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반월박지도의 퍼플교 <사진=홍선기 목포대학교 교수 제공>
▲ 신안군 반월박지도의 퍼플교 <사진=홍선기 목포대학교 교수 제공>

 

최근, 미국 CNN 등 세계의 유수 언론사는 신안의 퍼플교를 한국의 특색 있는 관광지로 소개했다. 퍼플교 인근에는 라벤더와 자목련 등이 피어있고 마을의 지붕 모두가 보라색으로 칠해져있다. 그야말로 보라색 천지이다. 섬에 자생하는 도라지꽃과 자색 고구마에서 영감을 얻어 보라색을 컨셉으로 정했다고 한다. 

각종 언론사들의 집중 조명과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지자체 수장과 공무원들이 한껏 고무되어 있는 모양이다. 수익이 늘어난 지역주민도 반기는 눈치다. 공동화되어 가는 섬을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은 분명 성공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러 찜찜한 의문을 남긴다. 그러한 노력이 섬 고유의 정체성과는 그리 관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도라지꽃과 자색 고구마가 그 섬의 명물로 인식되어 왔는가? 명도와 채도가 낮은 보라색이 섬의 환경과 어울리는가? 섬의 역사 혹은 섬 주민들의 삶과 보라색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하지 않는다. ‘섬’이 오히려 그 보라색으로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병풍도 일대, 섬티아고에서도 마찬가지 상념에 젖는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12사도를 기리는 그 작은 성당들은 귀엽고 아름답다. 왠지 바다하고도 잘 어울린다. 이곳을 방문한 블로거들의 글도 호평일색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품의 열등한 모방에서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접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런 컨셉이 의미를 가지려면 한국인 중에서 처음으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다녀온 성직자가 있다든지, 아니면 천주교 박해나 포교와 관련한 사건이 있다든지, 아니면 적어도 산티아고가 이 지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든지 하는 어떤 ‘기원’ 내지 계기가 있어야 한다. ‘섬티아고’라는 명칭 또한 경박해 보인다. 경기도의 한 지자체가 한류의 세계화를 위해 조성한 문화관광 복합단지의 이름을 ‘한류우드’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을 기억한다. 미국의 할리우드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심이 그런 해프닝을 낳은 것이다. 

외국 유명 관광자원의 ‘모방’은 영원히 모조품(이미테이션)에 머물 뿐 숨결과 아우라를 품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미테이션이라도 즐기고자 하는 대중의 값싼 욕망에 영합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영혼을 파는 행위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프랑스 에펠탑을 본떠 관광단지화 한 중국의 한 지자체가 조롱을 받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중국 고유의 콘텐츠만으로 중국문화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볼거리,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칠 텐데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자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서구 추수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섬의 관광자원화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에서 가져오려고만 하지 말고 자체의 콘텐츠를 발굴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섬의 역사, 섬사람들의 삶과는 하등 관계없는, 오로지 관광수익만을 얻기 위한 섬 개발은 지양되어야한다. 설사 그것이 섬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본래의 ‘섬’성을 지워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비단 ‘섬’성이 사라지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외부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이식되어 섬 고유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전에 제주 표선읍의 한 민속촌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옛 제주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 비교적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제주 토속신앙을 소개하는 영어 게시판을 읽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심방(무당)을 마녀라는 뜻의 ‘Witch’라고 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수 년 전의 경험이니 지금은 부디 바른 표기를 찾았기를 바란다).

물론, 번역자의 편견이나 자질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섬 문화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투영된 것이라고 본다. 무속은 섬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신앙체계이다. 아마도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서 제주민의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제주다움을 이야기할 때 정확히 이해시켜야할 핵심요소이다. 하지만 외부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탓에 당국자 누구도 그 엉터리 번역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의 정체성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신비의 섬’,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로 하는 힐링의 섬’, ‘미래첨단산업을 견인하는 문화산업의 원형콘텐츠가 풍부하게 매장된 보물섬’ 등으로 재정의 되고 있다. 이러한 제주도의 지향성이 과연 제주도민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 생태 등을 제대로 고려한 결과인지는 의문스럽다. 섬이 외부인의 ‘힐링’과 ‘즐거움’을 위한 공간으로만 인식 내지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물론 섬과 지역경제의 활력을 되찾으려는 당국의 열정과 노력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 열정과 노력에 인문적 성찰이라는 ‘거름망’을 하나 더 장착해줬음 하는 바람이다. 

그리스 산토리니 <사진=홍선기 목포대학교 교수 제공>
▲ 그리스 산토리니 <사진=홍선기 목포대학교 교수 제공>

 

지중해의 작은 섬 산토리니가 세계적인 휴양지가 된 이유는 흰 벽과 푸른 지붕을 가진, 절벽 위로 층층이 지은 건축물 때문이다. 원래는 건축 재료가 누르스름한 화산재이고 건축물의 색깔 또한 통일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짙푸른 지중해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흰색과 파란 색으로 건축물의 외관을 입히고, 아랫집의 지붕이 윗집의 테라스가 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해 보잘 것 없던 외딴섬을 세상에 둘도 없는 경관자원으로 재탄생시켰다. 미학적 안목과 인문적 성찰이 한데 어우러져 ‘섬’성의 관광자원화에 성공한 것이다.

섬은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양면성은 두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조절해온 섬주민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남도의 독특한 담 형태를 본다면 수긍이 갈지도 모르겠다. 집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높이에, 바람과 햇빛, 온갖 작은 생물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멍 숭숭 뚫린 담장 말이다. 그것은 내 영역을 완전히 개방하겠다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외부를 배제하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담 안의 공간은 저마다 주인이 있겠지만 외부의 시선이나 방문을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담겨져 있다. 물론, 담 안의 공간은 주인이 가꾼다. 주인의 독특한 취향과 자신의 삶터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기는 그런 집은 늘 방문자로 넘치기 마련이다. 

섬의 관광자원화는 이런 식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연륙교가 여기저기 생기면서 섬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요즘, 더더욱 당국자들의 전향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언론의 관심과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마냥 도취되어 있을 때가 아닐 성싶다.

 

* 김개영 교수는 연구와 창작을 병행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는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도서문화연구원 공동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설집으로 <거울사원>(민음사)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천승세 소설에 나타난 섬공간과 무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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