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1일 ‘여순사건’ 민간인 3명 재심 확정
1948년 ‘제주4.3사건’토벌 반대하며 시작
반란군 진압‧동조자 색출과정에서 민간인 ‘즉결처분’, 정당성 부재

지난 21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을 확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진= 연합뉴스 제공>
▲ 지난 21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을 확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진= 연합뉴스 제공>


[폴리뉴스 이지혜 인턴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1일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모씨 등 3명에 대해 재심을 확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제주4.3’사건에서부터 ‘여순사건’까지 이어지는 민간인 희생의 진실이 밝혀질지 주목되고 있다. 

재심이 확정된 순천시민 장씨 등은 1948년 10월 당시 반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군사법원에서 즉시 사형당했다. 이들에 대해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 있어 기록이 남지 않아 어떤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장씨의 유족 등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군‧경이 438명의 민간인을 무리하게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림에 따라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에 대한 체포·감금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수 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이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2000여 명이 제주 4·3사건 투입을 반대하며 반란을 시작으로 1950년 9월28일 수복 이전까지 전남·전북·경남 일부지역 민간인 집단희생과 일부 군경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여순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민간인은 여수 5000명, 순천 2000명 등 총 1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대법 판결에 대해 22일 전남도청에서 성명을 내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과 아픔을 안고 살아오신 유가족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늦었지만 재심 결정을 계기로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16대 국회 때부터 수차례 발의됐던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관련 법안이 지금까지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며 "국회는 여야를 떠나 하루빨리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21일 강정희 전남도의회 위원장 역시 대법원의 결정을 환영하며 “국가의 무법과 위법 그리고 불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그 진실이 규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순사건’ 당시  여수 서 초등학교에서 반란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 중인 국군 <사진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 ‘여순사건’ 당시  여수 서 초등학교에서 반란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 중인 국군 <사진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제주 4‧3사건 토벌 반대” 내세우며 반기 든 제14연대

해방 직후 여수는 우익과 좌익이 큰 마찰없이 공존하는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분단이 가시화되면서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남한의 단독선거 시행을 두고 두 진영이 충돌했다. 

한편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 무장대의 관공서 기습과 미 군정의 강압 때문에 일어난 4.3사건이 터졌다. 육군본부는 10월 19일 오전 7시, 여수 제14연대에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4연대에는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 좌익계열 군인들이 다수 분포해있었다. 1948년 5월에 창설된 제14연대는 창설 과정에서 좌익 청년들을 적극 모병했다. 

당시에는 지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사상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충원을 하는 상황이었다. 남로당은 장교와 사병을 구별하여 군 내부에 많은 인원을 침투시켰고, 경찰에게 쫓기는 좌익 동조자들이 군대로 도피하기도 했다.

육군은 ‘숙군사업’을 진행하면서 좌익계열 군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제14연대의 오동기 연대장도 반이승만 계열로 간주되어 상부에 체포됐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 파병에 반대하는 입장이 더해져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19일, 지창수 상사는 비상나팔을 불어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키고 “여수경찰이 쳐들어온다”,“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연설하며 선동했다. 병사들은 호응했고, 반대파들은 즉각 사살됐다. 

당시 군과 경찰은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보조전력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군을 자주 무시하고 조롱했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일제에 복역했던 친일경찰들이 미군정 하에서 그대로 지위를 유지했다. 군은 경찰을 ‘매국노’라고 멸시했다.

군사력에 있어서 경찰은 반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반군은 20일 오전 9시 주요기관과 건물을 접수하며 여수를 완전히 장악했다. 


여수‧순천 장악... 우익인사와 경찰 사살하기도

병사들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호소문을 내걸었다. 이 호소문에서 그들은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라고 밝혔다. 

반군이 시내에 진입하면서 시민들 600여명이 합세했다. 경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반군은 20일 오전 9시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청년단원, 지역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했다.

여수를 출발해 순천으로 간 반란군 일부는 홍순석 중위 휘하 2개 중대와 합세하고, 반군을 방어하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폭동을 일으켜 반란군에 합류했다. 20일 오후 3시경 반군은 순천을 완전 점령했다. 

지하활동을 하던 남로당원 학생 등 좌익 인사들은 사건에 적극가담했다. 남원, 구례, 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방좌익세력들이 지역을 점령해 제14연대가 무혈입성하는 사태도 있었다. 

좌익 계열 인사들은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인민재판을 실시했다. 일부는 경찰서장 및 우익 인사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반군과 경찰의 교전에 있어서 무고한 시민들이 날아온 총알에 희생되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도 생겼다. 

반군과 동조자를 둘러싸고 있는 국군 <사진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 반군과 동조자를 둘러싸고 있는 국군 <사진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7일 만에 여수 탈환한 국군의 ‘피의 보복’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급히 진압에 나섰다. 21일 육군총사령부는 반군토벌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진압부대는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수색대로 편성됐다.

22일에는 여수‧순천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이승만은 다음 날 국민들을 대상으로 경고문을 발표해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되, 앞으로는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송호성 준장은 수색대대와 장갑차, 제3연대를 앞세우고 직접 여수 진압작전을 시도해 27일 여수를 완전히 탈환했다.

여수를 장악한 경찰부대와 군인들은 반군 협력자와 좌익세력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진압군은 경찰요인이나 청년단원 등의 증언을 통해 색출한 사람들을 뒷산이나 학교 인근 등에서 총살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별다른 재판 없이 주민들이 군에 의해 즉결처분 당한 것이 문제가 된다. 무차별로 연행된 주민들 가운데에는 머리가 짧거나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당했다. 또한 지역주민들을 모두 반군 및 좌익으로 간주해버린 잘못된 인식으로 민간인들이 다수 사살됐다. 

2010년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여순사건에서 실명이 확인된 124명의 피해자 중 10에서 30대가 117명으로 91.9%를 차지한다며,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정당성 없는 ‘즉결처분’, 남은 것은 ‘여순사건 특별법’ 통과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즉결처분’의 주체는 위로는 연대장에서부터 군 헌병대와 정보과 요원, 그리고 일반사병에 이르기까지 광범했다. 이러한 사실은 군의 ‘즉결처분’이 일정한 원칙이나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고 ‘즉결처분’의 정당성 부재를 지적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4당은 지난 해 ‘여순사건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 특별법은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상자를 위한 의료지원금 등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비슷한 특별법이 2001년 처음 발의된 이래 세 차례나 좌절됐고, 20대 국회에서만 5개의 법안이 발의돼 18년째 표류중이다. 이번 대법원의 재심 결정에 따라 ‘여순사건 특별법’도 탄력을 받을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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