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직후 96년도 15대 총선이 치러졌는데, 신한국당 당시 여당이 처음으로 서울에서 이긴 선거가 됐지 않나?

- 그렇죠. 예. 그래서 선거를 치렀는데 그러니까 민주당도 있고 새정치국민회의가 있고 신한국당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선거를 치러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서울에서 의석을 많이 못 얻었어요. 그때 숫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20석 정도나 되나? 말하자면은 민주당이 출마한 지역에서 많이 떨어졌어요. 분열이 됐으니까. 분열이 돼서 수도권에서 저조했죠. 그때 경험이 뭐냐면 호남표만 모으면 된다, 그게 이제 옛날처럼 통일민주당이 세가 쎌 때는 신한국당 표를 갉아먹잖습니까. 그런데 이 꼬마민주당은 옛날 YS같은 통일민주당처럼 대중적인 정당이 못됐잖아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 석도 못 냈죠. 그때.
그러니까 저쪽 표를 별로 흡수 못한 거죠. 그리고 이쪽 새정치국민회의는 호남중심으로 말하자면 선거가 치러진 셈 아니에요? 갈라질 때 명분이 약하니까 그 바람에 서울권에서 호남출신들은 거의 다 떨어졌어요.

(경향신문인터뷰에서 현 민주당에 대해 너무 지역만 내세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18대 총선도 그렇게까지 참패할 수 없었는데 그게 연결된 것 같다)

- 그러니까 96년 그 경험이 있어서, 제가 시에서 다시 돌아와서 96년 총선기획단장을 또 맡아서 했어요. 그런데 선거를 끝나고 분석을 해보니까 새정치국민회의는 호남비중이 너무 크더라고요. 그리고 공교롭게 가령 이제 민주당이 제일 당선이 많이 되는 데가 서울에서 서남권 아닙니까. 구로, 금천, 관악, 동작 이쪽 아닙니까. 거기서 한광옥, 박실, 김병오 다 떨어지고 저 혼자만 당선됐었다니까요. 그게 왜 그렇게 됐냐면 그 사람들이 다 호남사람들이에요. 저는 충청도이기 때문에 호남표만 의존하지 않으니까 당선이 됐는데 호남표만 의존했던 사람들은 다 떨어졌어요. 그때 그걸 보고서 아, 이게 수도권에서 호남표만 갖고서는 선거가 힘들다, 안 된다 이렇게 저는 이미 경험을 96년에 했기 때문에 이번 통합과정에서도 호남지역주의가 강화되면 수도권에서 이건 참패한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민주개혁지지층들이라는 것은 호남을 상당한 기반으로 하지만 거기에 수도권에 30~40대의 개혁성향의 젊은 표를 얻지 못하면 그건 못 이긴다, 그래서 전 반대를 했던 거에요. 통합하는 것을.
대선 때야 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해서 뭐 하는 것이야 불가피한 일이지만, 총선 때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수도권에도 불리할 뿐만 아니고 호남도 단일정당이 되면 발전을 못하는 거에요. 호남에서 단일정당이 되면 그 당이 발전을 못하는 것 아니에요. 경쟁구도가 없으면. 그래서 저는 그때 반대를 했던 거죠.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미 대선은 진 것이고 총선이라도 하려면 전국정당을 유지해야 이 다음 대선을 기약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여기서 지역주의로 가버리면 그럼 영남과 충청을 포기하게 되는데..

(구민주당과 통합이 결국 그런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반대했다는 것인가?)

-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14. 96년 경험을 통해 다음 대선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때 사실상 DJP가 준비 되는 것인가?

- 그렇죠. 그러니까 96년 총선 끝나고 그게 4월 아닙니까. 그리고 대선은 12월이잖아요. 바로 이제 DJ가 혼자는 당선이 안 되는 거니까. 92년 경험도 있고 혼자는 안 되는 거니까 DJP연합을 해서 일단 가야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 해서 그것도 사전에 막후조정을 했지요. 그때 조정을 해서 DJP연합쪽으로 일찍 방향을 잡은 거죠. 그러니까 총선 끝나자마자 바로 잡은 것이니까.

(그때도 DJ는 통 크게 통합한 것인가?)

- 그렇죠. 그때 이제 반을 주는 걸로 당선이 되면 총리 이하 반을 주는 걸로 그렇게 합의를 한 거죠. 연정을 이제 본격적인 연정을 전제로 해서 이제 그 DJP연합을 한 거죠.

