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작가)
▲ 이대환(작가)

베트남전쟁을 온 삶으로 살아낸 베트남의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반레 선생이 지난 6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국내에는 그의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2002)이 번역 출간되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을 비롯한 한국 문학인들과 교류가 깊었던 전후 베트남의 대표적 작가다. 이 글은 계간문학지 <ASIA> 발행인인 이대환 소설가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에게 바치는 추모의 글이다.

 

홀어머니와 네 자매가 가족사진 포즈를 잡듯이 다큐멘터리 화면에 등장했다, 초등학교 입학이나 앞뒀을 막내를 뺀 세 언니는 모두 멀쩡한 몸이 아니었다. 팔이 뒤틀렸거나 손이 없거나, 베트남전쟁 고엽제 후유증을 물려받은 2세들이었다. 삶에 지친, 아니 삶을 혐오하고 원망하며 분노하는 표정이 역력한 홀어머니가 그러나 담담히 말했다.

“나의 인생에 마지막 남은 소원은 하나뿐입니다. 부디 막내만은 끝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내가 먼저 죽더라도 언니들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비좁은 객석의 나는 시골 여인의 참담한 소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베트남말이었으니 곁에 앉은 통역을 거쳐야 했다. 다큐영화제에 내놓을 작품이라는 <농부의 팔>이었다. 그것은 다이옥신 섞은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를 베트남 밀림지역에 살포하는 미군의 어떤 작전명이라고, 다큐를 찍은 반레가 일러줬다.

그렇게 나는 반레와 처음 만났다. 정확한 기억이 아니지만 1996년 여름 언저리, 호치민의 어두침침한 작업실, 서울에서 날아간 일행에는 소설가 방현석도 있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과 더불어 벌써 몇 년째 베트남을 드나든 그는 반례와 남달리 친교가 깊어 보였다.

반레
▲ 반레

그즈음 나는 베트남전쟁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한국 호미곶 어느 참전병사 가족의 참상을 소설에 담으려 했다. 총구의 열전이 아니라, 고엽제 후유증에 속절없이 말라 죽어가는 아버지와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하반신 마비에 걸려든 아들이 절망의 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심리적 열전으로 구상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소설 <슬로우 불릿 Slow Bullets>(아시아, 바이링궐 에디션17, 2013)으로 태어났다. 서서히 날아와 마침내 심장에 박히는 총알이란 뜻으로, 1980년대 베트남전 참전병사들의 고엽제 후유증이 미국의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을 때 미국인이 발명해놓은 이름이다.

반레의 필름이 담아낸 베트남 홀어머니의 담담한 절규는 한 작가의 영혼에 걸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한국 호미곶 참전병사의 골수로 스며들었다. 어쩌면 그런 인연이었을까. 반레는 포항을 세 차례 다녀갔다. 신생 영화사가 소설 <슬로우 불릿>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에 선행표창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영화 제작은 크랭크인 직전에서 멈춰버렸다). 포항제철의 불빛들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영일만 밤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경주 왕릉을 둘러보고, 천 년 고찰 기림사를 거닐었다.

기림사에서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 천 수, 손이 천 개.”

“천수지만, 손은 천한 개.”

내가 한자(漢字) 그대로를 풀이하자, 반레는 얼른 손 하나를 더 보탰다. 그리고 우리는 마주보며 환한 웃음꽃을 피웠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 한 찰나였다.

반레는 누구인가? 그를 주인공으로 불러들인 소설 <존재의 형식>을 쓰기도 했던 방현석의 조사(弔詞)에 행장이 잘 간추려져 있다.

반레의 본래 이름은 레 지 푸이였다. 하노이 남부의 아름다운 고장 닌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일곱 살에 자원입대했고,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까지 10년을 전장에서 보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입대 동기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이었다. 레지푸이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 문예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를 레지푸이가 아닌 ‘반레’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반레는 시를 좋아한 그의 전우였다. 전쟁터에서도 시집을 꽂고 다니며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쓰던 반레는 살아남은 다섯 명에 속하지 못했다. 레지푸이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전쟁에서 죽은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지난 45년 동안 시를 쓰고, 소설을 발표하고, 영화를 찍었다.(한겨레, 2020. 9. 9.)_

2007년 6월, 나는 포스코 창업회장 박태준 선생(2011년 12원 작고)과 호치민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밤에 반레를 만나러 나갔다. 회포의 술잔을 나누려는 마음에는 그리움과 존중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몸이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셋이었다. 순정한 얼굴이 그대로였다. 평화를 옹호하는 정신이 그대로였다. 단호함도 그대로였다. “침략자에 맞서는 전쟁이라면 나는 다시 총을 잡겠다.” 살가운 웃음을 곁들여 가만히 농담하듯 저 말을 뱉을 때는 언뜻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날 밤에 나는 반레의 잔을 다 받았다. 술값을 내려는 나를 그가 막아섰다. “손님이지? 형이지?” 오른손 검지로 나를 한 번, 자신을 한 번 가리켰다. 젊은 시절에는 십여 년 동안이나 방아쇠를 당기고, 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맞아 글을 써온 손가락이었다. 나는 취했다. 반레의 향기가 알콜보다 강했다. 술값도 못 내고 석별의 악수를 나눈 내 오른손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천수관음보살좌상이었다.

반레와 한 번은 더 해후할 수 있었을 길을 막아버린 코로나19 팬데믹이 떠나는 이의 영전에 꽃 한 송이 바칠 예의마저 없애버렸다. 호치민에서 받아온 천수관음보살좌상이 늘 우정의 유산으로 존재할 테지만, 반레가 내게 남긴 가장 소중한 선물은 자신의 얼굴에 피어난 순정한 영혼, 그 전쟁의 연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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