 OECD를 가입을 당론으로 정하고 또 국책으로 정해서 김영삼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권당으로서는 OECD에 가입을 해야되겠다는 당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야당인 국민회의 뒤에 이제 집권당이 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국민회의가 OECD 가입을 한사코 반대를 했습니다.

끝내는 OECD에 가입하면은 우리 경제가 뭐 위험해진다, 뭐 무리다 해가면서 후진국대우를 계속 받아야 된다, 근데 그건 당시에 그 국제정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이 그당시 무역이나 경제지표나 여러 가지로 봐서 더 이상 후진국으로 취급받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이제 반대를 하고 끝내 반대를 해서 여야협상 끝에 그러면 상임위에 들어와서 표결로 반대해라는 선까지 합의가 됐어요. 그런데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그당시 여당이 한명이 앞서 있었나 그런 정도에 분포였는데 들어와서 반대하기로 한 야당이 숫자를 세보더니 마침 상임위원인 이회창 의원이 광화문쪽에 어디 강연을 가서 있는걸 보구서 자기들이 퇴장하면 의결정족수가 안된다 그래가지고 약속을 어기고 전원이 퇴장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가입안 제안설명을 하고 저녁늦게 한 9시경으로 기억이 되는데 아주 늦게 이회창 의원이 이제 참석을 해서 겨우 정족수를 만들어가지고 상임위 통과시키고 그날 본회의에 회부를 해서 통과를 시켰습니다.

본회의에서도 이분들이 반대토론을 한거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그당시에 물론 그런 걱정을 할 수는 있겠지만은 그런 선진국 그룹에 우리가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 많은 법제도나 또 금융이나 여러 가지 제도적인 어떤 선진화에 기틀은 마련하기가 어렵지 않았겠느냐, 그나마 그런 개혁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외환위기도 잘 극복을 하고 오늘날 투명성을 높인 사회가 되지 않았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나중에 그 집권당이 된 그 야당이 OECD에 가입해서 외환위기가 왔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근데 외환위기라는건 결국 박정희식 관치금융, 박정희식 정경유착, 그 부패가 투명한 사회로 개혁되지 못하고 왔기 때문에 아주 그 제도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그런 그 위기였다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그거를 OECD에 가입했기 때문에 왔다, 그건 전 상당히 옳지 않은 지적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때 당시에 야당의 주장은 상당히 근시안적이고 또 세계에 현실을 너무 좁게 이렇게 평가한데서 나오지 않았느냐 이렇게 비판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정리 : 한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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