(그때 또 하나가 JP의 내각제에 대한 부분인데 나중에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 예. 그렇죠. JP는 이제 그럼 개헌을 해서 내각제로 가자는 것이었고 그것도 약속을 했죠. 그때. 근데 나중에 개헌선이 확보가 안 되니까 지켜지지가 않는 거죠. 그게.

(실제 많은 분들은 내각제에 대해서 그 당시 동의하지 않았지 않나?)

진심으로 동의한 건 아닌데 연정을 하려니까 약속을 안 할 수가 없죠. 약속을 해서 이제 당선이 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과반지분은 다 주었죠. 총리하고 경제부처 장관에 관한 임명권은 다 준거 아닙니까. 제청권은. 다 줘가지고 이제 했지요. 하다가 나중에 내각제 부분에 대해서는 개헌을 해야 되는데 한나라당에서 동의를 안 하지 않습니까. 한나라당에서 동의를 안 하니까 개헌을 어차피 못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JP가 연정을 깼죠. 깨가지고 소수당이 돼버린 거죠.

15.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과정... 국민회의로 대권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국민회의로 분당되었듯이 국민회의를 해체하고 새천년민주당으로 다시 창당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그렇게 했는데 왜 그랬는가. 당시 비리들이 문제가 돼서 다시 창당한 것인가?

그건 아니고 이제 집권을 했잖아요. 집권을 해서 2000년 선거를 치러야 되는데 DJP연합이 깨졌지 않습니까. DJP연합이 깨져서 인적자원을 더 우리가 강화를 해야 되잖아요. 새로운 사람들 더 영입하고 당을 이제 좀 리모델링을 해야된단 말이죠. 선거 때까지는 새정치국민회의 가지고 했는데 그것 가지고 아까 말한 것처럼 지역적인 한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2000년 선거에서 그걸 벗어나려고 새로운 사람 영입하면서 말하자면 DJ 이후의 당을 이제 하나 움직일 수 있는 당을 만드는 그런 차원에서 창당을 새로 하는 거죠.
그때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잖아요. 집권당이 됐으니까 약간 더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제 이래저래 참여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많이 새로 들어왔죠.

(그때 처음으로 보수인사들이 들어왔다.)

- 네. 영입이 됐죠. 관료출신이라든가, 기업가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영입이 됐죠.

(지역주의 타파, 국민의정부 시절 이른바 동진정책이 방향이 잘못됐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 효과를 못 봤죠.

(보수인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민주개혁세력들을 풀어주면서 그분들과 손을 잡았어야 됐지 않나)

그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가 집권을 했는데 집권하기 전까지 아까 말한 것처럼 굉장히 지역주의가 가미된 강화된 새정치국민회의로 집권을 한 것 아닙니까. 2000년에 와서는 자민련이 떨어져나가니까 이제는 새정치국민회의 차원으로는 안 되는 단계가 온 거에요. 그럼 거기서 이제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고 노선을 이제 조정해야 되는데 IMF직후 아닙니까. 그때가. IMF직후기 때문에 더 개혁적인 데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됐었어요. 오히려 조금 더 국가경영에 신뢰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을 더 영입을 해야된다는 그런 그 당시 분위기가 훨씬 더 강했죠.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개혁적인 것보다는 조금 더 실용주의적인 쪽으로 더 강화가 된 거죠.

(영남개혁세력들은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들도 한다)

그거는 아니고 왜냐면 영남쪽을 많이 영입한건 아니고 수도권 주로 그랬던 거고 영남쪽에서는 참여를 잘 안하려고 그랬죠. 오히려. 왜냐면 새천년민주당으로 영남에서 당선이 어렵다고 보니까 참여를 잘 안 하려고 했었죠.

16. 6.15공동선언이 시기적으로 총선 앞두고 함으로써, 오해도 가지게 됐고 그랬다. 시기적절했다고 보나?

- 그것은 그땐 제가 정부에 있을 때가 아니고 이제 총선관리할 때인데, 당시 상황이 좀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어요. 그걸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총선 때 그걸 활용하려고 하는 측면보다는 빨리 발표하지 않으면 오히려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날짜를 땡겨서 한 거에요. 땡겨서 했는데 오히려 선거에는 그게 별 도움이 안됐죠. 그때.

(오히려 역풍을 받았죠)

- 예. 역풍을 받았죠. 그때만 해도 선거용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제 그 후에 추진이 되고 추진된 결과가 확인되면서 굉장히 중요했다는 게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는 거 아닙니까.

인터뷰어 : 김능구 폴리뉴스 발행인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